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전상국 교수 평양 민족작가대회 참가기

[강원일보 2005-07-28 00:03]

　2005년 7월20일 오전, 북측에서 보내온 고려항공 P561기가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지 정확히 50분 뒤 우리는 평양비행장에 발을 디뎠다. 기내에서 룡성맥주 한 캔으로 설레는 마음을 다스리는 그 정도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빨리! 허허. 그냥 웃음이 나왔다. 외국 비행기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는 아주 빈약한 평양 공항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평양에서, 그리고 삼지연과 백두산 천지까지, 다시 묘향산 국제친선기념관과 보현사를 둘러보는 가운데 치러진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기간 동안은 그 어느 장소에서도 평양공항에 도착할 때 가졌던 감동은 쉬 살아나지 않았다.

　분단 60년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다는 것의 확인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이데올로기가 쌓은 높은 벽 앞에서의 그 허탈감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말을 쓰면서도 그 말의 의미와 생각의 각도가 그처럼 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가슴이 답답했다. 남과 북이 서로 입으로는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하며 그것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었지만 왜 그런 다짐들이 내 귀에는 공허하게 들리는 것인지. 이번 방북을 통해 내 굳어진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대가 쉬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정해진 관광 코스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안내원들의 그 미소와 함께 계속 들어야 하는 동어반복의 언어들은 인내를 시험하는 체험 관광과 다르지 않았다. 남쪽 사람들이 그 동안 추악한 경제동물로 바뀌는 동안 북쪽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가. 놀라워라. 북쪽 사람들의 심장에는 김일성 수령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도심 건물 곳곳에 내걸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대형 구호의 확인이 바로 북쪽을 돌아보며 학습된 것의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평양의 보통강과 대동강은 잘 기획된 평양 시가지의 도시 미관과 조화를 이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새벽 두시에 삼지연을 출발할 때 함께 따라온 보름달과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보며 맞이하던 새벽 5시의 그 장엄한 일출은 중국 쪽에서 올라가 바라보던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천하절승 묘향산의 비로봉 등 웅장한 산봉우리들을 거느린 고찰 보현사의 바람종(풍경) 소리와 법당의 부처님 미소 또한 남쪽의 그것들과 같으면서도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백두산 천지 주변 능선에는 워낙 고지대라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에 필 산야초들이 모두 한꺼번에 핀다. 노란만병초나 구절초 등 백두산 산야초 군락을 달리는 버스 속에서 바라본 일만 해도 북쪽 자연과의 만남은 충만했다.

　거기 북쪽에 사는 사람들의 겉모습 또한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단색 계통의 소박한 옷차림인 평양 시민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발걸음은 고층 아파트의 위용과는 어쩐지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남북작가대회 연회장에 나온 이름 있는 북쪽의 작가들은 달랐다. 40년생, 나와 동갑인, 김일성상 계관인 작가 김진성은 매사가 당당하고 실속 있어 보였다. 나는 그 동갑나기 작가와 술잔을 여러 번 부딪친 뒤 `쭉 냅시다’라는 건배를 하며 우리가 죽기 전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김진성 작가처럼 4·15문학창작단에서 일하는 역시 김일성상 계관인 작가 정기종을 통해서도 나는 그쪽 북쪽 문단의 등단 절차며 작가들의 창작 분위기를 귀동냥할 수 있었다.

　나는 틈틈이 북쪽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 조심스레 평소의 궁금증을 풀어나갔다. 90년대 그네들 나라꽃으로 지정된 산목련에 대해서도, 그네들의 왼쪽 가슴에 심장처럼 달려 있는 김일성 휘장이 왜 여러 가지일까 하는 궁금증도 풀 수 있었다. 평양 시민들의 교통수단인 전철이나 무궤도 버스며 전차 요금이 2원이라는 것도 그네들 입을 통해 확인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오가는 150킬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인 평양-신의주고속도로 위에서 거의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볼 수 없었던, 그 텅빈 도로에 대해 차마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북쪽의 산은 모두 그 정상까지 농지로 개간돼 있었다. 평양 주변의 그 너른 평야에는 주로 벼와 옥수수 콩 농사를 하고 있었는데 남쪽의 60년대 농촌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왜 농촌이 이 지경인가, 이미 답이 나와 있을 수 있는 그 궁금증 역시 입으로 쉽게 발설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쪽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준 갖가지 공연이나 그 규모가 엄청난 여러 개의 조형 구조물, 이를테면 소년궁전이나 주체탑 전승탑 또는 묘향산의 국제친선기념관 관람에 별로 감동하지 못했다. 평소 사회주의 체제의 그 일사분란한 통제나 대규모 마스게임 등에 대해서 전율을 느끼던 오랜 인식의 벽이 그 현장에 가서까지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북측은 이번 행사 기간 동안 남쪽 작가들과 언론에 처음으로 최근 조성한 납북 및 월북 인사 묘역을 보여주었다. 6.25를 전후해 월북한 거물급 인사들 중에는 국어학자 정인보 선생도 끼어 있었다.

　그것보다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그 묘역에 친일 변절 작가로 낙인이 찍힌 춘원 이광수의 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재북인사 묘에 특별히 초청돼 온 북쪽 노인이 하나 있었다. 고향이 강원도 정선 동면 화암인 최태규(85세, 재북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상무위원) 옹은 북에 와서 60년만에 처음으로 남쪽 사람들과 만나는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중앙조선일보 정경부 기자로 일하다가 고향에 내려가 28세 나이로 제헌국회의원이 됐다는 최옹은 묘역에 있는 월북 인사들 하나하나를 기억해 그들의 공과를 열거하는 뛰어난 기억력을 보였다, 특히 그는 춘원 이광수가 그 묘역에 있게 된 사연을 얘기하는 과정에 춘원이 월북하던 50년 가을에 폐결핵으로 병원에서 죽었다는 증언까지 했다. 묘역에 이광수를 안치하는 일에 자신이 적극 반대했지만 수령의 ‘큰 용서’로 춘원의 묘가 여기 있게 됐다는 사연까지 그는 덧붙여 얘기했다.

　땡볕 아래서도 월북 인사들 얘기를 멈추지 않던 최옹은 내가 고향이 강원도라는 것을 알고는 금세 이때까지의 격앙된 목소리와는 다른 감정이 실리면서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었다. 화암약수와 절경인 동면의 소금강 계곡과 몰운대까지 들먹이며 고향 그리움을 드러낸 최옹은 잡아쥔 내 손을 놓치 않은 채 고향 사람들한테 자기 소식을 전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남쪽에서 간 우리 일행 중에는 월북한 최옹의 경우와는 달리 딸을 두고 월남한 87세의 노시인이 한 분 있었다. 그 노시인은 물론 우리 모두의 바람은 평양에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된 그 딸과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부녀상봉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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