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민족작가대회 방북기] (중) 백두산… 그곳에선 모두 ‘우리’였다

[국민일보 2005-07-27 18:49]

22일 오전 7시30분. 대표단을 태운 고려항공은 백두산 아래 삼지연공항을 향해 날았다. 옆 좌석에 앉은 소설가 현기영씨가 한마디를 건넸다. “내 어렸을 때는 소풍갈 때 갖고 다니던 물통을 빨통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다 수통이라고 하더군. 그 시절의 걸상은 의자로 명칭이 바뀌었어. 빨통이 수통으로,걸상이 의자로 변한 세월이라니.” 도종환 시인이 거들었다. “북측에서는 안전띠를 걸상대라고 해요. 노크는 손기척,아이스크림은 얼음보숭이….” 우리말은 너무 빨리 혼탁해지고 너무 빨리 닳아지고 있다. 물질의 언어가 자연의 언어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내성 있는 민족어의 회복! 그것이 이 여정의 본질일 터였다. 삼지연 근처 베개봉호텔에 여장을 풀고 1층에 있는 상점에 들어갔다.

초록색 표지의 얄팍한 ‘백두산 식물표본’이 눈에 들어왔다. 만병초,땅들쭉,하늘매발톱,두메양귀비,두메자운,물싸리,물매화…. 그들은 식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것들. 찾아가지 않으면 그들이 소곤소곤 걸어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가가 있는 삼지연 밀영 입구에도 꽃밭이 있었다. 고은 시인이 멈춰 서서 이름을 적었다. 곰치꽃,우정금꽃,부루(상추),참취,수수나물,무수리…. 저녁상에서도 그들을 다시 만났다. 청취,감자막가리지짐,참나물,그리고 도물내기(도루묵)…. 23일 새벽 3시. 간밤에 무진 술을 마셨지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어둠 깔린 앞마당에 모였다. 백두산 천지까지는 50㎞. 미니 버스 9대가 시동을 걸었다. 보름달이 길을 밝혔다.

기온은 뚝 떨어져 몹시 추웠다. 모두들 긴팔 윗도리를 챙겨 입고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경사는 심하지 않았다. 해발 2000m가 넘는 고지대를 달리는데도 마치 들판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흰 구름이 시선 밑에 깔리고 있었다. 차는 백두산 정상 부근의 개활지에 멈춰 섰다. 천지가 코발트색 하늘을 닮아 있었다. 일년에 며칠 되지 않는다는 청정한 날씨라고 했다. 서쪽 하늘에 보름달이 걸려 있는 채로 동쪽의 운해 밑에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생명을 낳기 위해 하혈하는 하늘. 하늘은 한 순간에 해를 쑥 뽑아 구름 위에 얹어놓았다. 일월이 함께 걸린 백두의 새벽. 행사명은 ‘통일문학의 새벽’이었지만 ‘통일’과 ‘문학’을 떼어내고 새벽이 홀로 세상 위로 내리고 있었다.

“해 뜬다/이 삼천리 강산 모든 풀잎들 꽃잎 이슬들/아침 햇발 한 살 한 살에 눈 뜬다/물싸리꽃 곰치꽃/우정금꽃/기뻐라/일백년 전 하나였던 것/일백오십년 전 하나였던 것/아니 삼백년 전/어느 먹밤 터무니에도/오로지 하나였던 것/일백년 후/어찌 하나 아니겠냐는 것” 고은 시인이 지난 밤에 지은 ‘다시 백두산에서‘를 낭송했다. 일월성신이 함께 하고 있었다. 시인이 산정에 올라 식물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억만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인간의 모든 무의식도 함께 깨어난 듯했다. 우리에게서 아득히 멀어져 있던 꽃과 나무,흙 한 줌,풀 포기가 두런두런 말을 걸었다. 너의 세상은 몇 개인가. 너의 언어는 몇 개인가. 둘 일 수 없다. 하나다. 하나임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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