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사색의 빈터
김형출

아침에 창문을 열자 부옇게 깔린 안개로 온 천지가 잿빛 밭이다. 잿빛 밭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아파트 군락의 창틈에도 허연 안개로 치장을 했다. 안개가 짙게 내리깔린 아침 풍경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마법에 위대함을 느꼈다. 한두 주 전 만하더라도 울긋불긋 곱게 물든 가을 정취에 취하여 비틀거렸건만 단풍은 그새 허름한 옷을 갈아입고 스산한 겨울바람을 몰아와 낙엽으로 대지를 덮는다. 사람의 마음도 계절이 바뀌면 심란하고 어수선하여 갈팡질팡할 때가 더러 있다. 지금의 이런 기분이 바로 나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면 날씨가 화창하게 좋다는 말이 있는데 생활하다 보면 자욱한 안개 때문에 물체가 부옇게 보이는 것처럼 기억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사람의 머리에 저장된 기억력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을 때도 있다. 관심 밖의 사안에는 날짜 개념이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나 보다. 달력과 시계를 보지 않아도 날짜는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는데 날짜를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달이 바뀌는 마지막 날에는 꼭 시계의 날짜를 올바르게 맞춰 놓아야 한다. 큰달, 작은 달 그대로 두면 하루 아니면 반나절 차이가 난다. 그래도 생활하는데 큰 불편이 없기 망정이지 날짜 때문에 큰 문제나 낭패를 당했더라면 날짜를 확실히 기억하고 외웠을 것이다. 오늘이 일요일은 맞는데, 며칠인지가 생각나지 않아 거실 탁자에 놓여있는 달력을 살펴보았다. 아, 오늘이 11월 28일, 벌써 이렇게 한 달이 지났단 말인가, 11월 한 달도 오늘 지나면 달랑달랑 이틀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새해라고 마음 설렘으로 한해를 맞이한 것이 바로 어저께 같았었는데 이제는 다시 한해를 보내는 송년모임 소식이 들려오니 지나가는 한해가 아쉬워 마음이 허전하다. 가는 세월 잡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내지는 않았는데도 이렇게 마음이 허허벌판처럼 허한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텅 빈 마음 한가운데에 성취하고자 하는 욕심과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에 집착한 나머지 그 병이 생겨나 보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해법이 있겠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궁극적으로 봐서 이 병을 고치는 가장 좋은 치료법은 마음을 버리고 비우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어디 마음대로 그리 쉽게 될 일이랴. 마음을 비우자! 마음을 말이다.

고개를 돌리고 거실에 있는 '틸렌데시아'를 바라다본다. 도도한 표정으로 푸른 머리를 꼿꼿하게 치켜들고 향기로운 얼굴에 홍조를 머금어 그윽한 향기를 뿜어냈을 때는 식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았었는데 지금은 시들어가는 노인네 마냥 듬성듬성 머리가 빠지고 얼굴에 마른버짐이 피어나고 있다. 여러 꽃대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꽃대가 시름시름 병이 들어 보기가 흉해서 베란다 쪽으로 옮겨 놓았구나! 생각했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바람을 쐬고 햇빛을 보게 하면 시름시름 앓고 있던 틸렌데시아가 생기를 되찾을까 봐서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나 보다. 말 못하는 저 식물을 보면서 우리 인간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시작된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지만 한편으로는 인생무상을 느낀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식물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즈음에 이처럼 사색과 종교적인 수필의 전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법정스님이다. 요즈음 들어서 법정스님의 수필집을열심히 읽고 있다. 다른 여타의 명작 수필들도 많이 있지만 나는 유독 법정스님의 글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법정 스님의 수필은 읽어 보면볼수록 감칠맛과 멋이 우러나와 나의 마음을 순식간에 몽땅 빼앗아 간다. 지금 읽고 있는 책 중에 법정스님에 대한 작품론 글귀가 가슴에 와 닿아 일렁댄다.

'법정 문학은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구축한 성(城)이 아니다, 구도자의 아름다움이란 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도의 길에서 우러나온 과정(행동)의 선(善)함에 있다.''행동의 선함은 정신의 참(眞)됨에서 나왔다.' 그의 글은 산사 주변의 미세한 자연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열권이 넘는 그의 저서 속에 담긴 글들이 한결같이 그러하다면, 독자들은 물릴 법도 한데, 읽고 또 읽어도 물리지 않는 이유는 작은 변화를 항상 새롭게 보는 깨어 있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라고<다시 읽은 우리 수필> 집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이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맛 배기로 지적해 놓았다. 뻐꾸기가 어둠에 깔린 깊은 잠을 깨워 놓았다. 뻐꾹! 뻐꾹! 12월의 첫날을 알려주는 새벽의 설렘이다. 가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만이 가지는 행복한 시간이다. 낮과 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한 조화는 신비하기만 하다.

밝음과 어두움의 조화, 강렬함과 온순함의 조화, 너무나 대조적이면서 서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이치는 삶의 전부를 내포하고 있다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닐 성싶다. 움직이는 생물이든 움직이지 않는 무생물이든 그 대상 하나하나에는 위대한 진리와 올바른 지혜가 있다. 단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째깍, 째깍 가냘프게 들려오는 시곗바늘 돌리는 소리는 침묵의 의문을 던지며 돌고 있다. 생각의 사유는 차디찬 바깥공기가 방안으로 밀려들면서 나의 빈 공간을 말없이 채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