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이제는 한물간 듯 여겨지는 문구가 하나 있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녀석들이 온다.’ 이와 같은 광고 문구를 언제 처음 봤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제는 식상하다 못해 이런 문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나 책이 있다면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을 지경이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론은 이렇다. 무엇을 보든 상상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 이건 현실에 대한 하나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말이다. 예술이 상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 그런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어느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미래를 이렇게 그렸다. 주인공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기를 기대하며 수백년을 냉동되었다가 깨어났다. 주인공이 만난 세상은 지금 여기, 자신이 벗어나고 싶어 했던 바로 이 세계였다. 수백년 동안 세상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주인공이 절망한 것도 당연하리라. 물론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미래의 디스토피아와 동일시한 게 그 소설가가 처음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제 우리가 이런 관념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수백, 수천년이 흘러도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으리라는 이 관념들이 풍기는 절망의 냄새마저 각성이 되어주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마조히스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곧잘, 우리를 짓밟고 무시하는 자를 통치자로 뽑지 않던가. 그로 인해 고통을 겪으면서도 되풀이하지 않던가.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비극적인 이유는, 이 시대가 비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노동자와 그 식구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도, 용산참사의 재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들은 끝내 이 세계가 디스토피아임을 증명할 것이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상상해도 그들은 디스토피아를 안겨줄 것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자들은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진부하게도. 끔찍하게도.

<2009. 7. 21 손홍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