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의 문을 열어야 한다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웃옷을 벗은 한 남성이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경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두 손을 들어 올린 사내 뒤에는 그보다 몇 배가 큰 태극기가 나부낀다. 1987년 6월의 어느 집회 장면을 찍은 이 사진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1999년 AP는 이 사진을 100대 사진에 선정했다. ‘아, 나의 조국’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사진은 한국일보의 특종이었다.
1954년 창간되어 59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던 한국일보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일보의 기자들은 자본의 명령을 수행하는 온순한 월급쟁이를 거부하고 경영진과의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왜, 무엇이 ‘정론직필’에 힘써야 할 기자들을 이 싸움으로 내몰았는가? 사주 일가의 도덕 불감증과 방만한 회사 경영, 그 위기를 지적하는 기자들을 ‘갑’의 권력으로 길들이려는 사측의 반민주성이 그것이다. 지난달 15일 한국일보 사측은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을 봉쇄했다. 경영진의 인사발령에 반발하는 기자들의 출입을 막았고 기사작성․송고 시스템 접속을 차단했다. 또한 사측은 기자들에게 회사에서 임명한 편집국장 및 부서장의 지휘에 복종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의 ‘근로 제공 확약서’를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갑’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기자들만 신문제작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이다. 한국일보의 대다수 구성원은 이런 부당한 요구의 수용을 거부했다. 무엇이 남았는가? 신문제작에 참여해야 할 180여 명의 기자들은 거리에서 장재구 회장의 퇴진과 검찰이 사측의 배임 의혹에 대해 수사할 것을 촉구하고 있고, 경영진의 뜻을 받아들인 10여 명의 기자들은 타 언론의 기사를 짜깁기하여 ‘짝퉁 한국일보’를 발행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는 경영진과의 싸움에 나선 절대 다수의 한국일보 구성원들을 지지하며 대한민국 언론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편집국 봉쇄를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아울러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한국일보 경영진의 반민주성을 규탄하면서 사주의 배임 의혹에 대한 검찰의 투명한 수사를 요청한다. 우리는 더 이상 ‘찌라시’와 ‘짝퉁’이 신문이라는 가면을 쓰고 언론 행세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한 언론사의 구성원 절대 다수가 참여하지도 않고, 동의하지도 않는 기사로 만들어진 신문을 읽기를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번 사태를 기업 내부의 문제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란 사주가 언론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우리 사회와 언론인들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언론의 자유는 경영과 자본의 자유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온순한 월급쟁이로 전락한 기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언론인들이 권력과 자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나선 안된다. 이제 다시는 편집국의 문이 용역에 의해 폐쇄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다시 언론의 자유가 자본의 힘 앞에서 치욕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한국작가회의는 사측에 의해 신문제작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일보 구성원들과 함께 할 것이다.
2013년 7월 2일
(사)한국작가회의
성명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