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퇴부




이기호




우리가 태어나 자란 곳은 강원도 원주시다. 제1야전군 사령부와 군수지원 사령부, 제36사단 사령부, 제11통신여단 사령부와 주한미군 부대인 캠프 롱, 캠프 이글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곳. 그렇지 않아도 분지라서 더운데 시퍼렇게 팔팔한 청춘들마저 자신들의 얽매인 처지를 비관해 매일 시도때도 없이 고함을 질러대는 통에, 그 열기마저 뒤섞여 버려 더더욱 후텁지근한 곳. 우리는 그 도시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또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같은 교회 성가대에 앉아 주님께서 내려주신 실로암을 꽥꽥거리며 되돌려드린 적도 있었다. 우리는 모두 네 명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돌아다닌 남자 둘, 여자 둘. 나와 재덕이, 승희, 그리고 형자.
스무 살 무렵, 학력고사 점수보다 당구 점수 높은 것이 더 남자답고 터프한 모습이라 여겼던 나와 재덕이는, 결국 고등학교가 최종 학력인 백수가 되었고, 남들하는 것만큼 공부했지만 성적이 영 시원치 않았던 형자와 승희 역시 고졸 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시간은 많았고 두 다리도 탄탄했지만, 우리는 원주라는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원주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그건 친구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마음에 쏙 들어 어울렸다기보단, 그냥 어느 날 옆에 보니 그들이 있었고, 굳이 다른 친구들을 찾아보기도 귀찮고 해서 만나는, 그런 사이였다. 요컨대 만나면 <무조건 즐겁기만 해야> 할 것 같은 친구들. 너무 오래된 친구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스물두 살의 여름이었다. 남들 다하는 것처럼 6인용 텐트 하나 둘러메고 근교 개천으로 1박 2일 피서를 떠났다. 아마 봉평 근처 어디였을 것이다. 그 해 첫 피서였기 때문에 우리는 제법 들떠 있었다. 서로서로 정겹게 담뱃불도 '땡겨' 주었고, 형자의 떨어진 샌들 끈 하나를 보고도 강가를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웃어댔다.
밤이 되자, 우리는 피서 떠나면 만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으레 꼭 하는 짓―모닥불 피워놓고 개와 인간의 아슬아슬한 경계지점까지 술 퍼마시기―을 했다. 별도 많았고, 개구리도 많았고, 우리의 술주정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나? 우리가 고등학생일 적, 우리 사이가 그리 지리멸렬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숨어 담배를 피우며 이런 이야기들을 했었다.
― 우리 엄마 아빠 이혼할지도 몰라
― 너희 학교 전교조 선생이 몇 명이야?
― 당구치게 돈 좀 꿔 달라니까.
하지만 십대 때 나눈 대화를 스무 살 넘도록 연장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남녀가 십 년 이상 친구 사이를 유지하려면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서로 지루해하지 않고 그나마 남아있는 우정이라도 지킬 수 있다고. 특별한 무언가, 말하자면 그날 밤 승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해바라기 같은 것.
― 삼만 원이 아까워서 그런 거야…. 그냥은 오만 원이고, 해바라긴 팔만 원이거든.
승희 말의 요점은 간단했다. 그즈음 사귀던 남자아이가 포경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승희는 이왕 하는 거 돈 좀 보태서 표피를 그냥 잘라내지 말고 둘둘 말아 꿰매는 속칭 <해바라기>를 해라, 덕분에 나도 천당 좀 들락거려 보자, 그러자 애인이 일주일째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 얼굴 보는 우리로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고민이었다. 이런 게 우리의 특별한 무언가였으며, 우리 우정의 실체였다. 재덕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녀가 차마 얼굴 맞대고 말할 수 없는 '야사시' 한 거.
― 해바라기를 하면 뭐가 좋은데?
형자가 승희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미안, 우리라는 말에서 형자는 빼자. 형자는 우리 중 유일하게 경험 없는 친구였으니. 형자가 경험 없는 이유는…… 글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얼굴 때문일 것이다. 형자는 박색이었다. 작은 눈과 개미 한 마리 집으로 쓰기에도 너무 비좁고 비 들이친다고 아우성칠 게 뻔한 콧구멍, 있으나마나 한 콧대, 작고 지나치게 얇은 입술과 눈 밑의 자잘한 주근깨들까지……. 엉망으로 취한 남자이거나 눈이 지나치게 나쁜 남자가 아니고서야 그녀의 배 위에 올라타려면 적잖은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얼굴 가릴 신문지 한 장을 늘 상비하고 다니는 남자, 혹은 성직자의 품성을 지닌 사내이든지.
― 너, 해바라기 씨 먹어 봤지? 그게 고소하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야.
우리는 언제나 형자에게 조금 부풀려 말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이해 못하는 부분이 우리에겐 또 다른 즐거움이었으니까. 그녀는 그런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늘 그 작은 눈과 작은 입술을 한껏 벌려 놀란 표정을 짓다가 결국에는 혼자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곤 했다. 사실, 나는 그런 형자가 부담스러웠다. 함께 시내를 걸어다닐 때마다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는 그녀가 창피했고, 간만에 찾아간 나이트에서 블루스를 추자고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끄는 그녀가 거북스러웠다. 그럼 그녀를 왜 만나냐고 묻겠지. 글쎄…… 그건 아마도 전적으로 형자의 노력 때문일 것이다. 우리 네 명이 모일 장소와 시간을 정해 일일이 전화해 주는 것도 형자였고, 생일날 조금 낯간지러운 자필 엽서를 보내주며 축하해 주는 것도 그녀였다(다른 친구들은… 차라리 말을 말자). 심지어 그녀는,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부모님의 생일까지 기록해 두었다가 일러 주어 화를 모면케 해 주기도 했다(그러나 정작 자신의 부모님이 이혼했을 땐, 아무런 내색 없이 우리 모두를 치킨호프집에 데려가 억병으로 취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창피하다는 이유만으로 만나지 않을 순 없었다. 그건 누이동생이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리 밑에 갖다 버리는 비정한 오라버니와 진배없는 행위였다. 좀 창피하지만 불편하지 않으면 그뿐. 대화에 끼이지 못하면 또 어떤가. 나름대로 우리 모두 그런 대화에 익숙한 것을. 그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장담할 순 없지만, 그래도.
그날 밤, 작은 사고가 일어난 곳은 6인용 텐트 안에서였다. 친구들 중 가장 술이 약한 내가 텐트 안에 누운 것은 새벽 2시 무렵, 아이들은 여전히 개천 옆 모닥불 주위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삼십 분이나 지났을까, 정체모를 압박감에 나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았다, 내 바지를 벗겨내려 애쓰고 있는 술 취한 형자를. 눈도 작고, 코도 작고, 주근깨투성이인 형자를.
― 너, 너, 뭐, 뭐하는 거야?
나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형자가 재빠르게 내 배 위에 올라타는 바람에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내 혁대는 이미 풀어헤쳐진 상태였고, 지퍼도 이미 반 넘게 내려와 있었다. 술이 확 깨버렸다. 잠도 다 달아났다. 형자는 히쭉히쭉 웃다가 고개를 수그리고, 다시 웃다가 수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내 눈을 보며 말했다.
― 나, 한 번만 줘라…….
형자의 목소리는 꽤나 슬프게 들렸다. 그게 술기운 탓이었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건 그저 장난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완력으로 형자를 내 배 위에서 간신히 밀어냈다. 형자가 몇 번인가 다시 올라타려 했지만, 무리였다.
― 친구끼린 배 위에 올라타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나는 황급히 텐트 밖으로 나오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모닥불 주위로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좀 전의 상황에 대해 승희와 재덕이에게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해 버려야, 그건 그저 장난이 되어 버려야, 우리 사이가 변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재덕이와 승희는 또 한 번 자갈밭을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형자가 급하긴 급했나 보다,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냥 한 번 주지 그랬냐, 그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네가 들어가서 육보시해라……. 정말, 말해 버리니 장난이 되고 말았다. 내 마음도 한결 홀가분해졌다. 우리는 눈물까지 글썽거려 가며 웃고 또 웃었다. 별로 심각하거나 안쓰러운 마음 없이. 우린 스물두 살이었으니까……. 형자는 그대로 잠들었는지 텐트 안은 잠잠하기만 했다.
그게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7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별로 없었다. 결혼한 친구도 없었고, 실수로 애를 낳은 친구도 없었다. 스톡옵션을 받은 친구도 없었고, 구속된 친구도, 원주를 떠난 친구도 없었다. 우리는 다 고만고만한 직장에서 고만고만한 월급을 받으며 고만고만한 애인과 고만고만하게 부대끼며 살아갔다.
미안, 우리라는 말에서 또 한 번 형자를 제외시키자. 형자는 그 고만고만한 애인마저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스물아홉이나 먹었지만 여전히 <보건소처녀>였다. 형자는 여전히 우리가 나누는 과장된 대화를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들으며 감탄하고 쑥스러워했다. 그러다 때때로 자신의 허전한 옆구리를 의식하곤 엉엉 울기도 했다. 우리의 과장은 여전히 즐거웠으나, 가끔씩 그녀의 나이가 떠올라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잠깐, 아주 잠깐씩 말이다.
그런 형자가 자신의 애인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을 때, 우린 진정 제 일처럼 축하해 주었다. 무엇보다 그가 어떻게 생긴 남자인지 궁금해했다. 우리는 약속장소인 치킨호프집에 십 분이나 일찍 나와 서로서로 정겹게 담배를 물려주며 떠들어댔다. 지나치게 눈이 나쁜 친구일 수도 있어, 아니면 파계한 성직자이거나. 우리는 낄낄댔다. 승희가 잠깐 걱정을 하기도 했다. 혹, 유부남이면 어쩌지……? 하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그게 뭔 상관이람. 어쨌든 중요한 건 형자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재덕이가 형자에게 물었다. 너, 애인 생기면 제일 먼저 어딜 데려가고 싶어? 형자는 조금 주저하다가 슬쩍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여관. 우리는 얼굴이 무릎에 다다를 정도로 허리 꺾고 웃어댔다. 우리가 가르치긴 제대로 가르쳤네. 우리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저마다 형자의 애인에게 건넬 첫 인사말을 해 보기도 했다. 나는 <복 많이 받으실 겁니다>로 정했다.
그러나 형자가 팔짱을 낀 채 데려온 남자를 본 순간, 우리는 그 어떤 인사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우리는 모두 영어에 약했으니까. 형자가 데려온 남자는, 놀랍게도 흑인이었다. 흑인처럼 생긴 사람이 아닌, 진짜 흑인. 갓 뽑아올린 석유처럼 새까맣고 번들거리는 피부를 가진 흑인.
― 인사들 해. 윌이야, 윌 워렌 릭키. 그냥 편하게 윌이라고 부르면 돼.
윌 워렌 릭키. 미합중국 시민이자 주한미군 예하 캠프 이글 소속의 육군 중사 윌 워렌 릭키. 그는 우리에게 '하이' 하며 정겹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도 엉겁결에 건전지 다된 자명종처럼 작은 목소리로 '하이' 했다. 일 미터 팔십 센티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키와 짧은 헤어스타일 때문에 더더욱 뾰족해 보이는 정수리, 어울리지도 않게 기른 콧수염, 그리고 검은 피부 탓에 더더욱 커 보이는 눈. 팬티 한 장 입혀 놓고 창 한 자루 들려주면 곧바로 <동물의 왕국>이 될 것 같은 사나이. 그 사나이가 우리와 채 일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있었다. 어디선가 낯설고 역한 냄새가 났다.
지나치게 눈이 나쁜 사람이거나 성직자의 품성이 아니라면……. 거기에 빠진 가정 하나,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가정을 빼먹은 것이다.
솔직히 나는 조금 놀랐다. 승희와 재덕이는 앞다투어 각자의 담배를 물어댔다. 나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생맥주를 반 넘게 비워버렸다. 그러고도 목이 말라 다시 맥주잔을 들자 윌이 자신의 잔을 부딪치려 했다. 나는 잔을 그냥 내려놓았다. 윌은 어깨 한 번 들썩이는 제스처를 짓고는 머쓱하니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팔뚝에는 독수리 같기도 하고 매 같기도 한 문신이 있었다. 그 문신을 본 재덕이가 귀엣말(그럴 필요없다 했음에도)로 까마귀 아니냐고 물어왔다. 나는 구관조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형자만 혼자 신이 나 있었다.
― 왜 있잖아, 중앙동에 새로 생긴 무슨무슨 클럽 말이야. 난 거기가 외국인 전용인 줄도 모르고 친구랑 들어갔었거든.
형자는 그 안에서 처음 윌을 만났단다. 윌은 형자를 보자마자(객관적으로 미모가 더 출중한 형자의 친구가 빤히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뷰티풀'을 연발, 형자를 말 그대로 '뻑'가게 만들었단다. 생애 처음, 타인에게서 외모에 관한 찬사를 듣기도 들었거니와 '뷰티풀' 이외의 말은 알아듣고 싶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형자에게 '뷰티풀'은 단순한 '뷰티풀'을 넘어선 '뷰티풀'이 되어 버렸단다.
― 좋아, 처음 만남은 그렇게 됐다고 쳐. 그 다음엔?
승희가 묻는 건, 그 다음엔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냐는 거다. 영어실력이라는 게 처녀무당 신내림 받듯 갑작스럽게 느는 게 아니라면.
― 웬만한 건 몸으로 다 돼. 정 안되면 이걸 쓰고.
형자는 가방에서 한영사전을 꺼내 들었다. 윌은 우리끼리의 이야기가 지루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체질이었는지, 치킨호프집에 댄스음악이 흘러나오자 허리를 앞뒤로 들썩거리며 보기에 따라선 아주 선정적일 수도 있는 춤을 추어대기 시작했다. 윌의 그런 모습은 우리가 어디선가 많이 본 것이었다. 그게 아마 포르노였지.
아무려나 윌과 형자는 행복해 보였다. 형자는 답답할 정도로 심하게 더듬더듬거리며, 또 때론 한영사전을 오랫동안 뒤적거리며 윌에게 말을 건넸으나, 윌은 인상 한 번 구기지 않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자의 몸짓을 자신의 몸짓으로 옮겨와 그녀가 무안해지는 경우가 없도록 배려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수긍하려 해도 수긍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인종이든, 민족이든, 혹은 문신이든……. 나는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인데, 재덕이와 승희는 그 이상이었나 보다. 승희가 물었다.
― 어쩔건데?
시선이 온통 윌에게 가 있던 형자가 목소리로만 되물었다.
― 뭘?
― 정말 쟤랑 사귈 거야?
그제서야 형자의 얼굴이 우리 쪽으로 향해졌다.
― 그러면 안 돼?
형자의 얼굴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근래 들어 형자의 그런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열여섯 번째 본 입사면접에서 떨어진 날에도 형자는 웃는 얼굴이었다.
― 설마 너, 벌써 잔 건 아니겠지?
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덕이도 승희를 거들고 나왔다.
―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너, 인순이 아줌마가 겪은 시련과 고통 알지?
그리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지만 재덕이 또한 나름대로 자신의 우정을 과시했다. 윌 또한 우리가 꽤 심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형자와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나는 형자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나 또한 그녀가 흑인과 사귀는 게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그러나 성질까지 내면서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상황 자체가 짜증났을 뿐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원.
형자가 말했다.
― 잘 거야.
― 미쳤구나, 너.
― 연인과 자는 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한 게 누군데?
― 이건 상황이 틀려.
― 어쨌든 내 상황이야.
형자는 단호했다. 윌이 형자에게 무어라고 빠르게 말했지만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재덕이 윌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그러나 표정은 웃으며) '넌, 새꺄, 입 다물어' 라고 말했다. 윌은 또 한 번 어깨를 들썩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형자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다가 화난 표정으로 윌의 손을 이끌고 일어났다. 그리곤 한마디 인사 없이 자리를 떴다. 윌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밝은 목소리로 '바이' 하면서 치킨호프집을 나갔다. 우리들 중 나 혼자만이 유일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바이.
윌과 형자가 나가자마자 승희는 거칠게 맥주잔을 움켜쥐었다.
― 미쳤어, 미쳤다구. 이쁘다는 말 한마디에 제정신을 잃은 거라구.
나는 승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나 재덕이보다 형자를 훨씬 더 이해하고 아끼는 친구였다. 하지만 형자의 말도 옳았다. 남자와 자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건 다름아닌 우리였다. 설사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말해 왔다. 재덕이가 그렇게 말하면 승희가 뒤따랐고, 승희가 침을 튀기면 나도 뒤질세라 혀를 놀렸다. 괜히 아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은밀한 것일수록 힘이 센 법이었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상처나 치욕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이 때론 상대방을 주눅들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승희와 재덕이도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많은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은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형자는 달랐다. 그녀는 왜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를 일부러 키우는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우리의 상처와 치욕에, 우리보다 더 상처받는 사람……. 그게 바로 형자였다.
재덕이가 웅얼거렸다.
― 흑인 게 얼마나 큰데…….
그럴까? 윌 것도 클까? 나는 골몰히 그것만 계속 생각하고 앉아있었다. 형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안쓰러움이나 근심 따위가 아닌.
나를 인정 없는 친구라 욕하지 마라.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승희와 재덕이가 저렇게 흥분하고 있지만, 결국 저들도 어쩔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 오랜 세월 형자를 보아 왔기에 잠시 그녀가 서 있는 위치와 바탕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혹은 그녀에 대한 예의였거나……. 그리고 한 가지 더. 스물아홉 살에 난생 처음 '뷰티풀'이라는 찬사를 들은 여자의 마음을, 그 심중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아무도 없다는 것 또한.
그건 그렇고, 흑인은 정말 그것도 그렇게 검을까? 나는 자꾸 그런 생각만 하고 앉아 있었다.

형자의 느닷없는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졸린 눈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1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 잤어?
형자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우울했다. 술기운도 조금 묻어 있었다. 나는 아니, 라고 말하려다 그냥 그렇다고 해 버렸다. 상대가 우울하면 통화시간이 길어지기 십상이다. 암만 우스운 직장이지만 출근시간은 정해져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사업주가 어머니이고, 사업장이 이십 평 남짓한 식당이라도. 나의 어머니는 아들 보기를 도마 위에 놓인 생선대가리같이 아시는 분이었다. 새벽같이 셔터를 올리려면 전화를 끊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내가 몇 번 소리나게 하품을 해댔어도 형자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무언가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 고함지르듯 물었다.
― 너, 잤구나!
― 응…….
― 너, 너!
나는 이불 위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형자가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단지 승희와 재덕이에게 화가 나서 던진 말이려니 했던 것이 정말 홧김에 서방질한다, 로 이어진 것이었다. 눈앞에 윌의 모습이 그려졌다. 웃통을 벗어버린 윌의 상체가, 그리고 두 눈을 감고 있는 형자의 얼굴이. 방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어머니일 것이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다시 물었다.
― 정말 잔 거야?
형자의 대답은 변함없었다. 나는 좀 허탈했다. 내게 지난 수 년 동안 익숙해져 있던 것이 갑자기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잘 믿겨지지 않았다. 형자는, 늦은 밤 취해 혼자 집으로 걸어가도, 혹은 홀로 택시를 잡아도, 오히려 택시기사가 걱정되던, 그런 아이로 내게 남아 있었다. 물론, 나 또한 그녀가 남들처럼 남자를 만나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서운했다. 그냥, 내게 머물렀던 시간들이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어쩌면 은연중에 형자가 계속 그 상태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 안 아팠어?
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조금 애틋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니, 내 마음이 좀 그랬다. 상대가 한국사람이 아닌, 흑인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 근데…… 나, 좀 이상해…….
당연히 이상하지. 첫경험의 상대가 흑인이었으니. 승희가 윌과 잤어도 이상이 생길지 모를 마당에……. 나는 붉게 물든 침대보를 떠올렸다. 윌은 또 얼마나 흐뭇한 표정을 지었을까. 나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위로해 주었다.
― 처음엔 원래 다 그런 법이야.
―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안 돼…….
형자의 목소리는 위축되어 있었다.
― 뭐가?
― 그러니까… 허벅지가… 허벅지가 자석처럼 붙어서…… 서로 안 떨어져…… 다리가 말이야, 다리가…… 안 떨어진다고…….
― 허벅지가?
구부정하게 굽어있던 내 허리가 다시 무춤해졌다. 이건 또 뭔 말인가?
형자의 말에 의하면, 윌이 바지만 벗어도 마치 쥐가 난 것처럼 허벅지가 뻣뻣하게 굳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차렷 자세 마냥 두 허벅지가 서로 빈틈없이 붙은 채로. 여관방의 불을 꺼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했다. 윌의 성기가 몸에 슬쩍 스치기만 해도 형자의 허벅지는 바로 반응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내 입술에서,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게 뭔가?
― 윌이 가만 있어?
― 그 사람만 고생했지, 뭐….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픽,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등짝에 비실비실 땀을 흘리며 형자의 허벅지를 떼어놓으려 애썼을 윌이 자꾸만 떠올랐다. 형자의 전신은 온통 윌의 침으로 범벅이 되었을 테지…….
― 그래서 결국 못 했다는 거야?
― 응…….
나는 혹, 형자가 부끄러운 마음에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허벅지끼리 달라붙어 그 짓을 못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당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설사 달라붙었다고 해도 남자의 완력으로 그쯤 떼어내지 못할까, 더구나 상대는 근육 탄탄하고 힘 좋은 흑인이 아니던가. 이론적으론 아귀가 맞지 않는 말 같았다. 하지만 형자는 천성적으로 뭘 숨기는 걸 잘 못하는 아이였다. 우리에게 윌을 소개시켜 준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 윌이 다리를 벌리려 하면 너무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비명이 막 나오는 거야.
윌은 멈칫하다가 다시 시도하고, 움찔했다가 다시 노력하기를 반복했단다. 그러다 먼동이 터올랐단다.
― 윌은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막 미안하고, 그래서…… 뭐가 잘못된 걸까……?
― 네가 처녀란 말, 했어?
― 아니… 말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라서…….
형자는 윌이 오해할까봐, 혹 상대가 흑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열리지 않는 것으로 지레짐작할까봐, 걱정했단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그랬단다. 형자의 상황은 좀 안타까운 것이었지만…… 나는 흥미로워졌다. 형자는 역시 형자였다.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친구. 나는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네 몸에 이상이 있어 그런 건 아닐 거라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다시 이부자리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형자 생각을 했던가? 물론 그렇기도 했다. 하지만 막 안타깝고, 착잡하지만은 않았다. 자꾸만 차렷자세로 더블침대에 누워 있는 형자가 떠올랐고, 그 위에서 용을 쓰고 있는 흑인 병사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궤짝째 얼린 동태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는 허벅지와 그럴수록 더 후끈 달아올랐을 윌의 거대한 성기. 나는 형자의 허벅지가 앞으로도 그리 쉽게 떨어지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왜 고마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누운 채로 재덕이와 승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좀 전에 형자가 내게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전했다. 수화기를 부여잡고 나와 재덕이, 승희는 각자의 이부자리, 혹은 침대 위를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웃어댔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지만, 한 번 터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형자는 역시 좋은 친구였다. 이십 년 한결같은, 또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 같은.
그날 밤, 나는 형자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형자 꿈을 꾸었다. 형자는 인어가 되어서 나타났다. 아마, 인어 역사상 가장 못생긴 망둥어과 인어였을 것이다. 나는 꿈에서도 쉬지 않고 웃어댔다. 형자가 웃지마, 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형자는 엉엉 소리내어 울음을 터트렸고, 나는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우스워, 계속, 계속 웃어대기만 했다.

윌이 우리 관계에 등장한 이후, 우리는 별의별 일들을 다 겪게 되었다. 우리 스물아홉 해 동안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희한한 일과 말로만 듣던 사람. 그것은 한편으론 황당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흥미롭기도 했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지금 우리 앞에 앉아있는 의외의 복병 또한 그런 경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 그러니까 뭐야, 내가 윌을 꼬셔서 어떻게 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의외의 복병은 역시 복병답게 포위하듯 둘러앉은 우리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형자는 빠진 자리였다. 그녀가 곤란해질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의외의 복병은 다름 아닌, 형자의 여고 동창생이었다. 형자가 윌을 처음 만나던 날 함께 클럽에 동행했던 친구. 형자에 비해서야 미모는 출중했지만(누구라도 그러하지만), 턱도 길고, 매부리코인, 그저 그런 얼굴이었다. 대신 영어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뚜렷한 직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미군부대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싸구려 삼류 영화의 초벌 번역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했다. 형자 말에 의하면 의외의 복병이 처음부터 영어실력이 출중했던 것은 아니었단다. 몇 번의 입사시험에서 낙방한 이후 결심한 바 있어 영어공부에 전력투구했다는 것이다. 주한미군부대를 들락거리며 외국인만 보면 달려가 말을 걸어보려 애썼고, TV도 AFKN 채널만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의 영어실력이 어느 정도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 허망하게도 그녀의 나이는 이미 스물아홉이 되어 버렸단다. 세상엔 영어 잘하는 어린것들이 쌔고쌨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눈여겨보려 하지 않았단다. 그런 한국적 상황에 실망한 그녀의 현재 소망은, 지긋지긋한 이 나라를 떠 미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었기에 그녀는 더더욱 우리에게, 아니 형자에게 의외의 복병이 되어 버렸다. 승희의 추측에 의하면, 형자가 처음 윌을 만났던 클럽에 가게 된 것도 다 그녀의 의도였다는 것이다. 형자와 동행함으로써 자신의 미모를 한껏 더 과시하려는, 간사한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의외의 복병의 출현은 우리로 하여금 형자와 윌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신경쓰고 더 많이 안달하게끔 만든 계기가 되어 버렸다.
― 네가 윌을 따로 만나고 다니는 걸 본 사람이 있는데도?
우리가 살고 있는 소도시는 누가 누구의 팔짱을 끼고 시내 한 번 돌아다녀도 그 다음날 바로 임신 소문이 돌 정도로 작고 좁은 곳이었다. 의외의 복병은 우리 소도시의 습성을 너무 만만히 봤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도 모르고.
― 그래서?
의외의 복병은 한 발 물러섬 없었다. 당당하기까지 했다. 무언가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면서 자라온,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안할 것 같은 여자아이였다. 하긴 그러니 '깡다구' 좋게 윌의 팔짱을 끼고 시내 한복판을 웃으며 돌아다녔겠지.
형자의 허벅지가 문제를 일으킨 이후,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연애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녀의 처지가 안타까워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게 마음 편하고 우리 관계를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십대 때처럼 많이 싸우고,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아파하기엔 우린 이미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그냥 상관하기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흑인을 사귀든 과테말라 남자와 연애하든, 그래서 형자가 자신의 십수 년 '솔로' 처지를 울면서 하소연하지만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이었다.
둘의 연애가 진행되면서 우리를 가장 난감하게 했던 것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윌의 행동이었다. 시내를 걸어다닐 땐 팔짱을 끼거나 어깨에 손을 얹길 원했고, 카페에 들어가기만 하면 온갖 스킨십이 난무했다. 윌에게 한국적 상황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려 해도, 한국 여자가 흑인과 다정히 팔짱 낀 채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설득시키려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몸짓으로 얼마간의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설명하나. 검둥이 한 마리와 누렁이를 붙여 놓고 우르르 돌을 던지면 이해할까? 그러면 알까?
하지만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의외의 복병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아메리카를 꼭 가고 말겠다는 열의로 중무장된 듯 보였다. 새천년에, 이 무슨 5, 60년대적 상황이란 말인가. 도대체 세월이 흐르긴 흐른 건지, 우리들의 세월만 좌변기 속 물 마냥 고여 있는 건 아닌지.
가만히 지켜보던 재덕이가 나섰다.
―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윌은 형자의 애인이니까 네가 건들면 안 된다는 말이지. 형자가 널 얼마나 친한 친구라고 여기는데. 친구끼리 껌둥이 하나 두고 싸우면 쪽팔리잖아.
― 애인은 무슨…….
― 너도 형자가 윌을 처음 만나던 날 함께 있었다면서? 윌이 형자 보고 '뷰티풀, 뷰티풀' 한 거 몰라?
― '뷰리플'은 무슨……. 문맥을 따져 봐야지.
역시 의외의 복병이 발음하는 '뷰리플'은 우리들의 '뷰티풀'과는 차원이 틀렸다. 다급해지고 당황한 쪽은 재덕이었다. 재덕이의 억양이 한층 더 격앙되었다.
― 아니, 문맥이고 지랄이고, 왜 지금 잘 사귀고 있는 사람들 틈에 끼여서 고춧가루 뿌리냔 말이야!
― 걔네들, 아직 못 잤다면서?
의외의 복병의 말에 우리는 서로서로 바라보기만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긴 잤지만 잤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승희도 재덕이도 복병의 단검에 맞은 양 그저 그녀를 노려보기만 할 뿐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그런 우리들을 보며 의외의 복병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 하, 윌이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형자 만나거든 앞으로 많이 분발하라고 전해. 윌이 자꾸 접근해 오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의외의 복병은 그렇게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예상한 대로 강적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윌이 형자를 떠나게 된다면, 우린 늦은 밤 형자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느라 졸린 눈을 부벼야하는, 그런 피곤한 상황과 자주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밤마다 치킨호프집으로 끌려가 매일 똑같은 술주정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고 화장실에 쫓아가 그녀의 등을 두들겨주는 불상사가 다반사로 일어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답은 하나다. 형자와 윌이 자는 거. 이제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녀의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를 최대한 벌려주는 일뿐. 그게 우리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예의이자, 우정이었다.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허벅지를 벌리다니, 이 얼마나 눈물겹기 그지없는 일인가 말이다.

우리가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동안 형자는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단다. 밤새 자신의 허벅지에서 끙끙거리던 애인이, 결국 새벽녘에 성기를 부여잡고 용을 쓰는 모습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녀는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기도 했고, 일주일 동안 물리치료를 받기도 했다. 침술원에서 한 시간 넘게 침을 꽂고 엎드려 있기도 했고, 산부인과 의사와 상담을 하기도 했다. 산부인과 의사는 마음을 편히 먹으라는 빤한 조언만 했을 뿐 별 다른 처방은 내려주지 못했다. 하긴, 그녀도 차마 상대가 흑인이라는 말은 못했다고 하니까.
우리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이유를 함께 고민해 보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유를 알아야 뭔 수를 내든 낼 것 아닌가.
우리의 첫 번째 가정 하나, 그녀의 가족사 문제. 부모님의 이혼이 알게 모르게 그녀의 허벅지에 잠입했다는 이 가정은, 처음엔 썩 그럴듯해 보였다. 부모님의 이혼이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그것이 종내에는 남성혐오와 불감증으로 이어져 허벅지를 굳게 만들었다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이 가정은 곧 무시되고 말았는데, 부모님의 이혼은 그녀 어머니의 공이 절대적이었고, 그녀가 현재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성혐오는 아니라는 결론 때문이었다.
두 번째 가정은 재덕이가 내놓았는데, 그녀가 성장했던 장소의 문제였다. 즉, 형자의 아버님이 몇 년 동안 방앗간을 운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형자가 물었다.
― 방앗간하고 허벅지하고 무슨 관곈데?
― 옛날 어르신들이 방앗간에서 그 짓을 많이 했잖아. 떡 치는 게 그것하고 똑같잖아.
― 우리 방앗간은 다 기계였는데?
― …….
말도 안 되는 가정.
세 번째 가정은 역시 윌의 문제였다. 즉, 상대가 윌이었기 때문에 형자의 허벅지가 붙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다투어 형자에게 물어 봤다.
― 정말 그렇게 커?
― 새까맣든?
― 포경수술은 했니?
형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우리에게 긍정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내 서로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인지 찬탄인지 모를 표정들을 지었다.
우리는 세 번째 가정으로 결론지었다. 그 가정에 동조하면서 나는 잠시 7년 전, 텐트 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형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쓰럽다고 해서 함부로 남의 배 위에 올라탈 순 없지 않은가. 그건 지금도 변함 없는 내 생각이다. 아무튼, 이제 남은 문제는 형자의 자신감을 북돋워 주는 일뿐이었다. 우린 또 서로에게 뒤질세라 자신의 의견을 순서 없이 토해 냈다. 불을 끄고 해라, 윌의 성기가 허벅지에 닿아도 그냥 다리통이라고 생각해라, 평소에 다리 찢는 훈련을 많이 해라, 네가 올라타서 해 봐라, 풍차돌리기에 대해선 얼마나 아느냐, 등등. 참, 말들 많았다. 형자는 예전처럼 우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하긴 그녀가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었으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점점 형자의 허벅지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너도 풍차돌리기 해 봤냐, 나는 잘 안 되더라, 그건 엉덩이를 살짝 들고 해야 잘 돌아간다, 등등. 정말, 말 많았다. 헤어질 때,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물어보았다.
― 결론이 뭐였지?
― 글쎄…?
― 뭐, 자신감을 갖자는 거지.
― 맞아, 자신감.
우리는 형자에게 파이팅, 하고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주먹 불끈 쥐고. 형자도 작은 목소리로 파이팅, 했다.

이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우연히 형자가 윌을 만나러 가기 전 바지에 무언가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즈음 윌은 자주 형자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기고 있었다. 부대지휘 검열이니 전투준비태세 훈련이니 핑계는 많았지만(과연 형자가 그 말들을 어떻게 알아듣고 우리에게 전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우리는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서로 드러내놓고 말들은 하지 않았지만서도.
― 뭐야, 그게?
형자는 쑥스러운 듯 감추려 했지만, 나는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그건 바늘 세 개가 꽂혀 있는 낡은 헝겊조각이었다. 헝겊조각 안엔 미키마우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누가 그러더라구…… 축구선수들이 시합 중에 쥐가 날 땐 바늘로 막 찌른다고…… 그러면 금세 풀린다고…….
나는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말릴 수 있으면 말리고 싶었다.
―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형자는 다시 바늘집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 해볼 건 다 해 봐야지…….
― 다른 걸 할 수도 있잖아? 영화를 보거나, 뭐, 사는 이야기를 할 수도…….
― 우린 말이 잘 안 통하니까……. 그거라도 해야지……. 윌과 내가 같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잖아…….
형자는 미키마우스처럼 웃어 보려 했지만,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간 형자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한 것만 같아 괜시리 미안해졌다. 형자는 슬쩍 미소 한 번 짓고는 다른 아이들에겐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형자의 그 부탁을 간신히 지켰으나, 지금 또 어기고야 말았다. 제기랄, 말하는 건 너무 쉽다. 아니, 내 말들은 너무 쉽게 나온다…….

― 안 되겠어…. 나, 그냥 헤어질까 봐…….
어젯밤, 형자는 윌을 만나러 가기 전, 잠시 우리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 어떤 말, 그 어떤 위로도 해 주지 못했다. 형자의 입장에선 이미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상태였다. 마냥 윌의 인내를 요구하기엔 그녀의 얼굴이 그리 두텁지 못했다. 형자에겐 윌이 전부였지만, 윌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결심을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너, 헤어지자, 를 영어로 어떻게 하는 줄이나 알아…?
우리가 기껏 형자에게 건넨 말의 전부. 나는 윌과 형자의 헤어짐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내 그 이후를 생각하였다. 예전과 똑같은 일들의 반복을.
― 알아…… 굿바이, 하면 되지, 뭐…….
형자, 울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의 만남은 형자를 위로하고자 함이었다. 아마 또 치킨호프집에 가서 소주에 서비스로 나온 허연 무를 질겅질겅 씹어대겠지, 그리고 형자는 또 울겠지, 그게 한동안 반복될 테고,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형자의 허벅지를 웃으며 얘기할지도, 형자 역시 그 얘기에 웃으며 동참할지도……. 그 안에 우리 관계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
형자가 들어왔다. 예상대로 그녀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제대로 잠을 못 이룬 게 분명했다. 얼굴은 수척했고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는 의례적인 손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 말… 했어?
승희는 자신이 묻고도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괜시리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려 애썼다. 형자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말했다.
― 아니…….
재덕이가 다시 물었다.
― 왜? 영어가 안 떠올랐어?
― 아냐……. 나, 어제 윌하고 잤어……. 내가 자자고 졸라서…….
우리 모두의 시선이 형자에게로 일제히 집중됐다.
― 뭐야, 한 거야?
그러고 보니 형자의 얼굴은 우울하다기보단, 어딘가 아픈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럼…… 형자가 살짝 웃었다.
― 아니야, 그건…….
― 뭐야, 그럼?
우린 모두 애가 타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형자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니, 작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 나, 사실…… 어제…… 턱이 빠졌다…….
형자는 그 말을 한 후, 희미하게 웃었다. 순간, 나와 재덕이의 눈이 마주쳤다. 재덕이는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내 얼굴도 그러했을 것이다. 승희만 어리둥절해서 그게 뭐, 그게 뭐 어쨌다구, 연신 물어댔다. 그리곤 이내 눈치채고 우리와 같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윌이 하려다가 또 지쳐 누웠거든……. 미안해서…… 내가 막 미안해서 윌을 부둥켜안고, 쓰다듬고, 그러면서도 말은 안 나오고…… 그러다가 억지로 말하려고 입술을 열었는데……. 갑자기 뭐가 들어와서…… 막, 목구멍이 막히고…… 숨쉬는 게 좀 그랬는데…… 윌이 좋아하는 걸 보니까…… 나도 좋았어…….
우리는 모두 침묵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형자는 그렇게 윌과 말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을, 그런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상처를, 태생을, 알아버린 것이었다.
나는 자꾸만 내 식도가 갑갑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기호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99년 월간 현대문학 신인추천공모에 <버니>로 등단. 작품집으로 <최순덕 성령충만기>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