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6.15 남북작가 대회' 문학으로 여는 통일
신현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장 `6일간의 기록'

▲20일=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안개 때문에 평양에서 비행기가 못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역시 평양 길은 쉽지 않았다. 한참을 더 기다린 끝에야 고려항공 전세기에 올랐다. 2001년 8·15 통일축전 때 방북한 경험이 있어 무조건적 감흥은 줄었으나 감개무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행기 안에서 노동신문을 봤다. 사진이 많이 늘었다. 4년 만에 다시 먹어보는 룡성맥주를 한잔 하고나니 벌써 평양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1945년 ‘전국문학인대회’결렬과 89년 ‘남북작가대회’무산을 딛고 60년 만에 온 것이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평양시내를 향해 달렸다. 거리의 구호도 많이 줄어들었다. 특히 미국과 관련된 구호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뭔가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는 듯했다. 해외에서 참석한 작가들의 대표성 문제에 대한 이견 때문에 약간의 차질이 빚어졌다. 아무리 세밀하게 예비회담을 진행해도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되기 마련이었다. 60년 만에 만난 것 아닌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예정시간 보다 3시간 정도 늦게 인민문화궁전에 도착해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본대회를 진행했다. 긴 시간의 토론을 거쳐 6·15민족문학인협회 구성, 6·15통일문학상 제정, 기관지 ‘통일문학’ 운영 등에 합의했다. 바야흐로 ‘분단시대의 문학’에서 ‘6·15시대의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들이었다.

작년 인천에서 열린 ‘우리민족대회’에 참가했던 북의 신흥국 시인을 개막연회에서 다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인천에서 만났던 사람을 평양에서 또 만난 건 신시인 뿐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9월 아시아 육상경기대회 협의차 미리 방북해 있던 인천연대의 박길상 사무처장과 인천일보의 백종환기자가 연회장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것이었다. 북에서는 좀처럼 있기 어려운 일이라는데 북 당국에서 인천을 특별대우 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려호텔 2212호에서 내려다본 평양은 깜깜한 어둠속에 벌써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이 안와 1층 로비에 있는 생맥주 집으로 내려갔다, 4년 만에 다시 온 북녘에서의 첫 밤을 평양흑맥주가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21일=김주석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 김구 등이 참가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던 대동강가의 쑥섬, 주체사상탑 등을 관람했다.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고 오후에는 개선문을 관람한 후 재북인사묘와 평양산원과 지하철 등을 나누어 관람했다. 남쪽에서 납·월북인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북쪽에서는 재북인사라고 부른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나는 지하철을 관람했는데 부흥역에서 영광역까지 시승을 했다. 북쪽의 지하철은 듣던 대로 정말 깊었다. 매우 빠른 에스컬레이터로도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지하철의 깊이만 놓고 따져본다면 남과 북 어느 쪽이 정말 전쟁의 공포에 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철 시승을 마치고 학생소년궁전으로 갔다. 버스 안에서 도종환 시인이 뜬금없이 통일문학상은 아마 신현수 시인이 유력할거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자기가 강력히 추천하겠다고 했다. 정말 그런 날이 올까? 난생 처음 상을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에서 다이빙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도 인상적이었지만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야금을 뛰어난 솜씨로 연주하던 네쌍둥이 여자아이들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벌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남에서 네 쌍둥이에게 모두 음악을 가르친다는 것은 100%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윤이상 음악당 옆 민족식당에서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북에서는 오징어를 낙지로 부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22일=삼지연 공항은 4년 전과 같이 역시 시골 차부처럼 고즈넉하다. 깨끗한 공기를 더 많이 맛보기 위해 숨을 빨리 빨리 쉬었다. 버스에 올라 백두밀영으로 향했다. 백두산의 날씨는 문자 그대로 변화무쌍했다. 버스 안에서 천둥을 동반한 소나기를 만났는데 도착해서도 좀처럼 그칠 생각을 않더니 한참 지나자 백두산 봉우리 위로 거짓말처럼 해가 나왔다.

백두밀영을 참관하고 숙소인 베개봉호텔로 갔다. 손이 저려 도저히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물이 차가웠다. 짐을 풀고 산책을 나갔다. 백두산의 길은 붉은 색이었다. 조금 가니까 북쪽 분들이 감자를 굽고 있었다. 구워놓은 백두산 감자를 얻어먹었다. 난 지금 꿈꾸고 있는가? 다음날 새벽천지에서의 해돋이를 기약하며 백두산의 품속에서 일찍 잠들었다.

▲23일=새벽 2시쯤 기상했다. 보름에 가까운 달만 휘영청 밝을 뿐 사위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버스의 헤드라이트가 간신히 길을 더듬어 갔다. 백두산 천지에 가까워질수록 사위는 희부연 색깔을 띠었다. 드디어 장군봉 밑의 개활지에 도착했다. 약간을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천지였다. 서있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불고 추웠지만 다행히 날은 흐리지 않았다. 두 번 와서 두 번 다 천지를 봤으니 억세게 운이 좋은 것이었다. 왼쪽엔 달이 떠 있고 오른 쪽에서는 해가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에는 해와 달이 있고 남과 북이 있었다. 그곳에 전쟁과 분단은 없었다. 해돋이에 맞춰 ‘백두산의 새벽’ 행사가 시작되었다.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과 장혜명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이 본대회에서 채택한 공동선언문을 낭독했다. 두 사람은 이번 대회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이어 고은 시인이 ‘다시 백두산에서’를 낭독했다. 홍석중 작가는 ‘사람이 마음을 모으면 하늘을 이긴다. 우리는 6·15 공동선언으로 모아졌다’며 원고 없이 연설했고, 그밖에도 송기숙, 안도현, 현기영 등이 나와 각자의 시를 읽거나 소감을 밝혔다. 소설 ‘빨치산의 딸’의 정지아는 북쪽에서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작가인데, 고 김남주 시인의 시 ‘조국은 하나다’를 낭독했고, 북의 오영재 시인은 ‘잡은 손 더 굳게 잡읍시다’를 낭송했다. 마지막으로 작가들은 ‘백두산 만세’ ‘민족문학 만세’ ‘조국통일 만세’를 외치며 백두산을 내려왔다.
베개봉호텔에서 도시락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묘향산으로 갔다. 가장 긴 하루였고, 가장 긴 거리를 움직인 하루였다. 4년 전 묘향산 호텔에 왔을 때 샀던 석이버섯을 또 잔뜩 샀다. 석이버섯과 함께 이번에는 묘향산의 품에서 잠들었다.

▲24일=아침에 일어나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정말로 산이름 그대로 묘한 향기가 나는 듯했다. 길가에는 달맞이꽃, 금계국 등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대체 남과 북이 뭐가 다른가. 국제친선전람관과 보현사를 관람했다. 보현사에서 함께 간 인천문화재단 최원식 대표이사와 사진을 함께 찍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4년 전에 왔을 때 만났던 해설 강사를 또 만났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으면 시집이나 선물을 준비해 올 걸 하는 생각에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직 시집은 안 갔다고 했다.

평양으로 오는 길에 청천강에서 쉬었다. 살수대첩, 청천강, 역사책에서나 보던 강 앞에 막상 서있으려니 도대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인민문화궁전에서 폐막연회를 마치고 고려호텔로 돌아왔다. 천천히 돌아가는 44층 스카이라운지에서 같은 조였던 전상국, 공지영, 이경자, 김용만 선생들과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25일=마지막 날 금강판매소에 가서 간단한 쇼핑을 하고 고려호텔 옆 우표판매소를 관람한 후 단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공항에서 인천에 왔던 박철 시인, 방북기간 내내 우리를 안내해줬던 황원철 작가, 민화협의 김학송 등과 이별했다. 2001년에 방문했을 때 의형제를 맺었던 박히철에게 시집을 전해달라고 김학송에게 부탁했다. 황원철의 눈이 벌게지는 걸 보고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25일 오후 4시9분 JS 615편이 평양공항을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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