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산수유꽃이 노랗게 피었습니다. 어떤 날은 반짝추위가 몰아치고, 어떤 날은 황사가 하늘을 가득 덮고, 어떤 날은 아침부터 안개가 몰려와도 산수유꽃은 꽃 피우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산수유꽃은 봄의 신호탄입니다. 산수유꽃이 우리 옆에 피어 있다는 것은 아래쪽으로부터 꽃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일이 있어 남쪽에 갔었습니다. 남쪽에는 이미 개나리꽃이 노랗게 줄지어 피어 담장을 가득 덮고 있었습니다. 과수원에는 매화꽃 복숭아꽃이 피어 산비탈이 환하고, 진달래는 낮은 산까지 내려와 곱게 피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목련이 피어 도심의 색깔이 밝게 변하고 있고, 강가의 버드나무 잎은 여린 잎을 내민 채 한들거리고 있었습니다.

경상도를 점령한 꽃들이 전라북도를 거쳐 곧 충청도로 북상할 것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나라는 남북으로 찢기고,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끼리 원수가 되어가도 꽃들은 세상을 하나로 뒤덮을 것입니다. 봄날 아침 꽃들이 곧 들이닥칠 걸 생각하며 가슴이 미세하게 떨립니다. 나는 이 봄을 꽃들이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김종해 시인은 아버지가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침을 주셨으므로 내 가진 그릇들에 아침이 가득 찬다. 아버지가 주신 시각들이 내 손목시계에 날마다 감겼다 풀린다. 하늘을 주시고 세상을 주시고 친구를 주시고 길 걷는 법을 일러주셨으므로 내 가진 세간살이의 하루가 부족함이 없다. 슬픔을 얻지 못하면 어찌 기쁨을 깨칠 수 있으며, 불행을 거치지 않으면 어찌 행복을 은혜로 여길 수 있는가를 아버지가 주신 집에서 깨친다. 창문을 열어보지 않아도 나는 안다. 개나리 같은 것들, 진달래 같은 것들, 라일락, 산당화, 찔레꽃 같은 것들이 무더기로 내 뜨락에 와서 떠들썩한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봄을 또 보내 주신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아버지, 가르쳐 주소서, 외로움은 어디로부터 오며, 우리의 마지막 절벽은 어디에 있는지를!

---김종해 「아버지를 그리며 」

“개나리 같은 것들, 진달래 같은 것들, 라일락, 산당화, 찔레꽃 같은 것들이 무더기로 내 뜨락에 와서 떠들썩한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봄을 또 보내 주신 것을” 알겠다고 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을 주시고 세상을 주시고 친구를 주신 분이 아버지라면 꽃을 주신 분도 아버지이시고 봄을 또 보내주신 분도 아버지이시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외로움도, 벼랑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걸음걸이도 아버지가 주신 것인지 묻게 되는 것이지요? 그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그냥 버려두시진 않을 겁니다. 우리가 어리석어 함께 절벽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지 자식을 죽음의 길로 가게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슬픔을 통해서 기쁨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불행을 거치고 난 뒤 행복이 왜 은혜인가를 알게 하시려는 뜻일 겁니다. 이 슬픔, 이 불행을 얼마나 더 겪어야 하는지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이 아름다운 봄날 슬픔과 불행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믿으며 작은 왕관처럼 반짝이는 산수유 꽃봉오리를 바라봅니다.

<200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