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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픽션>유경숙
베를린지하철역의 백수광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따는 것은 시간 죽이기 세월이었다. 중세 암흑기로 돌아가 어둠을 갉아먹는 시간과 다름 없었다. 지도교수는 어둠 속에서 곰팡내를 피워내는 자료를 찾아 발품을 팔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그는 수년 동안 도미니코수도회를 찾아다녔다. 중부독일 튀링겐 지역엔 오래된 수도원들이 여러 곳 있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문헌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봉쇄수도원이든 대학도서관이든 샅샅이 훑고 다녔다. 도미니코수도회는 주로 도심에서 학문과 설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탁발수도회였기에 자료들이 많은 편이었으나 유독 에크하르트의 영성에 관한 자료만 사라졌다. 죽음 후 이단으로 단죄되었기에 강의자료가 몰수되어 불태워졌나보다. 에크하르트는 동방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던 중세 신학자이자 도미니코수도회 수사였다.
한번은 그가 시골수도원을 순례하다 늙은 수사에게 붙들려 단단히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봉쇄수도원을 혼자 지키고 있던 원장수사님은 수도원 문을 이대로 닫을 순 없다고 그를 막무가내 붙잡고 늘어졌다. 원장수사는 그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씌어진 금서가 지하서고에 뭉치로 들어있다고. 아직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중세의 신비주의 교서들이 쌓여있는 석관이 따로 있다며 미끼를 던졌다. 밤마다 열쇠꾸러미를 주머니 속에 차고 달랑거리며 애간장을 태웠다. 봉쇄수도원이기에 비밀리에 장상에게만 열쇠가 전수되어 봉인된 석관을 지킬수 있었노라고. 수도자로 정식 입문을 하면 서고의 열쇠를 넘겨주겠노라고 약을 올렸다. 곰팡내 나는 희귀본 책들을 꺼내서 함께 작업을 하자며 꼬드겼다. 당신 살아있을 때 고어(古語) 번역을 마쳐야 한다며 절실한 눈빛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성무일도를 따라 바치며 수련기 아닌 수련기를 보냈다. 해가 지기 전에 구운 감자 몇 알과 염소젖 한잔으로 저녁식사를 때우고 나면 밤은 너무나 길었다. 한겨울에 불기운도 없는 침실에서 양말을 깁고 있는 노인은 살아있는 유령 같았다. 액자 속의 중세 트라피스트가 튀어나와 노동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켤레의 양말을 끼어 신고 잠자리에 드는 노인은 발냄새가 지독했다. 유목민의 장화 속처럼 고린내가 진동했다. 돋보기를 끼지 않고도 구멍 난 양말을 섬세하게 기워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장작을 패고 손빨래를 하며 청빈을 고수하였다. 그는 낙엽 지는 십일월에 들어와 혹독한 겨울을 수련기로 보내고 삼월에 수도원을 나왔다. 체중이 형편없이 줄어 있었다. 새벽 성무일도를 바치다 빈혈로 몇 번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원장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중세철학에 갇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나오니 세상은 완전히 딴 판에 돌입하였다. 몇 세기를 뛰어 넘은 듯이. 도서관에 갇혀있던 지식과 수도원 서고에서 잠자고 있던 자료들이 실시간 광속을 타고 국경 없이 날아다녔다. 그 많은 복사자료와 노트가 한낱 종이에 불과한 세상이었다. 칠백년 동안 잠들어 있던 에크하르트의 영성을 깨워 날개를 달아놓고 그는 백수광부가 되었다. 병술년 겨울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베를린지하철역을 찾아드는 그의 등엔 허름한 침낭 하나가 지워져 있었다.
가톨릭문인 동인집 <詩와 부활>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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