작가회의 30주년 "아현호프 아저씨 어딨습니까?"

[오마이뉴스 2004-11-11 19:28]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 작가회의 3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가진 문인들. 좌로부터 이시영, 김형수, 이경자, 김정환. ⓒ2004 민족문학작가회의 작가회의, 청년을 넘어 장년의 길로 들어서다 1974년 11월 18일 종로거리. 일군의 작가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전횡을 질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김지하 시인을 석방하고, 사상과 양심·창작의 자유 보장하라"는 구호가 외쳐졌다. 이후 당연한 수순처럼 줄줄이 경찰서와 공안기관으로 연행돼 고초를 겪은 시인과 소설가들. 이른바 '민족민중문학 전선의 첨병들'이었던 고은, 조태일, 이문구, 황석영 등이 주도하고, 당시 갓 등단해 '영민한 젊은 작가'로 지칭되던 송기원, 이시영 등이 실무를 맡아 진행한 '문학인 101인 선언'. 김동리와 조연현 등이 주도하던 보수문학단체 '한국문인협회'와는 전혀 다른 이념적 노선과 실천지침을 천명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의 탄생 순간이었다. 이후 1987년 확대개편을 통해 민족문학작가회의(현 이사장 염무웅·이하 작가회의)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자실'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청년을 넘어 장년의 길로 들어선 작가회의는 오는 11월 18일 백범기념관에서 '30주년 기념행사-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를 여는 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해 독자들과 함께 지나온 30년을 평가하고, 다가올 30년을 계획한다. 18일 열릴 기념식의 사회는 자실 창립 당시 최연소 회원(26세)이었던 <만월>의 시인 이시영과 1984년 자실 사무국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소설가 공지영이 맡았다. 김정환 시인이 감독할 기념식에서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 챌 각종 이벤트도 벌어진다. 작가회의 최고령 시인인 김규동(83)과 최연소 시인인 김보영(23)이 나란히 개회사를 선포하고, 전후(戰後) 문단 최고의 '마당발'로 평가받는 채광석 시인(87년 타계)은 명예 사무총장으로 추대된다. 행사장인 백범기념관 바깥에는 '문단의 명필'로 이름 높은 남정현, 구중서, 고은, 김성동의 휘호가 전시되고, 화가 신학철, 민정기, 박불똥, 이철수의 그림도 걸린다. 가수 이미자와 작곡가 김민기, 연극인 백성희와 민화가 고우영은 이날 작가회의로부터 '우정상'을 받을 예정. 각종 부대행사와 심포지엄 등도 이어져 기념식 외에 부대행사도 풍성하다. 11월 13일에는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에서 '전국문학인대회'가 1박2일에 걸쳐 진행되고, 17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는 작가회의 30년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료-사진전 '문학의 길, 역사의 길'과 도자기-시판화전 '100년 동안의 시'와 '21세기를 노래하는 새로운 목소리들'이 개최된다. 사진전의 실무책임은 <세월아, 삶아>의 이승철 시인이 맡았다. 11월 24일부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열리는 '사랑과 전투의 시인 김남주'전(展)과 같은 장소에서 12월 3일 진행될 심포지엄 '김남주의 삶과 문학'도 온통 민중을 향해있던 김남주의 생과 시작품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이와 함께 작가회의는 '30주년 기념 바자회'와 '작가들의 겨울 산행'도 준비중이다. 작가회의는 위 행사들과 더불어 30주년 기념 감사패를 받을 8명의 사람들도 정했다. 작가들의 공안사건 변론을 도맡았던 홍성우 변호사와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작가회의 기관지를 출판해줬던 소병훈 사장 등이 바로 그들. 8명 중 술집 주인이 2명이나 포함된 것이 이채롭다. 두 술집 모두 이젠 사라졌지만 문인들에겐 아직도 '전설적 주점'으로 불리는 종로 '탑골'의 주인 한복희씨와 마포구 '아현호프'의 주인아저씨. 행사를 준비중인 이시영 시인은 "아현호프 주인을 아직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고 전했다. 작가회의 소속 문인들이 왜 그토록 간절하게 그 아저씨를 찾고 있는지 이유를 짐작케 해 줄 2년 전 기자의 졸고를 아래 붙인다.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해병대 아저씨' 작가회의 역사와 함께 했던 목로 '아현호프' ▲작가회의가 애타게 찾고있는 아현호프 아저씨. ⓒ작가회의 제공 마포 아현동 연탄재 쌓인 뒷골목 어귀 눈보라 송이송이 잘 오신다 목덜미에 사타구니에 아슴푸레한 어깨 위에 우우우 안기다 곤두박질친다 길 잃은 동무들 '아현호프'에 퍼질러앉아 철 지난 유행가를 목청껏 부를 때 기대일 언덕도 몸 눕힐 벤치마저 없어 산신이 부서지는 세기말의 시간들 ...... 무너져라, 무너져라, 무너져 내려라 청춘이 나에게 가르쳐준 길은 왜 그리 먼가? - 이승철 '청춘의 먼길' 중에서. 87년 9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마포구 아현동에 새 둥지를 마련했다. 울혈과 울분의 80년대. 뼈다귀해장국에 소주 한 병, 노가리에 생맥주 한잔은 그 맺힌 피와 가슴 속 분노를 때론 누그러뜨리고, 때론 폭발시켰다. 작가회의 사무실과 지호지간에 있었던 '아현호프'. 그 술집은 87년부터 2001년 여름까지 작가회의 소속 작가들 모두에게 '고향'같은 곳이었다. 술집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술집'. 팔뚝에 하트와 화살 문신이 새겨져있던 아현호프 주인아저씨. 젊은 시절엔 크게 한가락했을 것 같았던 그 아저씨. 해병대 130기였다던가. 89년 남북작가예비회담 시도가 무산되었을 때, 만취해 술집 바닥에 큰 대자로 드러눕던 이도윤을 비롯한 젊은 작가들의 눈물과 아픔을 함께 앓아주던 사람. 90년대 초반. 이승철의 시처럼 '철 지난 유행가'인 '임을 위한 행진곡'과 '우리의 소원'을 가게가 떠나가라 합창해도 그저 담담히 바라보며 웃기만 하던 사람. 21세기 서울 어디에 5000원 짜리 과일안주가 있을까? 하지만 딸들의 강권으로 2001년 문을 닫기까지 아현호프의 과일안주 값은 근 10년 가까이 5000원에서 멈춰있었다. 최고급 안주는 일금 8000원의 통닭. <국경>의 작가 김남일이 즐겨먹던 3000원 짜리 번데기도 맛이 좋았다. <국토>의 시인 조태일(99년 타계)은 그 싼 안주도 남기는 것이 아까워 담뱃가루 지근거리는 낡은 양복 호주머니에 변색된 사과를 숨겨서는 다음 술자리 안주로 내놓았다던가. 조 시인이 500CC 생맥주 20잔을 마시고도, 화장실 한번 안 갔다는 믿기 힘든 사실은 아직도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아현호프'를 둘러싼 전설의 하나로 떠돈다. <나의 칼 나의 피>로 기억되는 시인 김남주(94년 타계). 93년 작가회의 상임이사를 맡았던 그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현호프'의 단골. 2000원 짜리 계란말이 안주에 소주를 즐겼다. "씹팔, 좆 돼버렸어"라며 90년대의 지리멸렬함에 독설을 던지던 그는 그 부실한 안주와 독주 그리고, 주체 못할 분노가 자신의 췌장에 암세포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공포의 유신시대. '4.3 제주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순이삼촌>을 내놓으며 박정희 정권과 대적한 열혈의 소설가 현기영(현 문예진흥원장). 무엇에건 거침이 없는 성격이었지만, 아현호프 주인아저씨에게는 언제나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고? 현기영은 해병대 131기. 나이는 41년생 동갑내기였지만, 해병대 기수에서 한 끗발이 밀렸던 것이다. 말수가 적은 주인아저씨가 해병대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왜 그리도 말이 많아지던지. 그 장광설이 펼쳐질 양이면 현기영은 슬그머니 화장실로 피했다. '아현호프'의 재래식 화장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그런 거대하고도 깊은 구멍(?)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취한 문인 몇몇이 발을 헛디뎌 빠질 뻔했다는, 누구는 빠졌다는 소문이 흉흉했던 '아현호프'의 어둡고 눅눅했던 화장실. 소설가 김신우를 비롯한 20대의 젊은 여성작가들은 그 화장실이 무서워 인근 '애오개' 지하철역 화장실까지 출장(?)을 다녀오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어는 원로작가는 "이 화장실이 왜 작품화되지 않느냐"는 우스개를 하고. 그러나 이제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청년' 이도윤의 눈물도, '전사(戰士)' 김남주의 걸쭉한 욕설도, '검은 야생마' 조태일의 전설적 폭음도, 5000원 짜리 과일안주도, 삐걱대는 문을 단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까지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아현호프가 있던 장소엔 폼 나는 대형 통유리의 '현대자동차서비스'가 들어섰고, 화장실은 수세식 좌변기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문인들은 '아현호프'를 영영 잊었는가? 천만에다. <관촌수필>의 대문장가이자 아현호프의 부침(浮沈)과 함께 한 이문구(전임 작가회의 이사장·2003년 타계)의 "지게꾼밥집 같지만, 안 오고는 못 배겨낼 끈덕진 정(情)이 여기 있다"라는 말을 기억하는 시인과 소설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아현호프'는 '추억한다는 것의 따뜻함'을 상기시키며, 작가들의 가슴 안에서 언제나 건재(健在)할 것이다. /홍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