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에 낮달이 뜬 날은 밤에 별빛이 더 맑고 밝게 빛납니다. 그 별빛으로 몸을 헹구며 잠이 들고 바람소리에 몸을 헹구며 눈을 뜹니다. 바람소리가 불러오는 풍경소리에 아침은 환하게 출렁거립니다. 그 은은한 소리를 들으며 연분홍 상사화 한 송이 고요하게 피어납니다. 고요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날은 마음도 가뿐하고 청안합니다.
백무산 시인은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제와 오늘 사이, 노동과 노동 사이, 밤과 낮 사이에 고요한 시간이 없으면 어제는 오늘의 반복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깊은 잠을 자야 하는 이유는
몸을 떠난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잠은 하루치 노동을 지우고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해가 뜨면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즙 빠져 쭈그렁바가지가 된 시간이
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기에,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백무산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중에서
우리가 깊은 잠을 자는 이유도 우리 몸을 떠났던 고요한 시간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루치의 노동을 하며 지내는 시간은 분주합니다. 그 노동 속에서 몸을 빠르게 놀리고, 정신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남과의 관계를 풀어가고, 일한 것을 정리하고 셈을 하는 동안, 우리는 고요와 함께 있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땀을 흘리며 일하는 만큼 고요와 만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고요한 시간과 공간 없이 지치도록 일하고 있으면 고요가 찾아와 우리를 쉬게 합니다. 우리가 잠들지 않으려 해도 고요는 그냥 두지 않습니다. 졸면서라도 쉬게 하고 쪽잠이라도 들게 합니다. 그래서 잠이란 하루치의 노동을 지우고 고요가 우리의 육신과 정신을 쉬게 하기 위해 마련한 시간입니다. 누구도 이 시간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 반복되는 고요의 배려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눈치 채야 합니다. 졌던 해가 다시 뜨면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낡은 반복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고요와 만나야 합니다. "해가 뜨면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 육즙 빠져 쭈그렁바가지가 된 시간이 / 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쭈그렁바가지가 되는 시간의 노예로 살면 우리 의 삶 역시 쭈그렁바가지가 됩니다. 우리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고요에 무르익어야 합니다. 고요를 우리가 먼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고요 속에 몸을 담그고 정신을 헹구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의 노동 중에도 몇 십 분씩 또는 몇 번씩 고요를 불러와 고요가 지니고 있는 청안한 시간과 공간속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쭈그러져 있던 내 하루가 서서히 몸을 펴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갑니다. 상사화 한 송이도 고요할 때 핍니다. 고요와 자주 만나시길 바랍니다.
<2009. 8. 6>
|
문학 in 미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