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휴일에 벌초를 하러가는 길에 아버님이 논길을 지나다 "허, 벌써 벼가 누렇게 익네, 올해는 한 번도 들에 나와 보지 못했는데." 하고 말씀 하십니다. 벼가 익을 때까지 한 번도 들에 나와 보지 않아도 되는 삶에 길들여지는 걸 걱정스러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벼만 노랗게 익어가는 게 아니라 감빛도 주황색으로 변해가고 있고 대추도 벌써 빨갛게 익은 게 있습니다. 곡식과 과일과 나뭇잎의 색깔만 변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우주의 빛깔이 천천히 변해가고 있는 것이지요.

여름이 가을로 천천히 넘어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일 속에 묻혀 지냅니다. 어제 하던 일과 남아 있는 일의 반복 속에서 하루가 금세 지나가곤 합니다. '어느새 단풍이 들었네' 하다가 그것도 잠시, '벌써 첫눈이 내렸어' 그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변해가는 시간 속에서 자연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신호를 보냅니다. 천천히 빛깔을 바꾸는 석양으로 메시지를 보낼 때도 있고, 반쯤 붉은 물이 든 나뭇잎 한 장을 발등에 떨어트리며 우리의 닫힌 문을 노크할 때도 있습니다. 쫓기며 사는 우리들은 그런 신호를 흘려보내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신호를 놓치지 않는 이들은 우리 곁을 흘러가는 또 하나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20여 년간 알래스카의 자연을 사진에 담아온 일본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는 알래스카의 고래를 촬영하기 위해 동행한 출판사 편집자의 경험을 전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 저녁, 우연히 흑고래 떼와 마주쳤다.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바닷물을 내뿜는 고래를 천천히 따라갔다. 고래의 숨소리가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주위는 빙하와 원시림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고래 한 마리가 눈앞의 해면에서 높이 뛰어올랐다. 거대한 몸뚱이가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공중에서 춤을 추더니 순간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낙하하면서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켰다. 분리칭이라 불리는 이 같은 행동을 지금까지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친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거대한 고래의 갑작스런 움직임 때문이 아니라 이 거대한 고래를 포용하는 대 자연의 크기에 감동하고 놀란 것이다. 고래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자연과 비교하자면 고작 한 마리 생물에 불과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자연에겐 그저 하나의 생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외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고래가 살아가는 시간을 깨달은 것이다."

호시노 미치오는 고래를 통해 우리가 자연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자연이라는 겁니다. 자연은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자연의 힘을 깨닫는 순간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그걸 깨달을 때까지 자연이 우리에게 크고 작은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호시노 미치오는 또 하나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또 하나의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 또 하나의 시간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마치 하늘과 땅이 서로의 차이를 좁힐 수 없는 것처럼."

이 가을 우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시간을 보고 느끼면서 하루를 살고 있을까요?

<2009.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