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뭐 달라진 거 없나 찾아 봐.” 그럽니다. 집안을 둘러보니 창 밑으로 처음 보는 꽃들이 가득합니다.
“이 많은 걸 다 샀어?” 하고 물었더니 버려진 채 베란다 귀퉁이에 쌓아두었던 화분들을 꽃집에 가지고 가 꽃만 사다 담아왔다고 합니다. 꽃 한 포기에 이삼천 원 정도 주었다고 하니 양난 하나 선물하는 값에 화분 스무 개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마삭줄이나 선인장을 키우던 작은 화분, 석란을 선물 받았던 도자기 화분, 여러 종류의 허브를 키우다 버려진 채 뒹굴고 있던 네모난 화분들이 모두 새 주인을 만나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장미향인지 난향인지 달콤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싸고돌면서 천천히 얼굴 쪽으로 올라오는 게 느껴집니다.
“꽃마다 물주는 시기가 다를 텐데 일일이 구분해서 줄 수 있을까?” 그랬더니 그렇잖아도 그게 걱정되어 꽃마다 이름표를 만들고 그 밑에다 물주는 시기를 일일이 적어 놓았다고 보라고 합니다.

화분마다 운간초, 은사철, 황금마삭 2-3일에 한 번, 장미허브, 천냥금, 트리안 3-4일에 한 번, 아이비, 벤쿠버, 신고니움, 무스카리, 천사의 눈물 4-5일에 한 번, 김기아난 10-15일에 한 번, 꽃기린 보름에 한 번 이렇게 써놓은 게 보입니다.

모두 다 작은 꽃들이지만 작아서 더욱 싱그러운 꽃들입니다. 이렇게 작은 꽃들도 겨울을 이기고 초록빛을 지켜냈으며 손톱만한 꽃들을 피우고 있는 게 대견해 보입니다. 차윤정 박사는 이른 봄에 피는 들꽃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람도 조심스런 이른 봄에 서둘러 피었다 서둘러 사라지는 작은 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들은 여리고 약한 생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봄의 야생화들은 빛이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강자들이다.”

우리 집 베란다로 옮겨온 꽃들은 꽃집 비닐하우스에서 겨울을 난 꽃들일 테지만 나는 이들도 강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서운 바람 몰아치고 낮이 짧고 빛이 부족한 겨울은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꽃들도 다 제 운명이 있어서 관심과 사랑으로 키우는 주인을 만나면 아름답게 자라고, 바빠서 쳐다볼 시간이 없는 주인을 만나면 곧 시들고 맙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꽃 하나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삶의 여유를 되찾지 못하면 내 곁에 작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삽니다.

버려진 화분에 꽂혀 있는 ‘천사의 눈물’이란 꽃 이름표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꽃 중에 이파리가 가장 작은 꽃입니다. 모래알 크기만한 이 초록 이파리들에게 누가 이런 아름답고 슬픈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요?
붉은 바탕에 검은 잎테두리와 검은 점 무늬가 줄지어 있는 꽃 이름은 ‘핑크스타’입니다. 그렇습니다. 꽃들은 저마다 스타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저마다 반짝이는 지상의 별입니다. 버려진 화분에 심어놓은 작은 꽃들 위로 햇살이 가득 내려와 앉아 있는 이 봄의 한나절이 환하고 행복합니다.

<200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