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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다 보면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끼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애완동물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이도 있고, 심지어 숟가락, 신발, 돌멩이와 대화한다는 이도 있다. 가끔은 나도 그런 경우가 있다. 내 고향에서는 ‘거시기’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이 무정형의 낱말은 가히 만능이라고 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 오른 첫 단어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모조리 대체할 수 있는 낱말이 이것 말고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니까. 거시키, 거서기, 뭐시기 등을 거시기와 한 뿌리를 둔 변형태라 가정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무 때고 이 말을 정확하게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면 나 역시 종종 이 낱말을 듣게 되었을 때 그것이 지금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한참을 듣고 있노라면, 그러니까 그 거시기가 아니여, 라는 지청구를 몇 번 받고 나면, 마치 안개가 걷히며 사위가 분명해지듯 이 낱말의 의미가 손에 잡힐 듯 뚜렷해진다. 이걸 가능케 해주는 건 습관의 힘이 아니라 상상의 힘이다.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상상해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투시안경이 없어도 상대방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코울리지는 이를 두고 ‘자발적인 불신감 유보’라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상상하려고 마음먹었다는 건, 곧 그이에 대한 불신을 자발적으로 유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해하려고 마음 먹는 순간 불신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게 된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 결과는 대단하다. 자연에 속한 모든 것들, 심지어 우주와도 대화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설령 마음을 투시할 수 있는 안경이 등장한다 해도 별 쓸모가 없을 게다. 상상하는 능력은 포기할 수 없는 특권이니까.
<2009. 6. 16 손홍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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