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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픽션>유경숙
맨발의 그녀
여자는 맨발이었다. 맨발인 채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경칩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 응달엔 서릿발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살점 하나 없는 여자의 발등엔 푸른 정맥이 수조엽락(樹凋擛落)에 든 나뭇가지처럼 도드라졌다. 균형 잡힌 어깨며 날렵한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은 품새였다. 여자의 뒤꿈치를 올려다보며 Y는 천천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자가 부담을 느꼈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손으로 나무를 껴안고 옆으로 비켜섰다. 먼저 앞장서가라는 몸짓이다. 등산로는 겨우 한사람이 한 발짝씩 내디뎌야하는 좁고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Y가 고개를 까딱하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올라서자 여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분홍색 코끝에 대롱거리는 맑은 콧물과는 대조적으로 여자의 뺨엔 검은 꽃이 피어있었다.
능선 하나를 넘은 Y는 양지바른 중턱에 앉았다. Y가 쉬어가는 장소는 돌확처럼 움푹 파인 너럭바위 위다. 늘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어 간다. 커피를 다 마셔갈 즈음 여자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옆길로 지나갔다. 여전히 맨발인 채로. Y는 커피가 조금 남았으니 마시고 가라며 여자를 불렀다. 여자가 잠시 멈칫거리더니 예닐곱 발짝을 되돌아와 Y의 옆에 섰다. Y는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가득 따라주었다. 크래커 몇 조각도 여자의 손에 건네졌다. 말없이 커피잔을 받아든 여자가 배낭을 내려놓더니 장갑으로 콧물을 닦으며 깔개를 펴고 앉았다.
여자는 배낭에서 양말과 신발을 꺼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발가락이 금방 동상에 걸리니까.”
“맨발로 땅을 밟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는 들었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 봐요? 지난주에도 맨발로 걷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데 기미가 좀 깊었군요, 제 얼굴처럼. 요즘 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기미만 보여요. 엷게 낀 기미도 현미경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뿌리가 깊은지 얕은지가 다 들여다보이거든요. 기미 낀 얼굴을 보면 남의 일같지 않고 심란해요.”
여자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다가앉더니 Y의 뺨에서 기미들을 뽑아낼 듯이 눈길을 가까이했다. 작년 여름부터 생리가 끊기더니 기미가 돋기 시작했어요. 병원에서는 심한 스트레스성으로 일시적 현상일수도 있고 이대로 조기폐경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알고 보면 스트레스가 참 무서운 병이에요.
여자는 끔찍한 일을 겪은 후 나타난 현상이라며 낯빛이 흐려졌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학원비를 보태려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가 곤욕을 치렀어요. 하루 서너 시간만 일을 하고도 사오만원을 벌수 있다는 친구 말에 따라나섰다가 이렇게 망가져 버렸죠. 노래를 썩 잘 부르지 못해도 시간당 이만 원은 거뜬히 벌수 있다는 말에 그만…. 멀리 떨어진 딴동네에 가서 일을 하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강을 건너갔지요. 강을 건넌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직장근처를 벗어나 멀리 온다는 게 강 북서쪽산성 밑의 장어구이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옛 나루터에서 만났지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현기증이 나요. 여자는 체머리를 앓는 사람처럼 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친구는 제발 촌티를 내지 말라고 다그쳤고, 주인남자는 옷차림을 보더니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어요. 네 명의 남자가 룸으로 들어오더니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말이 들리더군요, ‘…좀 촌스럽긴 해도 분위기만 잘 타면 되지 뭐.’하는 실망스런 낌새가. 친구가 리모콘을 들고 열심히 선곡 버튼을 누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어요. 남자는 화장실을 다녀왔는지 손수건으로 집요하게 손바닥을 닦더라고요.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인데, 어디서였지?… 전주곡이 흐르고 노래가 막 시작될 무렵 남자가 나를 일으켜 세웠어요. 허리를 잡고 몇 바퀴를 돌리더니 가슴을 거칠게…. 그때 내 몸에서 어떤 힘이 화살처럼 튕겨져 나갔었요. 이단옆차기로 정강이를 가볍게 쪼아준다는 게 그만 팔꿈치로 턱을 날려버린 거예요. 눈 깜짝 할 사이에 남자가 ‘억’ 외마디를 지르며 고꾸라졌죠. 깃털처럼 가벼운 한 방이었는데 턱이 덜렁 빠져버렸어요. 그것은 유단자로서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몸의 기억은 거의 정확한 법인데…. 그의 넥타이를 풀어 턱을 묶고 응급실로 떠나보낸 다음 생각해보니, 숱진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 얇은 입술, 아! 아들의 담임이었어요. 숨이 턱 멎는 느낌이었죠. 학년 초 학부모 면담 때 승혁이는 문과가 적성에 맞겠다고 관심을 가져주던 선생님이었는데…. 여자는 소름이 돋는지 팔뚝을 쓸어내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래방 보조도우미로 나섰던 첫날, 아들의 선생님과 맞닥뜨렸고 그것도 턱을 빼놓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놈의 재수랍니까? 최악의 마법도 이보다 더 잔인할 수가. 여자는 옷자락에 자꾸 손바닥을 문지르며 불안증세를 보였다. 봄볕에 기미가 더 짙어질까봐 Y는 트윈케이크로 얼굴을 연신 두드렸다.
빈잔을 건넨 여자가 조용히 일어서더니 신발과 양말을 벗어 다시 배낭에 집어넣고 맨발로 내리막길을 서둘러 내려갔다. 나무는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나목처럼 깡마른 여자의 발목에서부터 뻗어 내려간 푸른 물길이 먼 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끝>
*2007년 5월 대한체육회지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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