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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픽션> 유경숙
증미산 사람들-1
굴참나무 사이로 여린 햇살이 빠꼼히 비춰들었다. 투명한 채광판 위로 등나무줄기가 올라앉아 녹색지붕을 이룬 정자는 마루도 없는 간이식건축물이다. 지붕을 받친 여섯 개의 기둥과 긴 나무의자 네 개가 전부인 너댓 평 남짓한 공간이다. 증미산 중턱에 자리한 이 정자에 언젠가부터 편액 한점이 걸려있었다. 누군가 어디서 주워다가 걸었는지 널빤지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고 페인팅도 벗겨져 조잡했지만 글씨만은 필압(筆壓)이 느껴질 정도였다. 고동색 바탕에 흰색 음각으로 새겨진 행서체 글씨들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활기찼다.
정오가 지나면서 바람끝이 더욱 쌀쌀해졌다. 나뭇잎 떨어지는 속도가 가속화되어 노란잎들이 꽃비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등받이도 없는 정자 의자에 팔순노인 둘이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노인은 지팡이를 짚었고 남자노인은 아직 허리가 꼿꼿했다.
“여보게, 임자! 저기 현판에 씌어있는 글씨가 무슨 뜻인지 아시겠나?”
“내가 그걸 알면 여태꺼정 당신 밥순이 노릇만 하면서 살았것수! 모링께 여즉꺼정 당신한티 붙어살았제.”
“‘오비어약’이라고 하네. 글자 뜻을 풀어보면, 하늘엔 까마귀가 날고 땅엔 물고기가 뛰논다는 뜻일세.”
“흥, 그 까짓것 암껏도 아니구먼! 그럼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까마귀가 뛰노는 세상도 있당가? 당연한 이치를 가지고서, 시방 말장난 하자는 것이여 뭣이여…. 아! 그런 영양가 없는 소리 그만 집어치우고 어여 내려가 즘심이나 먹읍시다.”
지팡이를 짚은 여자노인이 앞장을 섰고 허리가 꼿꼿한 늙은이가 뒤를 따르며 그들은 정자를 내려갔다.
늦가을 해는 토끼꼬리처럼 짧았다. 벌써 서쪽으로 기운 해가 고층아파트 그림자를 길게 끌며 빌딩사이로 숨바꼭질을 했다.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장년부부가 한껏 운동을 했는지 등이 젖은 운동복을 입고 산을 내려왔다. 보나마나 이 작은 산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뺑뺑 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자 옆에 설치된 운동기구를 이용해 몸을 풀고 있었다. 남자는 백칠십 센티가 좀 밑도는 보통 키에 군살 한점 없는 몸매였다. 하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조금 짧은 체형이었다. 다부진 어깨에서 오랫동안 길러진 힘이 저절로 느껴졌다. 철봉대에 오른 남자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몸을 자유자재로 띄웠다가 떨어지고 다시 솟구쳤다. 큰소리로 구령까지 붙여가며 몸을 하늘로 곧추세웠다가 제비처럼 사뿐히 내려왔다. 헤라클레스의 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근육질로 다져진 완벽한 신체였다. 얼굴이 희고 곱살하게 생긴 여자는 중부전선(허리)이 튼튼했다. 철제기구 원반에 올라가 느릿느릿 허리 돌리기를 하다가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정자의 편액을 바라보았다.
“저 글씨체는 춤을 추어서 그런지 도무지 무슨 잔지 모르겠네요.”
“아, 그것도 몰라. 당신, 대학 나왔다는 거 맞아? ‘앵비어약’이잖아. 꾀꼬리 앵자(鶯)에 날비(飛) 고기 어자(魚)에 뛸 약자(躍)구먼. 그것도 몰라!”
목소리가 굵은 남자는 막힘이 없었다.
“그래! 당신, 참 잘 나셨수다. 누가 체육선생 아니랄까봐, 혼자 구령까지 붙여가며 운동하는 사람. 내가 첫 글자 한자를 몰랐을 뿐인데…. 꾀꼬리 앵자를 못 읽었다고 대학을 나왔느니 말았느니 하며 사람 기를 죽이는…. 이제 그 말버릇 좀 고칠 때도 되지 않았던가?”
조곤조곤하게 말을 되받아치던 여자가 갑자기 철제기구에서 내려오더니 쌩하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산길을 내려갔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남자가 순간 퍽하고 떨어졌다.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기절한 듯 잠깐 동안 꼼짝달싹 못했다. 한참 만에 끙! 하고 신음을 내더니 정수리에 박힌 흙을 툴툴 털며 일어섰다. 남자는 멍청히 하늘을 바라보다가 큰 머리통을 갸웃거리며 물병을 챙겨들고 산을 내려갔다.
오래전부터 굴참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던 한 여자가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났다. 몸무게가 백삼십 근은 넉넉히 나갈 몸집이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처럼 풍만한 궁둥짝을 일으키며 머리를 극적 거렸다. 수십 마리의 까치가 집을 지었다 떠났을 법한 수세미 같은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단단히 묶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모다! 빙신들 같으니라고! 솔개 연(鳶)자에 ‘연비어약(鳶飛魚躍)’이구만. 그것도 몰라? 하늘엔 솔개가 날고 물속에선 물고기가 뛰논다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인데…. 만물의 이치도 모름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 모다 빙신들 같으니라고!”
여자는 깔고 앉아 있던 큰 보따리를 둘러메더니 히죽히죽 웃으며 정자를 내려갔다. 잎을 반쯤 떨군 굴참나무 사이로 해가 꼴딱 떨어졌다. 초저녁 어스름이 정자의 지붕위로 켜켜이 내려앉으며 편액의 글씨들도 희미해졌다.
*증미산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 한강변에 위치한 해발 55.2m에 11만2천㎡의 동산이다.
대한체육회지(SPORTS KOREA) 2009년 4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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