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문인들이 해방 이후 6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여 통일문학을 위한 첫 걸음을 뗐다. 그 걸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문학의 힘이 현실세계의 질곡을 타개하는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그에 대한 해답을 갈구하는 행진의 서곡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20∼25일,평양 백두산 묘향산 등지를 순회하며 열린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문학인대회’ 취재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가는 20일 새벽. 집을 나서 공항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거리는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빗질 소리로 가득했다. 청소는 아침에 대한 경배이자 새로운 발걸음을 맞이하는 의식이었다. 새벽 5시30분. 거리는 이내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한 그릇의 따순 밥을 벌기 위해 하품을 하며 걷는 사람들의 행렬이 노곤하면서도 신성해 보였다.
평양에 가면 또 어떤 행렬을 보게 될 것인가.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00여명의 남측 대표단(단장 고은)이 3층 대합실에 모여 서성거렸다. 표정마다 설렘의 박동이 묻어났다. 이윽고 출발 성명이 공항 청사에 울려퍼졌다. “오늘 우리 남녘의 시인·소설가·평론가들은 부푼 기대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북녘땅을 향해 떠나려 합니다. 이 만남은 분단문학의 역사에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대표단의 어깨에는 지난 100여년 간 우리 민족이 겪은 식민지 체험,분단 등 비극적 근현대사의 무게가 얹혀 있었다. 오전 10시50분. 고려민항 561편 전세기가 마침내 이륙했다. 기내 방송에서는 ‘아아 우리는 하나,눈빛도 하나’를 비롯한 북한 가요가 흘러나왔다. 항공기 안은 찜통 더위였다. 기내 안내원 임종선(23)씨가 ‘고려항공’이라고 적힌 부채를 나눠주면서 말했다. “우리 공화국에서는 뒷좌석부터 내립니다. 뒷좌석에 탄 손님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입네다.” 누군가 “그것이 평등 사상을 실천하는 것이지”라고 토를 달았다. 낮 12시40분. 항공기는 서해 공해상을 날아 1시간10분 만에 평양 순안비행장에 날개를 접었다.
하선을 기다리는 동안 작은 창문을 통해 하얀 빛이 들어왔다. 대표단 일원인 이향지 시인은 “빛나는 시간이군!”하고 한 마디를 던졌다. 하얀 빛으로 여행! 그 순간,거짓말처럼 꿀벌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기내의 좌석에서 좌석으로 날갯짓을 했다. “꿀벌도 평양에 오고 싶어서 따라왔군.” 소설가 황석영씨가 평양 공항청사 앞에서 도착 성명을 발표했다. “이곳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에 우리는 지금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남북 문학인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번 방북길은 이 말을 확인하기 위한 여정이 될 터이다.
4대의 버스에 나눠 탄 대표단은 순안비행장을 떠나 평양으로 향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에게도 익숙했다. 세월을 한 20년쯤 뒤로 돌려놓기만 하면 된다. 둑방의 버드나무 그늘에는 하굣길 학생들이 자전거를 세워놓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차는 시속 40㎞를 넘지 않는다. 귀한 손님을 맞아 안전 운행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금수산도로 왼편에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져 있었다. 이 도로부터 행인들이 여럿 눈에 띈다. 지하철도 건설박물관을 지나자 상점들도 눈에 들어온다. 과일남새상점,식료품상점 그리고 길거리 상점(키오스크)도 여럿이다. 개선문을 지나는데 인근 개선역사(지하철) 위에 ‘김정일 열정! 21세기를 결정한다’는 구호가 붉은 글씨로 적혀 있다. 리발관,청량음료,건재상점,대동강맥주를 알리는 간판을 지나면서 비로소 저 글씨가 한글로 적혀 있는 것을 실감한다.
숙소인 고려호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평양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여장을 푸는데 우리측 상황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북측이 해외 문인들을 이번 대회 제3의 대표로 인정해 참여시키자는 제안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당초 원안에는 없던 제안이어서 의장단이 긴급회의 끝에 북측과 교섭에 들어가 업저버 자격으로 참여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로 인해 오후 3시 인민문화궁전에서 열기로 한 본대회가 무려 4시간이나 늦어졌다.
오후 7시,대회장에 도착하니 200여명의 조선작가동맹 맹원들이 먼저 와서 원탁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양측 협상안을 둘러싼 자구 수정 때문에 다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의전실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누구도 말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7시40분,양측 의장단이 들어왔다. 예정보다 무려 3시간이나 지연된 끝에 양측은 ‘6·15민족문학인협회’ 구성,‘6·15 통일문학상’ 제정,문예지 ‘통일문학’ 발행 등 3개항을 합의했다.
정철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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