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스페셜링크―정철훈] 남북작가대회，민족어로의 소풍

[국민일보 2005-07-20 18:49]

“차라리 죽는게 망해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종로∼망우리 구간을 운행하는 시내버스 안내양들이 외치는 “청량리 중랑교 망우리”는 빠른 혀굴림에 의해 “차라리 죽는게 망해요”로 들렸다. 어법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청량리 역 광장 옆,대왕빌딩이 화재로 사라지기 전의 일이다. 어린 시절에 흔히 가던 대표적인 소풍 장소가 능이었다. 능원으로의 소풍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거니와 이렇다 할 녹색지대가 드물었던 그 시절에야 선택의 여지가 더욱 없었을 것이다.

한번은 망우리로 소풍을 가기 위해 이른 아침,청량리역 광장에 집결했었다. 왕릉이 아닌 공동묘지로의 소풍은 처음이었다. 버스를 타고 중랑교쪽으로 넘어갈 때 예의 “차라리 죽는게 망해요”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죽는다’를 의미하는 생의 비가(悲歌)였다.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시조사’라고 적힌 입간판도 보였다. 그게 한자로 시조(時兆)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시조’가 시조새의 ‘시조’(始祖)로 뇌리에 박혔었다. 언젠가 소년 잡지에서 본 시조새의 화석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풍은 비가(悲歌)와 시조(始祖)새의 착각 사이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눈부셨다.

분단 이후,처음으로 열리는 남북작가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평양으로 떠나기 앞서 집에서 멀지 않은 망우리 묘지공원을 찾았다. 공원에는 이 땅의 분단을 살고 간 문인들이 묻혀 있다. 공원 초입에 나붙은 표지판은 ‘사색의 길’이었다. 용마산 자락을 휘감으며 구불구불 나 있는 5㎞의 산책로. 걷다 보면 묘지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간 데 없고 길은 멀리 한강 줄기와 숨바꼭질을 한다. 작고 문인들의 묘소는 거개가 좌측 길 주변에 있는데 박인환(1926∼1956) 시인만은 유독 우측에 있다. 죽어서도 고독을 지키는 시인의 결기가 시비에 새겨져 있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통속하거늘 한탄할/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와 숙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열정과 삶을 껴안듯이 노래하다 서른 한 살로 세상을 뜬 박인환. 땅에 묻힌 시인들을 길동무할 수 있는 장소가 망우리다. 다시 길은 굽이굽이 이어지고 숨이 약간 가빠지기 시작할 무렵,소파 방정환(1899∼1931)의 묘가 나타난다. 묘비 번호 203703.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고 새겨진 자연암이 봉분을 대신하고 있다. 그것은 어린이 사랑을 새긴 까만 글자들이었다.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희망을 위하여,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어린이 날의 약속’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겨 팔각정에서 땀을 식힌다. 산 아래 구리시가 한눈에 들어오고 덕소와 하남시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구리를 끼고 돌아드는 하얀 물굽이의 한강은 세월의 속박에서도 자유롭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곳이 망우리였다. 태조 이성계가 그의 능지를 둘러보고 서울로 들어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에 이르러 “이제야 근심을 잊었구나”라고 해서 이름 지어진 ‘忘憂里’가 아니던가.

사색의 길 위에 생의 비가(悲歌)와 시조새의 착각이 함께 떠돌았다. 인간은 누구나 사색의 길 위에서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얻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여름의 묘지가 뜨거운 이유였다. 청포도 익어가는 계절,햇살은 묘지 위에서 인간의 꿈을 더욱 부추긴다. 땅은 뜨겁고 물은 차다. 약수 한 컵으로 갈증을 달랜 뒤 출구쪽으로 걸어가면서 문득 뒤를 돌아본다. 그리운 것은 늘 뒤에 있으므로.

팔각정을 지나면 한국 근대문학의 주춧돌을 놓았던 한용운(1879∼1944)의 묘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진 본성으로서,이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시비에 새겨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한 대목에서 이번 남북작가대회의 의미가 더욱 명징해졌다. 민족어의 언어적 본성에서 남과 북은 하나의 줄기이며 하나의 맥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땅이라면 몰라도 언어에는 금을 그을 수 없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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