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자식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망쳐놓는가?




이재웅





유내춘은 열한시가 다 되어 눈을 떴다. 약간 젖혀진 커튼 사이로 겨울의 노랗게 마른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아내가 즐겨 뿌리는 자스민 향수 냄새가 코끝에 어렸다.
그는 새벽이었는지 아침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동안에 몇 번인가 의식을 차렸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눈을 떠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머리의 절반이 이미 알코올과 잠과 꿈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그는 화장실에 갈 때에도 마치 물위를 걷는 듯한 기분으로 발목에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해초가 감겨오는 듯한 착각 속에서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몇 년 전에 죽은 아버지를 만나기도 했다 ― 이건 꿈이 분명하구나. 왜냐하면 아버지는 말 그대로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하고 유내춘은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 유봉길은 인생의 말년에 그랬던 것처럼 안락의자를 베란다에 가져다놓고 그 위에 기대어 앉아 서쪽으로 져가는 노을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서운한 게 있으면 말을 해봐요.”
유내춘은 그의 발 앞에 쪼그려 앉아 아버지의 깡마른 발목을 붙잡고 말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잖아요.”
유봉길은 팔걸이에 두 팔을 힘없이 걸친 채 붉은 노을을 몸 전체로 음미하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는 언제나 내 아들이지…….”
그 목소리는 아주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에 그의 앞에서 단 한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던 유내춘은 노을에 적셔진 아버지의 흰머리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 역시 꿈속에서인지 아니면 현실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유내춘은 형규와 미영의 목소리도 들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갈아 가며 그의 귀에 대고 외쳤다. 아버지들은 우리들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해! 아버지들은 여자에 대해 무지해! 난 그걸 알아! 그들은 언제나 우리들을 기웃거릴 뿐이야! 그들은 정면에서 우리를 바라보지 못한다고!
마흔이 다 되어 얻은 늦둥이, 일곱 살짜리 동성이가 어린아기가 되어 옹알이 하는 소리도 들었다. 녀석은 유내춘의 몸을 흔들며 “아빠, 아빠. 일어나. 일어나.”하고 말하기도 했다. ― 이건 아마 현실이었을 거라고 유내춘은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 아내는 술 취한 그를 침대에서 끌어내려 왈츠를 추게 하려고 했다. “자, 움직여요. 한발 두발. 서두르지 말고 조금씩 전진해요.” 그녀는 말했다. 그 때 그의 몸은 가위에라도 눌린 듯 통나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벌려 아내라고 생각되어지는 회색의 빛 덩어리에 대고 뭐라고 떠들어댔는데 그게 비명소리였는지 아니면 욕설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내춘은 이불을 목까지 당겨 덮은 다음 두 눈을 멀뚱거리며 지난 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제 밤의 그는 평소의 그 답지 않았다. 그는 너무 많이 취해 있었다. 집 근처의 소주집에서 알코올이 섞인 음료를 이것저것 마시고 집에 돌아와 약주 반 병을 더 마셨으니 그건 당연했다. 어쨌든 아내의 말대로 그는 좀 미쳐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주 과격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쿵쿵 울리며 이층에 있는 아이들의 방으로 진격해 들어가려고 했다. 만약 아내가 뒤따라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억지로 그의 허리를 붙잡고 일층의 응접실로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이들 앞에서 어떤 추태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브레이크 없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그는 아이들에게 돌진해서 그들을 부숴버렸을 것이다. 뺨을 때리고 욕설을 몇 바가지 퍼부어주는 것 말이다.
“네 아버지는 술에 좀 취한 것 뿐이야.”
아내는 그 대신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말했다. 유내춘은 응접실 소파에 널브러져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그의 자식들, 형규와 미영 역시 각자의 방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알아요, 엄마.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도 괴로우실 거예요. 우린 상관없어요.”
형규는 말했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는 눈빛으로 유내춘을 바라보더니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아내는 유내춘에게로 돌아와 그의 옆에 앉더니 “매일 이렇게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해요?”하고 나무랐다. 그리고 며칠 전에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 올려서 잔소리를 해댄다. 아이들 역시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며, 또 어쨌든 이런 식으로 괴로움을 발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둥의 내용이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지 알기나 해요? 밖에서 돌아오면 지하실에 내려가 아버님의 안락의자에 줄곧 앉아 계시기만 하잖아요. 그게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불안하게 하는지 알기나 해요? 요즘 애들이 어떤 기분인지 알기나 하느냔 말예요? 당신은 모든 걸 잃고 있다구요. 맨 정신으로 달려들어도 될까 말깐데 당신이 어떤지 보라구요.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서 아버님 사진을 붙잡고 아버지, 아버지하고 있잖느냔 말예요. 내 말이 틀려요? 도대체 돌아가신 아버님을 불러내서 뭘 어쩌자는 거예요? 정말로 아버님의 유령이라도 불러내고 싶은 거예요? 그런 거예요?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요.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에요. 술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의 당신이라구요.”
근 한달 사이, 경기도 외곽에 자리잡은 유내춘의 집에는 몇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폭풍우 같았다.
먼저, 유내춘 자신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직장과 관련된 중소기업들의 연쇄부도, 계속되는 적자로 인한 대대적인 인원감축, 이유야 많고 또 뻔했지만 ― 한마디로 말하면 그가 더 이상 앞으로 달려가지 못한다는 거였다. 내가 달려가지 못한다고? 그는 어이가 없었다. 뒤는 고사하고 옆도 돌아볼 줄 모르는 그가 앞으로 달려가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떤 작자들이 앞으로 달려갈 수 있겠는가? 누가 쫓겨나든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라고 동료들이 서로에게 충고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그런 충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난 더 달릴 수 있어!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장이란 작자가 그를 술집으로 끌어내 모기만한 목소리로 뭐라고 지껄여대는 데에야 당할 재간이 없었다. 나 없이 잘들 해보라지. 아주 잘됐군 그래. 이 기회에 나도 내 인생을 찾아봐야겠어! ― 그는 곧장 집으로 되돌아왔고, 미래에 대한 아무런 걱정 없이 아주 떳떳하게 밤거리를 어슬렁거렸고, 술을 마셨다. 그는 늦잠을 잤다. 하지만 아내가 “이래도 되는 거예요?”하고 물었을 때, 정말이지 그 순간만큼은 떳떳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 항변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걱정 없어! 며칠 휴가를 얻은 것 뿐이야! 그렇게 됐다고. 당신은 걱정할 것 없어!”
또 다른 폭풍은 그의 자식들이 몰고 왔다.
그의 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몰며 시내의 간이도로를 가로지르다가 중년의 사내를 쓰러뜨렸다. 그는 갈비뼈 두 개와 한쪽 허벅지가 박살이 났다. 병원측에서는 전치 6개월은 넉넉할 거라고 했다.
미영은 일 주일 전에 도시 외곽에 있는 산부인과에 가서 2개월이 채 못 된 아기를 지웠다. 아내는 이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아이들과 잡담을 하고, TV드라마를 보고 ― ‘일상’이라는 장막으로 딸의 상처 난 자궁을 덮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기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사내 녀석이 술에 취해 광포하게 현관문을 걷어차는 데에야 그녀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앞머리는 노랗게 물들이고, 이마에는 아직도 여드름이 돋아있고,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일 만큼 새까맣게 어린 녀석은 딸을 보호하기 위해 현관문 밖으로 나온 유내춘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꺼져. 나는 당신의 딸을 보러 온 거야.”
“좋은 집안이로군.”
유내춘은 그 날 밤에 침대에 드러누워 말했다.
“하지만 그애들에게 소리 질러서는 안돼요. 누구보다도 두려워하고 있으니까요.”
아내는 말했다.
유내춘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 또, 자식들이 세상을 그런 식으로 굴러먹는 데에는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아이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깊게 믿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그 녀석들을 믿었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유내춘에게는 뭔가 억울한 것이 있었다.
유내춘은 침대에서 내려섰다. 햇살이 뺨에 닿을 때마다 눈앞이 어른거렸다. 내장 냄새와 술 냄새가 입 안에 뒤범벅되어 있었다. 목은 화끈거렸다. 침대에서 몇 걸음 내딛어보는데 현기증이 일고 찌르르 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그는 간신히 잠옷 위에 운동복 한 벌을 걸쳐입고 응접실로 나섰다.
집안에는 아내가 기르는 12년 된 늙은 개 바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어젯밤에 아이들(그녀는 스무 살이 다 된 형규에게도 ‘우리 아이가’라고 말하곤 했다)과 함께 E마트에 쇼핑을 가기로 했노라고 말했다. 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옷이나 액세서리 등등을 몽땅 사주겠다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올 계획이지만 아이들이 원한다면 놀이공원에도 가볼 생각이어서 어쩌면 좀 늦을지도 모르겠노라고도 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유내춘은 주방으로 갔다. 바우가 응접실 소파에 엎드려 있다가 느린 걸음으로 쫓아왔다. 그것은 희멀건 눈으로 유내춘의 턱을 올려다보더니 고양이처럼 갈색머리를 유내춘의 다리에 비빈다.
식탁 위에는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유내춘은 식탁 위의 상보, 식탁, 싱크대, 찬장 등을 한번 쑥 훑어보고 주방의 창가 쪽으로 다가섰다. 앞마당과 울타리 너머의 들판에는 흰 눈이 조금 쌓여있고 붉은 흙이 그 새로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그 위로 아지랑이들이 하늘거린다. 창문을 약간 열어젖히자 바깥 풍경의 아련하고 서늘한 무엇인가가 유내춘의 이마를 훑고 지나간다.
그는 식탁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주인에게 흥미를 잃어버린 늙은 개는 주방과 응접실의 경계선에 엎드려 있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자 그것은 잠시 턱을 들어 주인을 바라보고는 다시 내려놓는다.
유내춘은 이틀 전에 아들과 함께 경찰서에 나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형규는 검은 양복바지에 검은 무스탕을 걸치고 현관문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마와 턱에는 여드름이 돋고, 머리는 올백으로 빗어넘기고, 발에는 미국의 카우보이들이나 신을 법한 구두를 신은 아들이 그는 더없이 낯설었다. 그는 아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경찰서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구. 내가 앞만 보면서 불러들인 풍요가 겨우 이런 거냐? 그는 그 생각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달리 다른 언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차갑고 어두운 골목과 하얗게 말라가는 가로수를 지나쳤다. 철물점, 제과점, 이발소 앞을 지나치면서 그 가게들의 쇼윈도에 비친 자신과 아들을 힐끔거리며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누가 이 두 인간을 아버지와 아들이라 칭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쇼윈도에 비친 두 사람은 분명 자신과 아들을 닮아 있었지만 현실과 분리된 어떤 세계 속에서 이름과 나이, 인간이라는 모든 조건들을 잃은 채 어딘 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의 모든 조건들보다 더욱 진실처럼 보였다.
경찰서에 들어가 푸른 제복을 입은 경찰관 앞에 앉자 그 진실은 더욱 강렬해졌다. 형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낮은 음성, 더 굵은 팔목, 더 큰 어깨를 지니고 있었다. 유내춘은 아들의 코밑에 푸르스름하게 돋아나는 수염을 보며, 또 수염이 움직이며 얇고 붉은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경찰관의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해 가는 아들을 보며 정말로 이 덩치 큰 사내를 아내가 잉태했는지, 그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내인지, 말도 제대로 못하던 때에 자신에게 두 팔을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오던 그 아기였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아이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아내는 침대 위에서 말했다.
“아이들은 당신이 자신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그랬을지도 모르지.”
유내춘은 인정해야 했다.
“나는 늘 바빴어. 내 인생을 살면서 한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 당신도 알겠지만 우리는 그런 시대에 태어났으니까. 전진 말야. 앞으로 달려나가는 도덕만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도덕이었지.”
“바로 그거예요.”
아내는 말했다.
“당신이 아이들에게 애정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애들은 충분치 않은 거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충고를 듣는다는 것을 애들은 용납할 수 없구요. 난 당신이 그 애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꾸짖고 충고하는 것보다 아주 조용히 이번 일을 처리했으면 해요. 그애들의 상처를 소리없이 감싸주는 거요. 때로는 지혜가 필요한 거예요.”
“때로는 지혜가 필요해.”
유내춘은 아내의 말을 머리에 새겨 넣기라도 할 것처럼 뒷부분을 반복했다.
유내춘은 밥그릇과 수저를 설거지통에 담근다.
응접실에 돌아온 그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 다탁 위에 올려둔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그리고 벽시계를 본다. 정오가 되려면 아직도 사십 분이 더 남아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내춘은 신문을 접고 소파에 눕듯이 기대어 눈을 감아본다. 벽시계의 초침이 옮아가는 소리, 냉장고 소리, 겨울 새소리, 베란다 유리문이 조금씩 덜커덩대는 소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는 그를 닮은 십대의 아들이 오토바이의 굉음과 함께 수많은 거리의 군중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본다. 그는 딸이 그가 알지 못하는 사내들의 밑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의 입술은 점점 창백해지고, 이윽고 그녀는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병원의 하얀 복도를 아내와 손을 맞잡고 걸어간다. 유내춘은 두 모녀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유내춘의 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아들의 오토바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병원의 복도로 질주해 들어오고, 자신의 가슴으로 질주해 들어오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벽에 충돌한다. 오토바이의 앞바퀴에서 무엇인가가 폭죽처럼 치솟아오른다.
유내춘은 삶 그 자체와 삶에 내재된 어떤 요소들 ― 그것이 희열이든, 불안이든, 조용함이든, 즐거움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 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잃고 살 만큼 충분히 바빴다! 이건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누가 인생을 되짚어볼 만큼 충분한 시간을 주었던가! 누가 나에게 안식을 주어본 적이 있던가!
게다가, 지금껏 아무런 문제가 없기도 했다. 형규는 여섯 살 때인가 옆집 아이를 계단에서 밀어뜨려 그 아이의 머리를 크게 다치게 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반 아이와 싸움을 벌여 상대편의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요즘은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을 집까지 불러들여 술을 마시고, 가끔 “난 이 세상을 폭발시켜 버릴 꺼야!”라는 등의 과격한 말들을 내뱉고는 한다. 하지만, 누가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구든 한 때는 삐거덕대고, 고함치고, 스텝이 맞지 않는 춤을 추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큰 문제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신문 속, TV 속, 그리고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상한 땅 위에서 폭발하고 있다. ― 그렇지 않겠는가? ― 유내춘은 자신 앞에 놓여진 ‘평범한’이라는 상황을 결코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유내춘은 눈을 뜬다. 그가 놓인 세계, 응접실은 갑자기 고요해진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응접실의 유리벽 앞으로 다가갔다. 파스텔 빛의 유리벽 때문에 그 너머의 세상은 물 속에라도 잠긴 듯 무겁고 적막하다.
요즘은 아버지가 문득문득 생각나곤 한다. 기억의 저편에서, 홀쭉한 볼에 키 작은 이 사내는 수없이 많은 의문부호들을 이끌고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때마다 그는 그 노인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에 놀라고는 한다. 그의 뒤편에 놓인 의문부호들 속에 무엇이 간직되어 있는지, 그것들을 해부해보려고 노력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아니, 몇 번인가 그것들 속에 머리를 디밀고 투신해 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짧은 순간이었고, 이제 그는 그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그 노인을 아버지 자체로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뭐라고 할까, 약간의 증오와 저항과 혐오가 섞여 있었다고나 할까? ― 하지만 왜? 유내춘은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 하긴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이해하는데 무슨 이유가 일일이 필요하겠는가? 그는 아버지였고, 아버지란 아들에게 조금씩 억압의 대상이 아니던가. 어쨌든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침묵했고, 점잖았고, 조용히 움직였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유내춘을 자극하는 그 무엇이었다는 것을 그 노인은 알고 있었을까?
유내춘은 소파로 되돌아와 힘없이 걸터앉는다. 그리고, 그는 서른 살의 무더운 여름을 생각해본다. 그 때 아버지 유봉길은 술에 꽤 취해 있었다. 그는 우산도 없이 소낙비에 흠뻑 젖어서, 유내춘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겨우 소파에 몸을 뉘었다. 밖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고 응접실은 불도 켜지 않은 터라 번개가 실내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유봉길의 작은 몸은 푸른빛을 띠며 반짝였다. 그는 아들이 빗물에 젖은 옷을 벗겨낼 동안 어둠에 묻혀 반쯤은 퍼렇고 반쯤은 회색빛을 띤 얼굴로 광기와 우울로 짓눌려 버린 한국의 역사 한 조각, 그리고 그 안의 불안한 한 젊은 군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때는 모두가 미쳐 있었다. 난 겁이 났었어.” 그때 유내춘은 아버지가 한때 탈영병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난 도망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왜 그 이야기를 서른이 다 된 아들에게 해야 했는지, 왜 탈영병이어야 했는지, 도대체 자식이 무엇을 해주길 바랐는지, 이 모든 것들을 비밀에 붙여둔 채 싸늘히 죽어갔다.
빌어먹을! 의문은 수십 개나 되면서 어떻게, 지금, 그 답으로 안내하는 이야기는 단 하나 뿐이냐?
유내춘은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려 하지만, 도저히 기억해낼 수가 없다. 무거운 해머로 얻어맞은 듯 의식은 정지해 버리고, 머리는 텅 빈다. 그는 응접실 한귀퉁이에 있는 찬장으로 다가가 그 안에서 유리컵 하나와 진토닉 한 병을 꺼냈다.
이제 그는 언젠가 화장실에 갈 요량으로 침실에서 빠져나왔을 때, 불도 켜지 않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양주 한 병을 안주 없이 마시고 있던 형규를 생각한다. 도대체 녀석은 그 새벽에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던가? 파란 달빛에 젖어 파스텔 빛 유리벽 너머의 어두운 세상을 응시하고 있던 그에게 유내춘은 한마디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는 화장실에 들른 다음 다시 침대 속으로 조용히 파고 들어갔다. 그 때 장남인 형규가 자신의 발소리를 눈치챘는지 어쨌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유내춘은 진토닉을 입술에 적셔 한번 핥고는, 오디오 세트 앞으로 갔다. 그는 들을 만한 음악이 있는지 어떤지 보려고, 오디오 세트 옆에 차곡차곡 쌓여진 CD들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가 알고 있는 음악은 클래식이건 대중가요이건 아무 것도 없다. 이 모든 것이 몇십 년 동안 앞으로만 달려온 삶이라니! 그는 씁쓸해진다. 그는 흑인들 다섯 명이 비석 옆에 둘러서서 팔짱을 낀 채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앨범 하나를 끄집어내어 오디오 속에 밀어 넣어본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그는 술잔을 들고 침실로 걸어간다. 토니! 토니! 워ㅋ! 워ㅋ! 그가 침실문 앞에 이르렀을 때 오디오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터져나온다. 송아지만한 토끼가 껑충껑충 뛰어대는 듯한 음악이었다. ‘토니! 토니! 워ㅋ! 워ㅋ!’ 유내춘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러운 존재가 눈앞에 서 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이를 드러내고, 입을 크게 벌려 그 부분을 따라한다. 그리고 문고리를 부여잡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오디오의 스피커를 지켜본다. 그러자 모든 것들이, 스피커, 스피커 위에 놓인 화분, 화분 위의 열대식물, 그 옆에 놓인 장식대와 장식대 위에 놓인 밀랍인형들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그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의 물건들처럼 보여진다.
그는 손에 든 술잔 속의 술을 완전히 비우고 다시 찬장 앞으로 간다. 그는 거기에서 술을 몇 잔 더 마시고, 술잔을 찬장 위에 올려두고, 술병을 손에 쥔다.
토니! 토니! 워ㅋ! 워ㅋ! 음악은 계속된다.
그는 계단을 타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그는 계단 끝에 이르러, 제자리에 선 채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난간을 짚어본다. 난간의 차가운 감촉이 가슴까지 전해진다. 그의 아버지 역시 십 년 전의 어느 날인가에 그렇게 했다. 그때는 휴일이었고, 유내춘은 회사일로 아주 바빴었다. 그는 양복 상의를 입으며 아내가 준비해 둔 토스트를 입에 물고 응접실을 가로질러 가다가 난간에 지금처럼 서 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 아, 그 때 나는 아버지의 눈동자 속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 무슨 이유에선지, 그 짧은 순간의 대면은 큰 의미를 지닌 사건처럼 그의 뇌리에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유내춘은 이제 그 때보다 훨씬 값비싼 소파들과 다탁과 양탄자, 장식품들과 가구들로 가득 찬 응접실을, 그 위로 흑인들의 랩 음악이 흐르고 있는 응접실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잠시 후, 십 년 전의 유내춘은 토스트를 입에 물고 응접실을 허겁지겁 가로질러 가다가 자신을 올려다본다. 둘은 눈이 마주치고, 수많은 감정들, 혐오와 분노, 슬픔과 안타까움이 눈동자를 흔들고, 유내춘은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는 턱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서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이층의 복도를 향해 걸어간다. 왼쪽은 형규의 방이고, 오른쪽은 미영의 방이다. 그는 형규의 방문 앞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그 방의 주인인 형규가 아내와 함께 놀이공원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에 기대어 노크를 해본다. 아무도 응답해 오지 않는다.
그는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침대에 엎드린다. 그리고 침대 위에 널린 물방울무늬의 이불을 쓰다듬으며 히야- 히야- 하고 의미 없는 소리를 내뱉어본다. 그는 일어선다. 그는 방안을 한바퀴 돌고 조립식 완구제품, 마우스와 코카콜라 캔과 재떨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뒹굴고 있는 책상 앞에 앉는다. 그는 지금의 자신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아들을 떠올려 보고 그의 의식을 이해해 보려 하지만 그것은 붙잡히지 않는다. 그는 다시 일어선다.
“아버지들은 절대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
언젠가 형규는 방 안에서 소리치듯 그렇게 말했었다.
유내춘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옷장 앞으로 간다. 그는 옷장 문을 열어보고, 한동안 한 손으로 옷장의 문고리를 잡은 채 마치 그 안에 아들에 관한 모든 비밀이 간직되어 있고 자신은 지금 막 그 비밀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눈빛으로 그 안을 들여다본다. 봉에 걸려 있는 옷들은, 그 나프탈렌 냄새가 풀풀 나는 아들의 껍질들은, 적어도 자신의 껍질보다 한 배 반은 더 커 보인다. 유내춘 역시 이십대 초반에 그의 아버지인 유봉길보다 더 큰 몸집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옷 속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이 들이켜본다. 그리고 그 중에 상의 하나를 꺼내어 자신의 상체에 대어보고는 책상 정면에 걸린 전신 거울 앞에 선다. 커다란 옷 위에 그의 얼굴은 붉고 작은 돌부리처럼 솟아있다. 유내춘은 술을 한 모금 깊이 들이키고 병을 손에 든 채 아들의 옷을 운동복 위에 덧입어본다. 잠깐 동안 그는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
거울 앞의 그는 배가 불룩하고 팔이 굵은 두꺼비 같다. 그는 좀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갈색바지를 꺼내어 덧입는다. 그리고 다시 거울 앞에 선다. 그러고 있자니 어쩐지 자신이 다른 사람의 가죽 밑에서 숨쉬고 있는 듯 하다. 알코올 때문에 감각은 이미 둔해져 있었다. 그는 길다란 바지를 질질 끌며, 술 때문에 헝클어지는 걸음을 애써 가누며 비디오 플레이어가 놓여 있는 수납장으로 다가간다. 그는 서랍을 뒤져본다. 그는 손잡이에 K-60이라고 새겨진 모형 권총 하나를 발견한다.
“이걸 볼래?”
언젠가 형규는 복도에 서서 그의 여동생에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눈앞에서 그것을 잠시 흔들어 보인 다음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었다.
유내춘은 술병을 입에 문 채 총기를 관자놀이에 대어본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다음 방아쇠를 당긴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길고 하얀 총성이 그의 뇌 속을 파고든다. 무엇인가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는다. 그는 총을 바닥에 내던지고 술을 한 모금 들이킨 다음 다시 미친 듯이 서랍을 뒤진다. 잠시 후, 그는 서랍 안에서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건져올렸다. 그는 그걸 비디오 플레이어에 집어넣는다. 그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브라운관에 영상이 솟아오르는 동안 잠깐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의 그는 형편없이 취해 있다. 비디오 플레이어가 돌아가고…… 브라운관 위에서는 총소리가 작열한다. 낯선 얼굴의 배우들이 브라운관 위로 나타나고, 브라운관 밖으로 사라진다. 그들은 카메라에 담긴 풍경 속을 떠돌며 그 풍경들 위로 수백 개의 총탄을 날린다. 그들의 총은 울부짖는다.
유봉길이 그가 보아온 풍경 ― 그것이 1950년대의 거리든, 살인현장이든, 전쟁이든 간에 ― 에 대해 침묵했듯이 그의 아들인 형규 역시 자신의 세계 ― 브라운관의 세계와 이 좁은 방안의 풍경,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돌며 보아온 모든 풍경들 ― 에 대해 침묵했다.
유내춘은 비디오의 볼륨을 최대로 올려놓고 욕실로 간다. 등뒤에서는 경쾌하고 급박한 총소리들이 흐느껴 우는 듯한 바이올린 선율 위로 날아다닌다. 그는 욕실 문을 열고,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트랩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변기에 얼굴을 묻고, 미친 듯이 구토를 했다.
“아버지 서운한 게 있으면 말을 해봐요.”
유내춘은 언젠가 베란다에 안락의자를 내놓고 가을 햇살을 쬐고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잖아요.”
“언제나 너는 내 아들이지.”
늙고 몸집이 작아진 아버지는 말했다.
“그럼 말씀해 보세요. 제가 변했나요?” 유내춘은 물었다.
“아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너도 알게 될 게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아버지는 말했다.
유내춘은 변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술을 거의 다 들이키고 일어선다. 그는 잠깐 비틀거린다.
그는 뒤뚱거리면서 미영의 방으로 간다. 그는 힘없이 문에 기대어 피식 웃으며 좀전처럼 노크를 한다. 문이 열려진 형규의 방에서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복도로 떠밀려온다.
“나는 이 세상이 제정신인 걸 한번도 본적이 없단다. 언제나 미쳐 있었지. 나는 몸통을 잃은 채 시장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를 너무도 많이 보았다. 그 때 나는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지. 그 도시는 비행기의 엔진소리와 사이렌과 연기와 화약 냄새, 부상자들의 비명으로 뒤덮여 있었단다. 내 친구가 그러더구나. 곧 전쟁이 끝날 거고, 그러면 다시 이 땅위에도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그 친구 말로는 모든 게 잠잠해진다는 거야. 나는 믿지 않았다. 왠지 너무 쉬워보였지. 그리고 그 때 그 친구의 말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 한 번도 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단다. 이 땅 위의 광기는 마치 유령처럼 번져 있고 이 땅 위의 그 어떤 세대도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어. 그건 끊임없이 옮겨다니고,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는 거야.”
유봉길은 지금의 유내춘처럼 술에 취한 정신으로 자신의 탈영병 시절의 이야기와 함께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유내춘은 술병에 담긴 술을 전부 들이켜고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힌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젖힌 다음 뒤뜰의 울타리 너머, 오래 전에 추수가 끝나고 이제는 하얀 눈만이 뒤덮여 있는 넓은 들판 위로 술병을 내던졌다. 그것은 점이 되어 어딘가로 처박힌다. 그는 마치 술병의 포물선 너머로 의미 있는 어떤 기호들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 양 그것을 지켜본다.
그는 이제 침대로 기어올라가 양팔을 벌린 채 그 위에서 힘차게 뛰어 올라본다. 미영이 어렸을 적에, 그녀는 그렇게 했었다. 지금은 늦둥이인 동성이가 그렇게 한다. 유내춘 역시 아주 어린 시절에 감나무의 길고 굵은 가지 끝에서 그렇게 뛰어 올랐었다. 유봉길이 그랬던 것을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제 유내춘은 그가 모르는 장소, 그가 전혀 알 수 없는 어느 시간에서는 그 역시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발을 헛딛고 침대에서 떨어져 내린다. 다시 일어서려고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발목이 시큰거린다. 그는 방 한가운데에 벌렁 드러눕는다. 눈이 감겨오고, 팔과 다리가 나른해지고, 천장에서는 작고 알록달록한 빛깔의 코알라 모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유내춘은 두 팔을 디뎌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을 질질 끌며 화장대 앞에 걸터앉는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아, 그 곳에는 그가 전혀 상상해 보지 못한 늙은이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는 젊은 시절에 이 모습을 추측했었던가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해본다. ― 가 자신을 맞바라보고 있다. 거울 속의 늙은이는 낯설어지고, 유내춘은 한순간 그 늙은이의 과거와 버릇과 목소리를 기억해낼 수가 없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본다. 그러자 주름들이 꼬무락거리며 그 얼굴 위로 미영의 얼굴이 겹쳐진다.
“아버지들은 우리들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해!”
언젠가 그녀 역시 형규처럼 말했고, 유내춘은 복도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또 말했다.
“그들은 마치 성난 말처럼 질주에만 신경 쓸 뿐이야!”
유내춘은 화장대 위에 올려진 칼라 헤어스프레이 한 통을 들어올려 언젠가 미영이 그렇게 했듯이 머리에 대고 뿌려본다. 녹색의 입자들이 그의 이마까지 적셔놓는다.
그는 다른 색의 헤어스프레이를 뒤통수에 뿌려본다. 그것은 아들의 상의에 길다란 황색의 무늬를 남긴다.
유내춘은 일어나 딸의 옷장을 열어본다. 딸의 옷 역시 아내의 옷보다 커보였다. 이건 믿을 수가 없다! 이 녀석들은 얼마만큼 커질 생각이지? 유내춘은 이제 몸집이 점점 커져 가는 손자, 그 손자의 손자, 그 손자의 손자들을 상상해본다. 그 거인족들은 얼마나 가소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 볼 것인가? 그 킹콩처럼 커진 후손들은 빌딩 사이로, 콜타르 길 위로, 장난감 같은 자동차 사이로 뛰어다니는 자신에 대해, 그들의 몇천 년 전의 선조들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인가?
“그 난쟁이들은 모두가 미쳐 있었어!”
유내춘은 딸의 원피스를 꺼내어 억지로 입어본다. 앞가슴에 달린 단추가 뜯기고, 스커트 옆에 달린 지퍼는 닫히질 않는다. 그는 딸의 겉옷 위로 딸의 브레지어와 속옷을 당겨 입었다. 무엇인가가 몸을 죄여오고, 그는 낄낄거린다.
“아버지들은 여자에 대해 무지해! 난 그걸 알아! 그들은 언제나 우리들을 기웃거릴 뿐이야. 그들은 정면에서 우리를 바라보지 못한다고.”
유내춘은 딸의 방에 놓인 오디오에 CD를 한 장 집어넣고 음악이 나오기도 전에 왈츠를 추어댄다. 그는 왈츠를 춤 교습소에 다니던 아내에게서 처음 배웠었다. 그건 3년 전이다.
“이건 둘이 추는 춤이에요. 당신처럼 혼자서 제멋대로 움직였다가는 전혀 맞질 않는다구요. 그렇게 격하게 움직이지 말고 천천히 움직여봐요.”
침실에서 아내는 말했었다.
“이것 봐. 난 피곤해. 회사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도대체 이걸 언제 써먹을 수 있겠어?”
그는 말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불편한 다리로 혼자서 왈츠를 춘다. 뒤늦게 흘러나오는 음악은 왈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음은 너무 빠르고, 너무 강하고, 너무 격렬했다. 유내춘은 왈츠인지 아니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민속춤인지도 모를 춤을 춰대며 딸의 방에서 밀려나와 복도로 나섰다. 머리 위로 무엇인가가 빙빙 돌아댄다. 그는 복도를 쿵쾅거리며, 한발로 껑충껑충 뛰다시피 해서 계단참까지 갔다.
쇼핑백을 양손에 든 아내, 아내의 치맛자락을 쥐고 서 있는 동성이, 그 옆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훌쩍 커버린 두 자식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늙은 바우가 으르렁댄다.
유내춘은 계단의 난간을 잡고 십여 년 전의 어느 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내려다본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내는 비명을 지르듯 묻는다. 응접실에서는 토니! 토니! 고! 고! 하는 흑인 음악이 날아다닌다. 그것은 털이 지저분한 까마귀떼 같다.
“아무 일도 없었어.”
유내춘은 혀 꼬인 소리로 울부짖듯이 말한다.
“아무 일도!”
그는 엉기적거리며 계단을 내려온다. 무엇인가가 그의 발목을 당기고, 그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바우와 훌쩍 커버린 두 아이가 그에게 달려든다. 바우가 딸의 속옷을 물어뜯으며 잡아당긴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딸이 고함치듯이 물었다. 그것은 수만 마리의 벌떼처럼 그의 귓속을 파고든다.
“피를 흘리고 있어! 엄마, 아빠가 피를 흘려요.”
딸이 외친다.
“우리가 없는 동안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아내가 외친다.
“누가 당신을 이꼴로 만들었냐구요?”
“누가?”
유내춘은 두 아이에게 질질 끌려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구냐고?
“어머니 진정해요. 아버지는 좀 취하셨을 뿐이에요.”
형규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한다.
“취하지 않았어. 이 멀대 같은 녀석아. 취하지 않았다구.”
유내춘은 말했다.
“아버지는 취하셨어요.”
형규는 유내춘을 소파에 밀어 앉히며 말한다.
“그래, 실컷 봐둬라. 지금은 너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되겠지? 아마 그럴 꺼야. 하지만, 잘 봐둬. 너도 언젠가는 정말 네 일상이 조금 흐트러지는 언젠가는 너도 주체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너를 덮쳐버릴 테니까.”
“그게 뭔 데요?”
아내는 팔짱을 낀 채 유내춘을 쏘아보며 화난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이 이럴 만큼 가치가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어. 정말 몰라. 하지만, 너무 많고 너무 강해.”
유내춘은 눈을 뜨지 못한 채 말한다. 강력한 무엇인가가 소파의 등받이에서 그를 잡아당긴다. 그는 깊은 물 속에라도 잠긴 듯 두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다.
응접실의 한귀퉁이에서는 흑인들의 음악이 끝없이 터져나오고, 네 명의 가족은 유내춘을 포위하듯 둘러서서 그를 내려다본다. 늙은 개 바우는 으르렁거리다가 큰 소리로 짖어대는 걸 반복한다.




이재웅1974년 정읍 출생. 2001년 실천문학 가을호 '젊은 자식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망쳐놓는가?'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