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vs. 35




송경아





어둠 속에서 냄새나는 검고 끈적끈적한 물이 서서히 차 올라오고 있었다. 불쾌하게 발등에 묻어나나 했더니 어느새 허리까지 치올랐고, 명치끝을 타고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것도 모자라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물은 이제 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괴물처럼 은수의 코 앞에 넘실거렸다. 헤엄을 쳐 달아나려 해도 손발이 뻣뻣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에야 은수는 알아차렸다. 지금 몸을 먹어 들어오는 것은 물이 아니라 통증이었다. 온 몸을 쿡쿡 찌르고 벌겋게 달구는 무지막지한 아픔이 코앞까지 치받쳐 숨을 막고 머리를 빠갠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비명을 질러도 달아날 수 없는, 이것은……은수는 문득 깨달았다. 꿈이다. 다행히도.
깨달음과 동시에 퍼뜩 의식이 돌아왔다. 이미 한낮이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쳐든 햇빛이 따갑게 눈을 찔렀고, 밖에서는 수박을 싸게 판다는 화물차의 확성기 소리가 우렁우렁 울려왔다. 눈을 감으니 머리가 자근자근 쑤셨다. 은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기운 없이 누르며 몽롱한 기억을 더듬었다. 전날 저녁 어머니 전화를 받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맥주 캔을 따서 마시기 시작했고, 한 개로는 정신이 너무 말짱해서 하나 더 마시고, 세 개째를 따던 순간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럼 모두 몇 개나 마셨나? 은수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TV 앞에 놓인 거실 탁자 위에는 반짝거리는 맥주 캔이 모두 일곱 개, 얄밉도록 줄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은주의 입술 사이로 긴 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주량 초과 후 기억 상실. 요즘 들어 잦아진 일이었다.
- 너희 아버지가 이번 달 할아버지 제사 때는 너 오지 말란다.
한숨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그랑거렸다. 전화를 받을 때 그 대목에서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비죽이 웃고 말았다.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작년부터 쭉 그러던 차에, 이번 달 제사라고 굳이 갈 리가 있을까. 그래도 어머니는 떨어져 사는 막내 딸자식의 목소리를 한번이라도 더 듣겠다고, 내용 좋지도 못한 전언을 핑계로 전화를 거시는 것이다. 막내딸은 그런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면 그 핑계로 술을 마시고.
잠시 후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던 은수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그 악몽은 술과 전화의 조합으로만 나온 것이 아닌 듯했다. 장이 약한 탓으로 맥주를 마신 다음 날이면 늘 설사를 하곤 했지만, 아랫배 전체가 묵지근한 데다 요도가 저릿저릿하고 바늘로 찔러대는 듯 아프면서 벌건 혈뇨가 나오는 증상은 또 다른 것이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몸이 피곤할 때 종종 앓는 방광염이 재발한 모양이었다. 은수는 서둘러 몸을 씻고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몇 번 앓아본 경험으로 이럴 때는 빨리 병원에 가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처음 발병했을 때는 처녀가 산부인과에 간다는 것이 민망해서 진통제와 소염제로 버텨보려다가 점점 심해지는 고통에 하룻밤 내내 끙끙 앓았다. 십 년 남짓이 지나고 한 번의 결혼과 이혼까지 거친 지금 은수는 방광염에 대해서만은 실용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당장 아랫배를 쑤시는 고통에 수치심 같은 것은 필요 없고, 질병은 죄악이 아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남자면 어떻고 갈아입는 검진용 고무줄 월남치마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허리를 거쳐간 것이면 어떠랴. 그래도 은수는 옷을 입을 때 굳이 정장 치마가 아닌 편한 플레어 스커트를 찾아 입었다. 산부인과도 집에서 가까운 곳이 가장 좋지만, 기왕이면 여의사가 있는 곳이 더 좋지 않겠는가.

집 근처 제일 가까운 산부인과는 걸어서 5분 거리였고, 에어컨 바람이 서늘한 대기실은 깨끗하고 넓었다. 다만 파란 커버가 씌워진 대기실 의자에 등받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날따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의사가 수술 중이라니 그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배를 지나 온 몸에 고동치는 고통을 억누르며 은수는 여성월간지를 집어들었다가, 그것도 정신을 팔기에 여의치 않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접수대 뒤 간호사들은 한가로이 잡담을 하고 있었고 넓은 대기실에는 손님이 대여섯 명 앉아 있었다. 하나는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나이 어린 남자애였고, 나머지는 모두 기혼 내지 20대 중반 이후로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자연히 은수의 눈길은 여자들 사이에 중뿔나게 끼어있는 남자애에게로 향했다. 녹색 반팔 티셔츠에 흰 면바지를 입은 남자애는 요즘 아이답게 키는 희멀건히 크지만 몸과 팔다리는 가늘었고, 어른들이 보면 계집애 같다 할 커다란 눈과 고운 얼굴선이 돋보였다. 곱상하고 귀티나는 얼굴만 보아서는 여자애를 임신시켜 산부인과로 데리고 올 아이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학교 수업을 빼먹었는지 몰라도 남자애는 책가방을 꼭 껴안은 채 <수술실>이라는 명찰이 붙은 작은 방을 진지하게 노려보았고, 네모진 베이지색 방문에서 마취약에 취한 여자애의 “아아……아파…….”하는 까라지는 목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가방을 껴안은 어깨가 움찔움찔 떨었다. 성인 남성의 듬직한 어깨선을 획득하려면 한참 남은 나이. 아니, 대학 입시를 치르고 이제 술을 마셔도 되는 성인입네 하면서 으쓱으쓱 사회로 어깨를 비집고 들어가려 해도 이삼 년이나 남은 나이. 그 나이 대의 남자애가 여자애를 임신시키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무릅써 가며 같이 산부인과에 오고,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자애를 수술실에 들여보낸 후 비명소리를 듣고 있는 심정을 서른 다섯의 은수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은수는 자기 나이의 절반이나 살았을까 싶은, 아직 여릿여릿한 어린 선이 남아있는 어깨 너머로 들리지 않고 들릴 리 없는 질문을 속으로 쏘아보냈다. 이런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한 후에 너는 어른이 되겠니. 지금이야 죄책감을 느끼면서 네가 기다리는 여자애를 평생 책임질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군대 가기 전에, 결혼하기 전에 앞으로 네가 겪을 비슷한 경험은 몇 번이나 더 될까. 좀더 심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결혼해서도 과연 이런 경험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도 아직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책임진답시고 산부인과에 따라온 너에게는 염치와 순수가 남아 있으니, 여자에게 유형무형의 폭력을 휘두르고 그 결과의 책임도 여자에게 짊어지운 채 산부인과에조차 혼자 보내는 성인 남자들보다 더 낫다고 해 줘야 할까.
당연히 대답은 없었고, 은수는 이제 욱신욱신 쑤시다 못해 바르르 떨리는 아랫배를 추스르며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즐거운 생각으로 고통을 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몸이 괴로울 때는 더욱 괴로운 생각만 났다.
- 아다시피 네 아버지가 벽창호잖니. 네가 잘못해서 이혼한 것도 아니고, 요즘은 이혼한 것쯤 흉이 안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4남매의 맏아들인데다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은수의 아버지는 가부장과 바른 생활의 표본 같은 남자였다. 평생 담배꽁초 하나 길가에 버려본 적이 없다는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월급 봉투를 뜯지도 않은 채 어머니에게 넘겨주었고, 대신 생활비가 모자란다는 걱정 같은 것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가끔가다 푸념 삼아 처음 겪었던 부부싸움을 이야기해 주곤 했다. “내가 뭐 대단히 바가지를 긁은 것도 아니었단다. 그저 월말에 가계부 정리하다가 ‘이번 달은 지출이 많아서 좀 어려웠어요.’ 한 마디 했는데, ‘뭐가 어째! 교사 마누라가 돈 얘기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애들 가르치는 나더러 도둑질이라도 하라는 거야?’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지 뭐니. 그 다음부터 내가 남한테 돈을 꾸는 한이 있어도 너희 아버지하고는 살림 얘기를 안 한다.” 덕분에 은수의 형제들은 자라면서 용돈 투정 한번 하지 못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밤 열 시 이전에 들어와야만 했다. 세 살 터울의 대학생 오빠가 어느 날 하루 술을 마시고 열 시 통금을 어겼다고 사흘 동안 외갓집으로 쫓겨나 있다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들어오는 것을 고등학교 때 본 은수는 아예 통금을 어겨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2박 3일 졸업여행을 허가받은 것만 해도 큰언니는 ‘평소에 막내라고 아버지가 은수 너를 귀애하시더니, 이런 데서도 티가 나는구나. 나 졸업 때는 입도 못 떼어봤다. 아버지 나이 드셔서 엄청나게 유해지신 거다.’하며 질시 섞인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친척 중에서 누가 이혼하느니 마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쯧, 하고 혀부터 차고 보았다. 이혼 당사자들이 결혼을 너무 쉽게 생각했고 참을성이 없다는 매운 말이야 당연한 것이고, 아무리 애들이 다 커서 출가했다고 해도 그런 지저분한 말이 집안에서 들리는 건 어머니 탓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인정하는 이혼 사유는 세 가지밖에 없었다―가정폭력, 외도, 알콜 중독.
그러니 은수가 결혼 삼 년 만에 이혼한다고 했을 때 집은 왈칵 뒤집어졌다. 더구나 이혼 사유가 남편의 낭비벽이라고 하자, 아버지는 일단 다짜고짜 불벼락부터 내렸다.
“내가 널 그렇게 잘못 가르쳤더냐? 집안에 돈이 좀 없다고 해서 집을 뛰어나와 친정에 오고, 백년가약을 맺은 남편하고 헤어질 생각부터 해? 당장 박서방한테 잘못했다고 빌고 집에 들어가라.”
“그런 게 아니어요, 아버지…….”
은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렵게 입을 떼어 설명했다. 돈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어요. 필요한 곳에 쓸 만큼 쓰는 거라면, 우리가 같이 살 미래를 위해 아끼고 노력하는 기색이 보인다면 지금 당장 지출이 과한 것 정도는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한편에서는 어머니께 보고 배운 대로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고 갖고 싶은 것은 뒷일 생각하지 않고 카드로 사버린다면 제가 어떻게 감당을 할 수가 있겠어요. 처음에는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다가 이제 돈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굳힌 채 나가서 술을 마시고 또 술값을 내고 오는 사람과 무슨 부부 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부부라면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버지, 전 모든 남자가 아버지 같은 줄 알았어요. 제가 아끼고 절약하면 그에 걸맞게 행동해 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제가 말하면 화를 내고, 제가 참으면 아무 문제 없는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해요…….
은수는 차마 그 ‘술값’ 속에 단란주점이니 룸싸롱 계산서가 끼어 있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아니, 말 못한 것은 너무 많았다. 단지 돈 문제 뿐이 아니라, 옆에 살 붙이고 자는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 보았자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벼랑 끝에 선 듯한 막막한 단절감. 차근차근히 말을 하다가 애걸을 하고 화를 내도 상대가 자기 주장만 되풀이할 뿐 전혀 변하지 않을 때 느끼는 외로움. 어차피 그런 부분까지 아버지가 알아주리라고는 바라지 않았고, 다만 삼 년 동안 차마 남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용납은 못하더라도 이해는 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인 반응은 위로받고 이해받고 싶었던 은수의 마음을 처절하게 내쳐 버렸다.
“그러면 너는 마누라 말에 무조건 네네 하고 따르는 줏대 없는 남자를 원했던 거냐? 남자가 기가 꺾이면 그걸 어디에 쓰겠으며, 집안에서 아내가 남편을 따라 주지 않으면 남자가 어떻게 기를 세우겠냐? 내가 너를 막내라고 귀여워만 했더니 네가 뭘 단단히 잘못 생각했구나. 남자가 사회생활 하다 보면 지출이 과할 때도 있는 거고, 그럴 때야말로 여자가 잘 받쳐줘야 하는 거다. 이혼 같은 험한 소리 두 번 다시 입밖에 올리지 말고, 잔말 말고 박서방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라. 나도 딸자식 잘못 키운 죄가 있으니 같이 사과하마.”
그 순간 은수는 남편뿐만 아니라 아버지와도 이혼해서 헤어질 수 있다면 이혼하고 싶었다. 평생 남한테 허리 굽혀본 적 없는 아버지로서는 사위에게 같이 사과하겠다는 것이 아마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에 대한 최대한의 애정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수는 이제 성인이었고, 이혼 결심 또한 아버지의 불호령에 그만 고개 숙이고 꺾어버릴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지루한 밀고 당김 끝에 이혼을 하고, 재산 분할로 생긴 목돈을 전세금으로 삼아 바늘방석 같던 친정에서 자신만의 공간으로 이사하던 날,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 이사를 도와주러 온 오빠는 동정과 감탄이 섞인 눈초리로 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놀랐다. 난 우리 형제 중에 이혼을 할 사람이 있으면 나나 강단진 데가 있는 누나일 거라고 생각했지, 순둥이인 너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것도 친정에서 몇 달 동안이나 버텨가면서.”
은수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시달리는 생활이 마음의 여린 살들을 어떻게 깎아내는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야기할 바가 못되었다.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쪽이 좋고 겪은 사람이 상처를 풀어헤치는 것도 그닥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니까.
마침내 수술이 끝난 모양이었다. 남자애는 후다닥 회복실로 뛰어가고 다음 환자가 진료실에 불려 들어갔다. 은수 차례가 되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은수는 아파서 꼬이는 다리를 억지로 가누며 정수기로 가서 손바닥만한 종이컵에 두어 번 물을 받아먹었다. 얼얼하도록 차가운 물이 숙취로 타는 목을 기분 좋게 적시며 내려갔다. 어차피 소변 검사를 수월하게 하려면 물을 좀 먹어둬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지만, 이 더운 여름날 아랫배의 고통을 참으며 다른 산부인과를 찾아 길을 헤맬 여력은 없었다. 은수는 한숨을 쉬며 아까 앉았던 자리에 가서 다시 앉았다.
- 전이랑 나물이랑 싸 줄 테니까 제사 다음 날이라도 좀 올래?
은수가 집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친척들이 모여 있을 때 은수와 눈이 마주치면 아버지는 불편한 듯 슬그머니 눈길을 옆으로 돌렸고, 그러면 은수는 알아서 아버지 눈에 안 띄는 부엌으로 물러나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 미리 어머니에게 귀뜸을 받은 친척들은 알아도 모르는 척, 결혼 전의 은수를 대하듯 심상하게 대해 주었다. 왜 빨리 결혼 안 하느냐는 채근이 없는 건 오히려 결혼 전보다 편했다. 일 년 정도는 명절이며 집안 모임을 그렇게 지나보냈다.
폭탄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작년 아버지 생신 때문에 모인다고 은수와 집이 가까운 언니 차를 얻어 탄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은수보다 다섯 살 많은 언니는 그야말로 살림 밑천이 된 맏딸이었다. 명색이 교육자 집안인 데다가 삼남매 모두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등골이 휘어져도 자식들을 전부 대학에 보낼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막내 작은아버지가 서른 둘의 나이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는 집안에서 이전에 이미 동생들 둘의 결혼 밑천을 댔던 아버지는 당연히 열 다섯 살 터울지는 막내 동생의 결혼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부싸움을 하는 소리가 안방 문턱을 넘어 나온 적이 없는 은수의 집안에서, “동생 둘 시집 장가 보냈으면 사람 도리 할 만큼 다한 거지, 그래 막내 동생까지 챙기자고 생떼같은 자식들 앞날을 망칠랍니까? 그 동생은 애들 삼촌이랑 고모한테는 동생 아니랍니까? 암만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하는 어머니의 울음 섞인 쇳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던 그 날은 충격과 공포의 날이었다. 아버지에게 대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린 은수는 지금까지 알던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부부싸움의 당사자 아닌 당사자가 된 언니는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샤프를 하얗게 움켜쥔 손가락은 한 문제도 풀지 못한 채 애꿎은 연습장 위만 박박 휘저었다. 언니는 결국 장학금을 받으며 전문대 간호학과를 다녔고, 졸업하자마자 병원에 취직해 돈을 벌었다. 그 돈이 언니의 결혼 자금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오빠와 은수의 대학 생활까지 크게 뒷받침해 주었다는 것은 온 가족이 다 알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비밀이었다.
그래서일까. 조카들에 대한 언니의 정성은 유다른 데가 있었다. 워낙 형부네 집안이 돈 걱정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유족하기는 했지만, 언니는 결혼 후에도 계속하던 병원 일을 임신이 확인되자마자 그만둬 버렸다. 임신 기간에 온갖 좋다는 태교를 다 한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먹는 것, 입는 것, 배우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호인인 형부와 지극정성인 언니 밑에서 크는 조카들이 조금 버릇없는 것은 아닌가 눈에 거슬리는 부분은 있었지만 친정에서는 아무도 조카들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안에서 마구 뛰어다니던 큰손녀를 ‘조신하지 못하게!’라고 꾸짖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한번도 아버지에게 대든 적이 없던 언니가 가시눈을 하고 앙칼진 목소리로 결기를 냈던 것이다.
“아버지, 여자애라고 기를 꺾고 집안에 희생하라고 가르치는 건 저로 끝내세요. 아버지가 제 자식한테까지 그러시면 저 이 집에 다신 안 와요.”
그런 말이 나올 경우가 전혀 아니었지만, 찔리는 바가 있었던 아버지는 눈을 내리깔고 어물어물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그 상황을 전하던 어머니는 통쾌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 양반도 이제 좀 알겠지. 자식한테 특별히 뭘 해주지는 못할망정 자식한테 빚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언니네 자식은 둘이었는데 딸인 큰애가 작년에 열 넷이고 아들은 열 하나였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동생 민수에 비해 중 1짜리 큰조카 민정이는 껑충한 키와 몸만 보면 벌써 봉긋한 가슴에 처녀 태가 완연했다. 하지만 하는 짓은 영 아이 한가지라 계속 자발없이 동생과 말꼬리를 잡아 싸우거나 운전하는 형부에게 말을 걸다가 언니에게 혼나곤 하고 있었다. 대형차 뒷좌석이 아무리 넓다 한들 투닥거리는 조카들 틈에 부대끼며 끼어 가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다. 민정이도 그런 심정은 마찬가지였는지 아니면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가끔 은수를 곁눈질하며 곤란한 질문을 서슴지 않았다.
“이모, 이모는 왜 이모부 차 안 타고 우리 차에 타고 가요?”
“이모는 이모부랑 헤어졌거든.”
“어, 그럼 이모랑 이모부랑 이혼한 거예요? 결혼 끝난 거예요?”
“……응.”
곤혹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여기까지야 철들지 않은 아이의 무람없는 호기심이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유행하는 음악을 틀어 달란다, 놀자고 달라붙는 동생을 떼낸다, 한참 부산을 떨던 민정이가 그 다음에 던진 질문은 어른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이모, 이혼하니까 좋아요?”
은수는 한참 말을 못하고 망설였다. 앞좌석에 앉은 언니와 형부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는 어른들의 당황이 즐거운 듯 생글거리면서 “응? 좋아요? 어때요?”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은수는 마른 입을 축이고 간신히 무난한 말을 찾았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
“뭐가 좋고 뭐가 나빠요?”
“민정아! 이모한테 그런 거 물어보면 못 써!”
언니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터지자 민정이는 혀를 낼름 내밀며 목을 움츠렸다. 민정이가 제 엄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예약해 놓은 한정식 집에 다 와 갈 무렵, 민정이는 다시 은수에게 엉겨붙었다.
“이모, 그럼 이모 집에 가끔 놀러가도 돼요?”
“이모 집은 작고 불편해. 네가 놀 것도 없고. 뭐하러 놀러오려고 그러니?”
은수는 앞자리의 언니 눈치를 살펴가며 뜨악하게 대답했지만 민정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민정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목까지 오는 머리를 몇 가닥 잡아 손가락에 꼬아가며 대답했다.
“왜요? 이모는 혼자 사는 거잖아요. 난 혼자 사는 사람 집은 어떤지 꼭 가보고 싶더라. 저도 이 다음에 커서 자기 집 갖고 혼자 사는 게 꿈이걸랑요.”
은수는 이 되바라진 조카애에게 화를 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은수가 대답을 강요받기 전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방금 자기가 한 질문을 기억하는지 어쩌는지, 아이는 동생을 밀어대며 나비처럼 팔랑팔랑 차에서 내렸다.
그날 식사 시간 내내 언니는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겸연쩍은 형부는 괜히 더 너스레를 떨고 처가 식구들에게 요리를 권해가며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지만 은수는 음식 맛이 어떤지,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느낄 수 없었다. 은수는 자기가 어디선가 굴러온 모난 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화요초와 값진 수석들로 장식된 정원에 와서 박혀 있는 천더기 돌. 아예 돌처럼 느낌도 생각도 없이 박혀 있다가 누군가의 손길에 파헤쳐져 버려지면 좋으련만. 이런 은수의 기색은 아랑곳없이 아이들은 그저 맛난 음식과 생일 축하 케이크에 코를 파묻고 먹기 바빴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형부에게 “일 약속이 있어서요.”하고 둘러댔을 때, 언니는 은수를 잡지 않았다. 집에 와서 명치께에 얹힌 요리를 한바탕 토해내고 속을 조금 추슬렀을 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은영이가 전화로 네 아버지한테 아주 노발대발을 하더라. 네가 민정이한테 뭐라 그랬니? 네가 뭐 애들한테 안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앞으로 너 오면 자기가 안 온다고……에휴,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내 자식인 줄 알았더니 씨도둑은 못한다고, 은영이 걔가 어렸을 때는 음전하고 원만하더니만 어째 나이 들수록 성깔이 네 아버지 판박이냐…….
그 다음부터 은수는 식구들이나 친척들이 모이는 날 친정에 가지 않았다. 언니 심정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손 안의 구슬처럼 귀한 딸자식이 고이 자라 결혼해서 무탈하게 사는 것이 딸 가진 모든 부모의 소망일진대, 바로 가까이 있는 이혼한 이모가 딸에게 역할 모델로 비친다면 누가 걱정하지 않겠는가.
“조은수씨,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카랑한 목소리가 두서없는 회상을 끊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의사에게 증세를 말하고, 소변을 받아오고, 의사가 결혼과 출산 여부를 물은 후 진료에 들어가는 이 다음 절차들은 만성 환자인 은수에게 아주 익숙한 것들이었다. 다행히 이곳 원장은 나이 지긋하고 넉넉한 몸집에 서글서글해 뵈는 여의사였다. 덕분에 질경의 차갑고 부담스러운 감촉이 질을 헤집고 들어올 때도 은수의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아무리 의사라 해도 외간 남자에게 아랫도리를 내맡기고 싶지 않은 것은 여자라면 모두 느낄 인지상정이리라.
처방전을 받고 진료비를 계산하는데, 회복실 문이 뻐끔 열리면서 아까 본 남자애가 여자애를 부축하고 나왔다. 여자애는 마취가 덜 풀렸는지 흐린 눈을 하고 남자애의 어깨에 기대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심코 여자애를 쳐다본 은수의 눈이 커졌다. 은수는 터져나오려는 놀람의 소리를 내리누르고, 태연히 계산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 입구에서 서성대며 기다렸다. 그 어린 한 쌍이 내려오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은수를 지나치려던 찰나 은수는 여자애 앞을 가로막았다.
“얘, 민정아! 잠깐만…….”
누군가 하고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애가 갑자기 히익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두 팔로 남자애를 밀쳤다. 새처럼 높고 호들갑스러운 하이 소프라노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어떡해 어떡해 오빠, 우리 이모야. 빨리 저리 가! 내 나중에 전화할게 빨리 가아, 응?”
당황한 남자애는 민정이의 기세에 밀려 몇 발짝 떼더니 도망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주차된 차 뒤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하지만 민정이를 알아본 순간부터 남자애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던 은수는 재빨리 민정이의 옆으로 돌아 팔을 꽉 끼었다. 민정이는 도망가려고 몇 번 파닥거리며 은수의 몸을 밀어냈지만 마취 직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민정아, 너 일단 우리 집에 가서 좀 쉬자. 이 근처거든?”
“이모 나 집에 데려다 놓고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서 이르려고 그러죠? 그런 거죠?”
시늉이 아니라 진짜 울음이 섞인 아이의 목소리가 가슴에 애처롭게 와 닿았다. 이 되바라진 조카가 얼마나 얄미웠는지는 잠시 잊은 채 은수는 몸 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연민과 애정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조를 흉내내며, 은수는 몇 번이나 “안 일러, 안 일러……비밀 지킬게.”하고 되뇌었다. 남이 들으면 우습겠지만 진정이었다. 애초에 민정이를 붙잡았던 것부터가 혼을 내준다든지 잘 타이른다든지 하는 선도부 선생 같은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렸을 때부터 똑바른 길이라 믿어왔던 생활에서 어느덧 한참 벗어나 버린 은수 자신이 이제 와서 어른들의 공모에 끼어들어 민정이를 타이른다고 무엇이 얻어지겠는가. 은수는 분명 언니에게 말도 못하고 남자친구의 팔에 기대어 병원을 찾았을 민정이, 유산 후의 통증을 좀 심한 생리통쯤으로 생각하고 몸조리고 뭐고 없이 일상 생활을 할 민정이에게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 먹여주고 하루라도 남모르게 푹 쉬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이는 하반신을 침대 속에 파묻고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미역국을 한 숟갈씩 떠먹었다. 다 먹은 그릇을 물리면서 민정이는 발딱 고개를 쳐들고 은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모도 임신했던 거예요?”
은수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아이의 속은 빤히 들여다보였다. 어떻게든 은수에게 약점을 잡히기 싫어서 은수의 비밀 하나를 잡고 있고 싶은 것이다. 은수는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야. 이모는 만성 방광염이거든. 피곤하면 자꾸 재발하는 거야. 꼭 임신을 해야 산부인과에 가는 건 아니란다.”
독 오른 뱀처럼 빳빳하던 민정이의 고개에 힘이 빠졌다. 민정이는 한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이모는 나 야단 안 쳐요?”
“야단쳐서 뭐할 건데. 그럼 네가 벌써……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바뀌기를 하니, 수술했다는 사실이 없어지기를 하니. 그런 거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오늘 하루는 그냥 누워서 푹 자고 가. 유산한 건 산후조리랑 똑같이 몸조리해야 한다고 하니까, 이삼 주는 될 수 있으면 잠 많이 자고. 물 마실래?”
“……네.”
물잔을 들고 들어가자 민정이는 후다닥 핸드폰을 감추었다. 아까 그 남자애에게 문자라도 보내고 있었던 것이리라. 은수는 못 본 척 물잔을 쥐어주었고, 민정이는 약국에서 받아온 약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민정이가 다 비운 물잔을 침대 옆 화장대에 내려놓자 은수는 물잔을 들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민정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은수의 발길을 잡아챘다.
“이모……사실은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어요. 오빠도 나도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도 오빠가 자기가 책임진다 그러고, 어떻게 돈을 구해와서……. 나 엄마가 눈치챌까봐 요 몇 달 동안 얼마나 떨었다구요. 정말 엄마한테 이르심 안 돼요…….”
말끝은 눈물로 흐려져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은수는 어떻게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잠자코 침대 옆에 가서 민정이의 등을 천천히 둥그렇게 쓸었다. 그 손길에 참지 못하고 와악 울어버린 민정이가 제 몸 속 울음을 다 비워낸 후 지쳐 잠들 무렵엔, 어느덧 따갑던 오후 햇살이 한풀 꺾여 눅어들고 있었다.

다음날 저녁 핸드폰이 울렸을 때 은수는 며칠 전 출판사에서 받아온 번역용 원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발신자 번호를 본 은수는 화급히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귀에 갖다대자마자 낯익은 목소리가 악을 썼다.
“너 도대체 우리 민정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무슨 짓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때문에 어제 학원 빠졌다며! 너희 집에 가 있었다고 애가 당당하게 말하길래 왜 이모네 집에 갔냐고 따졌더니, 민정이가 나더러 이모 반만 자기를 이해하라느니 신경질을 내고 나가버렸어. 생전 안 그러던 애가 나한테 막 대드는데, 어제 너네 둘이 도대체 뭘 한 거야?”
“뭘 하긴! 그게…….”
은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상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학원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든지, 아니면 평소와 다른 민정이 기색에 언니가 학원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든지 해서 민정이가 학원에 빠졌다는 사실이 들통났을 테고, 성적 한 등 한 등 때문에 눈에 불을 켜는 언니는 민정이를 마구 닦달했을 것이다. 민정이는 대충 몸이 아파서 이모네 집에 있었다고 둘러대고 언니는 왜 집에 안 오고 이모네 집에 갔냐고 아이를 몰아세웠으리라. 안 그래도 학원 한번 빠지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을 겪은 민정이가 그런 다그침을 참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제 성질을 못 이겨 파르르 떨어대는 언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쇳소리 섞인 언니의 목소리가 폭풍우처럼 귀를 때렸다.
“지금 걔 핸드폰을 아무리 걸어 봐도 안 받아. 자식이 어디 갔는지 모르고 연락도 안 되는 부모 마음을 애 없는 니가 알아? 너, 찾아 내. 우리 딸 찾아 내. 내 이렇지 않을까 걱정했어. 안 그래도 예민한 나이에 너 같은 애가 멋있어 보이면 어쩌라고 그래? 빨리 우리 딸 찾아내고, 다시는 애한테 접근하지 마. 알았어?”
대꾸하지 말자. 언니도 지금 놀라서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저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주워섬기는 걸로 생각하고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발칵 돋아 오르려는 성질을 간신히 억누르고 은수는 자기도 찾아보겠다고 대답한 후 대충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민정이가 걱정되는 것은 은수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남자친구를 찾아갔겠지만, 그 둘이 또 어디 가서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수술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디 가서 술을 마시거나 내친 김에 외박이라도 한다면 일은 더 커질 것이었다. 그건 열 다섯 살짜리가 제대로 감당하거나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짐이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핸드백을 챙겨들고 집 열쇠를 잠그는 은수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막상 밖에 나오니 막막했다. 해 긴 여름인데도 하늘 저편에는 어느덧 장밋빛 놀이 퍼져가고 있었고, 인적이 성기어진 저녁 거리는 유난히도 넓어 보였다. 시간이 이렇게 되었으니 병원도 문을 닫았을 것이다. 아까 생각이 미쳤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는 혹시라도 남자아이가 병원에 남겨 놓았을 연락처를 찾을 수도 없었다. 넋을 놓고 길을 바라보던 은수의 가슴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내 열 다섯 살 때, 거리는 이렇게 넓고 갈 수 있는 길은 이렇게 많았던가. 분명히 자신이 지나온 길인데도, 지금 거리를 헤매고 있을 열 다섯 살 여자아이가 가고 있는 길의 방향을 서른 다섯의 은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망연히 서 있는 은수의 어깨 위로 아직도 한낮의 열기를 품은 바람 한 줄기가 스산하게 스쳐갔다.





송경아1971년 출생. 연세대학교 전산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소설을 발표했다. 지은 책으로는 [성교가 두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학적 고찰 중 사례 연구 부분인용], [책], [엘리베이터], [테러리스트] 등이 있음. 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