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제28회

나는 윤회주의자다

임 영 태(소설가)

서류의 종교 난에 내가 써내는 대답은 '무'다. 얼굴 마주보고 대화하는 자리에서라면 일단 '없다'고 대답하고 난 후 가끔 다음과 같은 말을 붙인다.

"종교란 건 결국 사생관이겠죠?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냐 하는 것, 그런 사생관의 측면에서라면 저는 딱히 신자는 아니지만 불교 쪽이 제 정서에 맞아요."

만약 대화가 좀더 깊이 들어가면, 그래서 내가 이 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관념을 갖고 있는가를 명확히 밝히고자 할 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윤회를 믿습니다."

대략 오륙 년 된 듯하다. 내가 윤회를 내 사생관으로 받아들인 것이.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하던가. 죽음이라...

대개 한번쯤 그런 경험들이 있는 것 같다. 언젠간 자기도 죽는다는 사실이 불현 생생히 인식되면서 아득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때. 대개 10살 전후의 유소년기, 늦으면 사춘기 시절에 최초로 그런 홍역을 치르는 듯한데, 아직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인지라 그 두려움은 이를테면 생물학적 공포다. 요컨대 소멸, 소멸 앞에서의 무방비, 그 대책 없는 심연. 자기가 없어진다는 것, 자기가 없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어 아침이면 해가 뜨고 상점 문이 열리고 사람들 바삐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리라는 것. 그런데 '나'는 없다...어디에도 없다...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 아찔한 심리적 공황.

5년 전쯤엔가 당시 아홉 살이던 아들놈이 갑자기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옛날의 나처럼, 느닷없이 인식된 죽음이란 것 앞에서 돌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그 어린 마음에 스며든 당혹감과 생생한 공포를 나는 빈틈없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떻게 위로하고 다독거려 주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 "아주 죽는 건 아니란다" 그것뿐이었다. 아이가 느끼고 있을 소멸의 공포를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건, 네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그 단순명쾌한 거짓말(?) 말고는 없었다. 사유 능력도 없이 생물학적 공포에 대책 없이 포박돼 있는 그 어린아이에게 어떤 구름 잡는 형이상학적 변설이 가능할 것인가.

아무려나, 아주 죽는 건 아니라는,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그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이른바 내세이겠다. 다른 종교들에도 그 비슷한 사후 세계가 마련돼 있거니와, 꼭 종교가 아니라도 인간은 이 '아주 죽는 건 아니란다'를 위해 온갖 불멸의 처방을 사유해 왔다.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은 그 중에서도 흥미롭다. 삶을 폭발적으로 긴장시켜 모종의 절정 속에서 우리네 삶의 유한성을 단숨에 초극시키고자 하는 그의 에로티즘은 이를테면 맨땅에 헤딩하기다. 삶이라는 기관차를 죽음이라는 벽에 무대뽀 충돌시켜 공포를 쾌락으로 바꾸려는 시도. 내게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은 생양아치가 자기 배를 긋는 것으로 상대를 압도하려는 자세와 비슷하게 이해된다. 단순무식하지만 또 그만큼 처절하고 순정한 방식.

불멸에 대한 해법 중 아마 가장 건실한 태도는 '인류'에 대한 의식이다. 내가 죽어도 어쨌거나 인류는 계속된다는 것, 나를 인류라는 전체에 심어 놓음으로써 한 개체로서의 내 육체는 비록 소멸하되 정신은 영원하리라는 것. 이 방법은 매우 단정한 범생이 방식으로 보이지만 막상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바타이유 식의 생양아치 방식 이상의 내공이 필요하다. 고도록 각성된 의식, 인간과 이 세계에 대한 뜨거운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한때, 대략 10년 전쯤? 어찌어찌 내가 이 경지에 도달했던 것도 같다. 스스로 도달했다는 자리를 '경지'니 '고도로 각성된...' 운운하고 있자니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듯해 조금 민망하지만 뭐 사람이란 어느 한순간 믿을 수 없이 고양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튼 정신이 그 자리에 서고 보니 과연 마음이 호수처럼 잠잠해지는데,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일도 아득한 일도 아니었다. 60년 남짓의 주어진 한 시기를 마감하고 나면 '인류' 속으로 귀향한다. 이후엔 육체의 외양만 다른 또 다른 '나', '나'들이 아침을 열고 황혼을 맞으리라...그런 의식이 단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온몸에 충만해지면서 소멸의 공포가 말끔히 씻겨지던 것이다.

이런 류의 정신적 고양은 사실 수시로 갈고 닦지 않으면, 혹은 (예컨대 스콧 니어링처럼) 생활 자체로 가져가지 않으면 슬그머니 부식되어 버린다. 치열한 성찰로 얻어진 고도의 각성일지라도 막상 육화되어 뿌리내리지 못하면 시간과 함께 퇴화하고 만다. 그랬지, 그랬었지, 그랬었었지...감흥은 없이 기억의 무늬만 남는다. 나의 인류 의식도 그렇듯 차츰 흐려져 갔다.

그러다가 윤회를 만났다. 윤회가 솔깃했던 건 죽음의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무늬만 남았지만 그래도 인류 의식의 관념은 아직 내 안에 있어 이제 생물학적 공포로 죽음을 앗 뜨거! 하지는 않고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황홀한 인류의식은 아니었지만 죽음에 대한 담담한 긍정만큼은 내 안에 뿌리내려 있었다. 윤회를 만난 건, 그것이 필요했던 건, 죽음이 아니라 삶 때문이었다. 삶에는 왜 고통이 있을까?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고 그것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몰라 허덕거리고 있을 때 윤회가 다가왔다.

윤회의 사생관은 말한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태어난다고, 다 배우지 못해 다시 태어난다고. 고통은 그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주어진다. 고통이야말로 내가 이 생에 다시 온 이유인 것이다. 자,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무엇을 배우라 하는가, 고통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드디어 진정한 생이 시작된다. 자기 생을 갖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배신이나 폭력, 감당하기 힘든 소외, 설움, 분노, 애욕이 그 앞에 씻겨진다.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한다. 윤회는 매우 선명하게 우리네 생의 욕망과 상처를 이해시켜주는 가장 합리적인 사생관이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윤회주의자가 되었다.

이런 말은 어떨까. 죽음의 의미를 통해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연역적 사생관이라고 하자. 삶의 의미를 통해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귀납적 사생관이라고 해보자. 윤회가 더욱 내 마음에 드는 건 그것이 귀납적 사생관이라는 점이다. 이미 정해진 죽음의 의미 혹은 내세의 의미에 따라 삶의 목적이 정해지는 게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 그 행위와 시간을 통해 삶이 삶으로 서고 죽음의 의미도 만들어진다는 것, 생의 의미에 대한 그러한 귀납적 도출.

여담 하나. 소설가는 귀납적이고 평론가는 연역적이다. 소설가는 쓰면서 생을 찾고, 평론가는 이미 정해진 의미의 잣대로 소설을 해부한다.

처음 올린 날: 2003년 1월 8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