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운정 가는 길


안덕훈



룸미러를 통해 비친 남편의 양미간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그의 말대로라면 처음부터 강변도로를 택한 것이 잘못이었다.차라리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화전을 거처 능곡과 고양 시내를 거쳐오는 편이 나았을 터였다.얼마전 까지만 해도 자유로에 설치된 과속 단속을 위한 무인카메라는 분명 두 개였다고 했다.운전에 이골이 난 남편은 두군데의 무인 카메라 구간을 규정속도 이하로 무사히 통과했다.그런데 이산포 IC를 앞두고 올빼미 눈알처럼 시커멓게 내민 카메라 렌즈라니....자유로를 빠져나와 첫 번째 적신호에서 차를 멈추며 남편은 꽤나 부아가 치민 표정이다.사실 그에겐 그리 운이 좋은 날은 아니었을 것이다.진눈깨비라도 한바탕 쏟아 부을 것 같은 하늘도 그랬지만, 모처럼 얻은 휴일을 기껏 아내인 나의 운전기사 노릇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 애당초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더군다나 아들아이와 눈썰매장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 바로 오늘 아니던가.그나마 자유로 길 만 타지 않았어도 생짜로 돈을 날리는 일은 없었을 게다.‘벌금 육만 원에 벌점 십오점’ 돈도 돈이지만 잘못하면 면허정지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영업사원인 그로서 운전 면허 정지는 곧 휴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늦은 아침, 집을 나설 때 만 해도 멀찍이 뿌옇게 보이던 하늘이 일산 신도시로 접어들면서 새벽안개처럼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제국주의 군대가 식민지를 접수하듯 불과 십년도 안되는 동안 뭉텅 뭉텅 영토를 점령해 버린 신도시의 아파트 군락이 보인다.이산포 IC를 빠져나와 곧바로 뻗은 길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버티고 있는 현대식 아파트와 그 반대편으로 십년전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그 모습 그대로였을 것 같은 논이며 밭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얼마나 더가야 되죠...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어 ”

“ 일산 역에서 한 정거장 만 거슬러 올라가면 돼.가봐야 헛걸음 일거야 온통 아파트만 들어섰을 걸 벌써 몇 년인데 ”

남편의 기분을 떠보기 위해 던진 나의 물음에 대꾸하는 그의 말끝이 곱지 않다. -벌. 써. 몇. 년. 인. 데- 아마도 벌금 육만 원에 벌점 십오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 내일 운정에 가야겠어요 ”

“ 운정이라니 거기가 어딘데 ”

어젯밤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슬그머니 꺼낸 나의 말에 남편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편이 그곳을 모를 리 있겠는가 한번도 가본 적은 없는 곳이지만연애시절,나와 동갑인 그가 스물하고 서너살 무렵이었던가.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살의를 품기까지 했던그 곳을 남편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결혼 이후 나는 한번도 운정 얘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어쩌면 연애시절 술의 힘으로 늘어놓았던 그곳 얘기를 이젠 잊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당신 고향 운정 말이야? ”

사실 그곳이 나의 고향은 아니었다.기억력이 생겨나고부터 초등학교 오학년 때까지 그곳에 살았으므로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을 뿐이다.

“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나봐요 어렸을 적 놀던 생각이 자꾸나구, 그때 친구들도 생각나구.... 바쁘면 나혼자 다녀올께요 기차타구 가면 금방 일텐데 ”

그저 고향에 대한 지나치는 그리움 정도로 얘기를 마친 나는 이불을 돌돌 말며 돌아누웠다.남편과 만나던 그때만 해도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럴 줄 알았다면 그런 거짓말은 하지않는 건데.운정에 가면 남편과 함께 뒷산에 올라야겠다.그리고 이젠 사과를 해야지 나의 연극에 잘도 속아주었던 남편. 이제는 사실을 알아도 나를 이해하지 않겠는가.



신호등을 두어 개쯤 더 지났을까 차가 밀리는가 싶더니 사거리가 나타나고 이정표엔 금촌, 서울, 주엽동 세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지도를 보지 않아도 가야할 길은 뻔했다. 다른 길 모두 반듯반듯 뚫려 있었지만 왼편 금촌 방향 도로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신작로에 주둥이를 맞대고 있었다.왼편으로 핸들을 꺾은 남편이 가속페달을 밟자 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요동을 친다. 아마도 도로에 움푹패인 웅덩이를 모르고 지나쳤던 모양이다.그 바람에 그때까지 나의 무릎을 베개삼아 모로 누워 자고 있던 아이가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 엄마 여기가 어디야?”

“........... ”

“ 눈썰매장 가는 거야 ?”

“........... ”

“ 응 엄마 어렸을 때 다니던 초등학교에 가는 거야”

기분이 조금 풀어 졌는지 나대신 남편이 대꾸했다.아이는 금방 실망한 얼굴로 입술을 내민다.논 한가운데로 뚫려있는 이차선 도로는 마주 오는 차를 비껴가기에 빠듯할 정도여서 긴 먼지꼬리를 달고 덮치듯 다가오는 덤프트럭을 만날 때마다 곡예를 부린다.신도심을 벗어나 금촌 방면으로 꽤 왔다 싶었지만 아직 눈에 익은 곳은 나타나지 않는다. 커다란 트럭이 심심찮게 오가는 것을 보아 남편 말대로 그곳은 이미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본능적인 감각이었을까 자꾸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온다.아랫입술을 오그려 연상 침을 발라대어도 나의 입술은 겉껍질을 벗겨낸 밀감의 얇은 속피처럼 금새 뻗뻗해져온다.어느새 운정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른다.

“ 쉽진 않을 거야.보라구 여기도 죄다 아파트 공사로 난리야 길도 넓히는 모양인데 ”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육십 년대에 태어나 삼십여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 치고 어릴 적 고향을 올곧게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특히 서울 근처에 고향을 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도시화라는 거대한 물줄기.어쩌면 그 물줄기로 인해 끊겨져 버렸을 고향 입구의 나들목에서 발길을 돌려야할지도 모른다.

“저쪽이에요”

‘ -> 운정역 3km’오른편으로 갈라진 길에 서있는 이정표가 보인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꾸자 주변엔 운정이라 이름 붙은 입간판 들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온다.운정식품, 운정부동산, 운정카센타. 운정이라는 글자에 고무된 나는 어느새 열두살 소녀로 돌아가고 있었다.

“ 조금만 가면 학교가 있을 거예요.지산국민학교 ”

뿌연 먼지를 헤치고 나아가는 자동차처럼,나는 뿌연 기억의 먼지를 걷어내며 과거 속으로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은 남달리 새로울 것도,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오히려 결혼 전에는운정에서의 어린 시절을 부끄러워했었다.여북해 남편에게도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를 만큼 취기가 돌아야 그제서 얘길 꺼내곤 하지 않았던가.성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룬 동리에서 타성바지였던양씨 성의 나는 그 존재만으로도 아이들의 놀림이 되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내가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아버지는 주로 서울로 일을 다니는 건축업자였다.목수 출신인 아버지는 그 시절 한참 붐을 이루던 건축 경기 덕분에 적지 않은 돈을 벌기도 했다.사람들은 그를 오야지(おやじ:우두머리를 부르는 일본말로서 흔히 막노동판에서는 건설회사에서 도급을 따내 공사를 시행하는 일종의 중간 하청업자를 칭함)라고 불렀고 그 앞에 성을 붙여 양오야지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졌다.그는 동리 토박이 농사꾼들을 끌어 모아 일손이 부족한 공사장에 줄을 대기도 하였는데,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수입이 변변치 않은 농사일 보다는 공사장 노동판에서 품을 파는 일은 훨씬 좋은 일자리였으리라.별다른 건축 기술이 있을 리 없는 농사꾼들이 공사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잡부 역할이었지만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동리 남정네들은 일가친척간에 멱살잡이까지 불사하곤 했다.추수가 끝난 농한기에는 물론, 한참 바쁜 절기에도 아버지는 사람들을 끌고 운정역 앞마당에서 새벽 기차를 기다렸다.모를 내는 날이나, 약(농약) 치는 날이면 역광장에서는 새벽부터 크고 작은 실랑이가 오가곤 했다.농사일을 걱정하는 동리 노인들과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일을 나가는 젊은 사람들과의 시비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이었다.하지만 그 싸움은 서울행 첫차의 기적소리를 신호로 하여 일단락 지어진다.아버지를 따라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젊은 사람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밑동까지 타 들어간 청자 담배를 발밑에 떨어뜨리는 노인들.....보름마다 돌아오는 간조날(공사장에서 보름마다 임금을 지급하는 날)은 마치 동네 잔치라도 열린 것처럼 역 광장을 중심으로 온 동네가 시끌벅적 하곤 했다.낮에는 커피나 홍차를 팔지만 해가 저물면 술집으로 돌변하는 일대의 대표적인 유흥업소인 역전다방에는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고,그곳에서 ‘딱 한잔 만’으로 시작된 술판은 밤늦도록 그칠 줄 몰랐다. 문산행 경의선 막차가 왝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동리를 지날 때 쯤이면 역전다방에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미쓰리 언니는 역사 뒤편 구석진 곳에서 중간계산을 한다.그 중간계산이란 다름 아닌 토악질이었다.미쓰리 언니 말에 의하면 초저녁부터 마셔대기 시작한 술이 그 시간이면목구멍까지 차 오른다고 했던가.중간계산을 마친 그녀는 아래층 역전식품에서 요구르트 한 개를 외상으로 마시고 다시 이층 다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른다.자신의 취기를 가름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며 하나, 둘, 셋 ... 하며 숫자를 세던 미쓰리 언니, 언니는 꼭 자신이 세던 그 숫자 만큼의 나이까지 살았다.자정을 넘겨 술판을 끝낸 사람들은 역광장에 몰려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또 몇몇은 기어코 들러붙어 싸움을 하기도 했다. 술이 약한 순분이 아버지는 비틀비틀 광장 한가운데 버드나무까지 걸어가 밤새도록 마신 술과 안주를 나무 밑동에 빈대떡 만한 크기로 토해 놓는다. 아마도 버드나무 가지가 곧게 뻗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우는 이유가 술섞인 거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미쓰리 언니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계단을 내려오는 가죽잠바에 시커먼 라이방(썬그라스)을 낀 사내. 바로 나의 아버지. 나는 미쓰리 언니가 중간계산을 했던 역사 뒤편, 오목하게 들어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 모양을 지켜본다. 줄곧 내 옆자리를 함께 지켜주던 석준이가 아버지를 피해 골목 끝으로 몸을 숨기면 나는 그제사 아버지에게 달려간다.

“ 아이구 우리 딸네미 아부지 기다리고 있었구나 ”

아버지는 미쓰리 언니의 엉덩이를 쓰다듬던 손으로 나의 볼을 움켜쥔다.찌든 담배냄새와 술냄새 사이로 설핏 미쓰리 언니의 화장품 냄새가 맡아진다.

“ 엄마가 아부지 마중 나가보라구 하던 ? ”

“ 아니 ”

아버지는 언제나 같은 말을 묻고, 나는 언제나 같은 거짓말을 했다.그 거짓말의 대가로 나는 빳빳한 종이돈을 엄마 모르게 움켜쥘 수 있었다.아버지가 가죽잠바의 지퍼를 내리고 네 몸을 번쩍 들어 감싸 안을 때 나의 눈길은 골목 끝으로 향하고 석준의 묘한 미소와 맡딱뜨린다.



“ 맞아요 맞어 ! 저 길이야왼쪽 미류나뭇 길 ”

자칫 잘못했으면 지산초등학교라는 푯말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논 한가운데로 뚫린 좁다란 길은 그대로였다.진흙 바닥에 아스팔트가 덮이고, 돌다리를 짚고 건너야 했던 실개천 위로 다리가 놓인 것이 달라졌을 뿐, 경운기 두 대가 빼곡이 비껴 갈만한 폭의 그 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여름이면 한껏 가지를 벌린 미류나무들이 내민 손을 서로 맞잡아 터널을 만들던 학교앞 논 둑길 .... 그대로였다.

“ 엄마네 학교가 저 학교야 ? ”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끝에는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 학교건물은 새로 지은 것 같은데 ”

열려있는 학교 정문을 들어서며 남편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학교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학교 뒷산을 깍아내어 새로 교사를 지었고 운동장도 새로 단장되어 있었다.정문 앞 문방구도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엔 오층 짜리 신축 건물이 마무리 공사를 남겨두고 있었다.운동장 한구석에 차를 세운 남편은 상체를 비틀며 기지개를 켜고 아이는 쪼르르 미끄럼틀로 달려간다.

“ 그래도 실개천은 그대로네 ”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곁눈질로 본 남편의 낯빛에는 무료함이 가득하다.하긴 그에겐 실개천 얘기를 하진 않았으니까.아버지로부터 용돈을 얻은 다음날이면 석준과 나는 실개천을 따라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돌다리 옆에서 풀빵을 먹곤 했다.성씨 일가 중에 하나였던 그 아이의 아버지는 월남에서 죽었다고 했던가.그리고 미제장사 혹은 양공주로 통하는 그 애의 엄마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소문에 의하면 미군과 눈이 맞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 더 먹어! 나는 벤또 먹어서 배불러 ”

석준은 풀빵을 달게도 먹었다.배가 부른 나는 장난 삼아 삘기를 꺾어 끝을 빨며 풀빵 먹는 석준의 옆모습을 본다.귀밑에 빼꼼히 내민 사마귀가 귀엽다.

“ 공주 아줌마, 아니 니네 엄마 성이 양씨니 ?나도 양씬데 ...다음에 올 때는 요깡 좀 가져오라고 해 ”

풀빵을 다 먹을 때까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리리라는 걸 알지만 나는 쉬지 않고 묻는다.풀빵을 다 먹은 그 애는 어김없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꺼내 나에게 내민다.그렇듯 우리의 거래에는 공짜가 없었다.그 애의 주머니 속엔 항상 신기한 물건이 하나씩 들어있었고 풀빵의 대가로 나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그 물건들은 모두 비밀스러운 것들이었다.처음엔 미제 요깡(양갱)이 최고였지만 몇 번 맛을 본 다음부터 나의 관심은 좀더 은밀한 것으로 옮겨갔다.불어도 불어도 터지지 않는 풍선이 그것이었다. 그 시절 그 풍선의 쓰임새에 대해 알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어른들이 알아서는 안될 어떤 비밀스러운 물건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내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피우던 담배를 운동장 바닥에 비벼 끈 남편이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며 궁금증을 표시했다.

“ 운정역 쪽으로 가보자구 거긴 옛날 모습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잖아”

나의 웃음이 조금은 허전해 보였던 때문일까 남편은 나의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기나 한 것처럼 어느새 무료함과 귀찮은 기색을 거두고 있었다. 남편이 아이를 부르고 미끄럼틀을 주르르 내려온 아이가 밤색 바지에 허옇게 묻은 먼지를 털며 나의 눈치를 본다.한옹큼의 바람이 텅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더니 백엽상 옆 풍향계를 팽이처럼 뱅그르르 돌려놓는다.차에 시동을 건 남편은 아이와 나를 서둘러 태우고 정문을 빠져나와 실개천 다리를 무심히 지나친다. 고개를 돌려 개천 윗편을 거슬러 올려보았다. 하지만 풀빵을 먹던 그곳이 어디쯤이었는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그곳에서 석준과 나는 풍선에 한껏 바람을 채워 그것을 주무르며 어스름 저녁 무렵까지 놀곤 했다.유독 맨 끝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의 보드라운 감촉을 좋아했던 내가 그것을 얼굴에 문지르면, 석준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엄마 젖꼭지 같다고 말했었다. 그 말에 나는 깔깔대며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곤 했다.엄마 젖꼭지라는 말이 무엇 때문인지 나에겐 자극적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떠나온 후 나는 그때 일을 잊고 있었고 그 물건의 용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것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그 뒤 십년이 훨씬 지나 지금 남편의 입영전야였다.논산의 허름한 여관방 빨간 색 꼬마전구 밑에서 머리를 박박깍은 사내는 발기된 성기에 그것을 끼우기 위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 콤돔에 바람을 넣던 석준의 얼굴을 떠올렸던가 ? 아마도 남편의 성기에 그것을 능숙한 솜씨로 끼워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 어느 쪽이지? ”

기차 건널목을 건너자 길은 사거리로 나뉘었다. 새록새록 기억을 되살리던 나는 거침없이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 맞아 맞아 저 이발소 .... 조금만 가면 역전이야 ”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오래된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들춰보듯 나의 기억은 차례차례 되살아나고 있었다.

좁다란 길을 지나자 운정역 이란 간판이 보이고 그 앞마당 한가운데 버드나무가 보인다.

“ 그땐 이렇게 좁지 않았는데 ”

주차장으로 변한 역전 광장은 고작 동네 놀이터 만한 크기가 되어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넓게 생각되었던 역사는 기껏해야 조금 크다 싶은 구멍가게만한 단층 건물에 불과했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이렇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실할까.아니면 오래된 기억이란 마치 사람 몸속에 기생하는 유기체와 같아서 제 주인이 성장하는 만큼 스스로 몸집을 키우고, 주인의 요구대로 진화하여 결국은 전혀 새로운 형태로 편집되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만일 운정역이라 쓰여진 표시가 없었다면 나는 그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먼저 역에 들어가 보자구, 거기는 당신 어렸을 때 그대로인 것 같은데 ”

문을 열자 매표구와 개찰구가 ㄱ자로 나란히 붙어있고 반대편에는 촌스러운 연두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대합실 붙박이 나무의자에 노인 서넛이 앉아있다.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혹시 나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나 않을까.‘ 당신 그 자식, 양오야지 딸 희수 아니야 ’ ‘ 동네 사람들 여기 좀 보라구 양오야지 딸네미가 제발로 찾아왔어 ’ 그 노인 중에 하나가 벌떡 일어나 그렇게 소리라도 지를 것같았다. 하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제사 나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역을 되돌아 나오며 슬며시 남편 옆으로 다가서며 팔짱을 끼었다.

“ 역 대합실에서 포도 주워 먹던 얘기했던가 ?”

“ 응 먹다 버린 포도 껍데기 줏어먹다 엄마한테 혼났다는 얘기 ?”

아버지의 일이 어렵게 돌아가자 집안 살림은 궁짜가 들기 시작했다.동네 사람들을 피해 달아난 아버지는 우리가 운정을 떠날 때까지 한번도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생계가 막막해진 엄마는 세 살 배기 어린 동생을 나에게 맡기고 품을 팔러나갔다.아버지 일로 인해 이미 동네에선 따돌림을 받고 있었던 터라 엄마는 일을 얻기 위해 새벽같이 일산까지 나가야 했다. 늦은 저녁 역 대합실에서 동생을 달래며 엄마를 기다리던 나는 운이 좋은 날이면 역전 다방 미쓰리 언니가 사주는 과자 부스러기로 허기를 달랠 수 있었지만 대부분 저녁을 거른 나와 동생의 눈은 퀭하니 움푹 들어가 있었다.그날의 포도 껍질 사건은 두고두고 엄마의 가슴 한 켠에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역 대합실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나는 바닥에 떨어진 포도 껍질을 주워 먹는 동생을 끝까지 나무랐어야 했다. 입가에 시커먼 얼룩을 묻히며 쪽쪽 포도 껍질을 빨아먹는 동생을 처음엔 달래 보기도 했지만 허기를 참아 내기엔 내 나이가 아직은 어렸던 것일까.허겁지겁 껍질을 주워 먹는 남매의 모습을 맡딱뜨린 엄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일이 그 지경까지 되어 버린 것은 물론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었다.사업주인 회사의 자금사정이 어려워 한 두달 품값이 늦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인부들의 일당인 간조의 일부를 착복한 것은 아버지의 말대로 공사판에서는 흔히 있는 관행이었는지도 모른다.더군다나 아버지를 따라 일을 다니던 사람들이 돈맛을 알고 나서부터는 씀씀이가 커져있었다.역전다방을 비롯한 인근 술집에 외상값이 늘어 난 것이나. 고정 수입을 감안하여 조직한 동네 여자들의 계가 깨져 버린 것이 어찌 아버지의 책임이겠는가.하지만 순분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할 말이 없다.칠 층이나 되는 공사현장에서 철근더미 위로 떨어져 즉사한 시체는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고 했다.일평생 농사를 지어온 사람들에게 그러한 죽음은 생전 처음 접하는 일이었을 것이다.자금사정이 어려웠던 회사에서는 제대로 된 보상이 있을 리도 없었고, 거기에다 직원도 아닌 일당 잡부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그에겐 사우디행 티켓이 순분아버지 죽음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을까.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회사측의 농간에 이용만 당한 것인지도 몰랐다.새참시간에 몰래 술을 마시고 위험한 작업을 하다 사고를 당한 순분아버지의 죽음의 책임은 전적으로 피해 당사자에게 있다는 회사측의 경위서에 증인 도장을 찍은 아버지는 사우디현장엔 가지도 못했다.



역 앞마당 버드나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제멋대로 가지를 뻗은 모양은 역시 그대로였다.마치 순분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 골목으로 조금만 가면 우리가 살던 집이에요 그 뒤에 쬐끄만 뒷산도 있고 ”

시동을 건 남편이 핸들을 바짝 당겨 꺾었다.차는 미루나무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방향을 바꾸어 골목입구를 향했다. [ 역전커피숍 ],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의 입간판이 나의 눈길을 잡아끈다.건물은 그대로였다.여러 번 페인트로 덧칠을 한 것같은 이층 건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모양인지 입구를 막아놓긴 했지만미쓰리 언니가 오르내리던 철계단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고개를 돌려 이층을 살피니 분홍빛 썬팅을 한 유리창엔 -역전 커피숍- 이라는 커다란 고딕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다방이란 이름보다 커피숍이라는 말이 얼마만큼의 촌스러움을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이곳 분위기에는 조금은 퇴폐적인 냄새를 풍기는 다방이란 이름이 더 어울릴 것 만 같다.그 시절, 저녁마다 흥청대던 역전다방도 늦은 청소를 마친 한낮에는 한가하기만 했다. 기껏해야 한두명 남짓 잠깐 엉덩이를 붙이고 가는 외지인이나 관공서 사람을 빼고 나면 다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아버지가 힘깨나 쓰던 그때, 역전다방을 아무 거리낌없이 드나들 수 있었던 아이는 동네를 통틀어 유일하게 나뿐이었다.아이들을 유난히 싫어했던 마담언니(사실은 주인아줌마)와 주방아줌마도 나에게는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저녁마다 손님을 몰고 와 매상을 올려주고 기분좋은 날이면 두툼한 지갑을 꺼내 팁을 놓기도 하는 나의 아버지가 있는 한 나의 다방 출입을 막을 순 없었을 게다.적어도 아버지의 일이 어렵게 되기 전까지는.....다방에는 신기한 놀이감이 많았다.보라색 융을 씌운 푹씬한 의자는 물론이려니와, 주방엔 가지각색의 예쁜 커피잔과 술잔들, 마담아줌마가 앉는 카운터에는 테이블 번호가 매겨진 바둑판 모양의 주문판 그리고 뚜껑이 열릴 때마다 찌르릉 하고 소리를 내던 돈통.하지만 내가 역전다방을 찾는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미쓰리 언니를 보는 일이었다.“ 양사장님 따님”하며 과장스레 나를 반겨주는 징그러운 마담언니나 주방아줌마와는 다르게 미쓰리 언니는 정말로 나를 예뻐했었다.주방 뒤편 언니의 골방에 들어가면 나는 백설공주가 되곤 했다. 얼굴에 뽀얀 분을 바르고 기다리면 언니는 나에게 눈썹을 그려주고, 양공주 아줌마에게 비싼 값으로 산 빨간색 미제 구찌베니(맆스틱)를 입술이 넘치도록 발라주었다. 뒷머리를 묶어 리본을 매어주고 이불을 덮어두었던 분홍색 보자기를 풀어 예쁜 망토를 만들어주면, 나는 동화 속의 백설공주가 된다.문밖에 마귀할멈 주방아줌마와 마음 나쁜 왕비 마담언니의 인기척이 들리면 나는 몸을 숨기고 미쓰리 언니는 낄낄대며 나와 눈을 맞춘다.만화를 좋아했었던 언니는 언제나 ‘유리’라는 긴 머리, 슬픈 표정의 여자 주인공 만화를 보았다.하지만 심부름을 하는 나로서는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동네 만화방에 있는 유리 만화는 이미 언니가 본 것이었고,그다지 장사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 만화방 주인은 신간 만화를 즉시즉시 가져다 놓지도 않았다.그럼에도 언니는 이미 결말을 알고있는 내용을 보고 또 보았다.주인공 유리가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남자, 그 남자가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사장의 딸과 약혼식을 치르던 날 주인공 유리는 비오는 연안부두에서 쓸쓸히 배에 오른다. 세찬 바람에 훨훨 날리는 유리의 긴 머리카락 그리고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미쓰리 언니는 빨갛게 칠한 작은 입술을 꼭 다문다.그리고 마지막 장면으로 책장을 넘기면 언니의 눈엔 기어코 그렁그렁 이슬이 맺히고, 만화의 맨 끝 한 페이지에는 커다란 여객선의 끝에서 치렁치렁한 바바리를 입은 채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유리의 마지막 모습이 장면을 가득 채운다.책장을 덮지 못하고 한참을 훌쩍거리던 언니는 벌떡 일어나 가위를 가져와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만다.

“ 언니 ! 만화방 아저씨한테 또 혼나면 어떡하라구 그래,지난번에도 책 찢었다구 얼마나 혼났는데 난 못 가니까 언니가 갖다 줘 ! ”

하지만 미쓰리 언니는 번번이 나를 힘들게 하곤 했다.그것도 항상 맨 끝장면, 즉 유리가 죽는 장면만을 골라 가위를 갔다 댓다.하기사 유리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유리의 죽음은 언제나 몸을 던지는 방법이었는데 바다에 몸을 던진 유리는 그 다음엔 달리는 기차에 또는 높은 절벽에서 긴 머리와 바바리 깃을 날리며 하늘을 날았다.미쓰리 언니가 가장 아끼던 빨간색 바바리를 입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희수야 넌 서울 가고싶지 않니 ? ”

그 날 미쓰리 언니의 표정은 마치 우리의 만화주인공 유리가 뱃전에 기대어 섰을 때의 얼굴 같았다. 어쩌면 나의 그러한 느낌은 다분히 자의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일이 이미 곤란한 지경이 되어 나는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기 시작한 때였고, 그날도 마담언니의 노골적인 비아양 거림을 참고 마지막으로 역전다방을 찾았던 날이었다. 그 즈음 나의 기분이 이미 만화주인공 유리처럼 되어져 있었다.

“ 아버지 오시면 서울로 간 댔어 ”

나의 대답에 미쓰리 언니의 눈이 반짝 빛났다.

“ 니네 아버지 어디 계시는지 알어?알면 나랑 같이 가볼래 ? ”

“ 그건 나두 몰라 그리구 언니랑 같이 가면 엄마한테 혼날 꺼야 ”

언니는 한참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그 사이 문산행 열차가 역을 통과하는 소리가 들렸다.조금더 있다가는 마담언니의 호통이 떨어질 시간이기도 했다.

“ 희수야 .... ”

“ 왜 ?”

“ 희수야 .... ”

“ 왜 언니 ... 빨랑 말해 나 집에 가야 된단 말야 ”

“ 너 .... 동생 있으면 좋겠니 ? ”

“ 동생은 무슨 동생 지금 있는 동생 보기도 지겨워 죽겠는데 ”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마담언니의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밀려 들어왔다.

“ 쌍년아 손님 안 받을 껴 !그러구 지지리 궁상떨면양가놈이 너 찾으러 온대니 ”

나는 일어서 방을 나섰다. 그 때까지도 양가놈이 나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인지 몰랐다.그 다음 나의 뒷꼭지에서 들려오는 마담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으면 더 좋을뻔 했는데.

“ 속두없지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지 애비하구 배 붙어 먹은 년을 뭐가 좋아 매일 찾아오누 ”



차는 천천히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역앞 광장과는 달리 골목은 그 형체만 남아있을 뿐 집들은 대부분 새로 지어져 있었다.논 한가운데 아직 공사 착공은 안했지만 아파트 신축공사현장 이란 푯말이 커다랗게 붙어 있는 걸 보면 그나마 운정의 예전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 인 것 같다. 예전엔 텃밭이거나 공터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장소는 거의 대부분 사오층의 연립주택 같은 건물이 들어 섰거나, 현재 공사가 진행중 이었다.골목의 형태도 바뀌어 있었다.분명 오른편으로 꺾여 있어야 할 길이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가하면, 논으로 이어지는 길에 깊은 웅덩이가 있던 것으로 기억되는 자리는 전혀 엉뚱한 쓰레기 더미로 가득차 있었다.술술 풀려 나오던 기억의 끈이 누군가에 의해 단단히 매듭지어진 것처럼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다.

“ 어느 쪽이야 ?”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갈림길에서 방향을 정하지 못한 남편은, 고개를 비틀고 나를 채근했다.

“ 차를 타고는 못 찾겠어요 ”



숲이 무성하던 뒷산의 모습도 바뀌어 있었다. 여기저기 포크레인으로 파놓은 곳마다 시뻘건 속살을 드러낸 모습이 아물지 않은 생채기처럼 느껴진다.눈이 오긴 올 모양인가. 습기차고 썰렁한 냉기가 쿨렁하고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간다. 다시 잠들기 시작한 아이를 남편과 함께 두고 언덕을 올랐다.어젯밤 이곳에 오리라 마음먹었을 때만해도 이 언덕은 무언가 은밀한 사건이 벌어지곤 하던 깊은 산 속이라 생각했었다.오래된 유년의 기억이 제아무리 스스로 몸집을 불린다 해도 이럴 순 없었다.그 시절 이 숲속에선 분명 은밀한 사건들이 벌어졌었고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은 그 비밀을 지켜주는 믿음직한 장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이라니.

여름 방학중이었던 그때 석준과 나의 놀이 장소는 주로 이 숲속이었다.

“ 어제 울 엄마 왔었어 ..... 깜둥이새끼하구 ”

“ 미국 아저씨 ? ”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양공주 아줌마가 뻔뻔하게도 이젠 미군들을 집에까지 끌어드린다는 그 소문은 그해 봄부터 온 동리에 퍼져있었다.어른들의 단속 때문이었는지 그 소문이 있고부터 석준과 어울려 노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순분아버지의 죽음으로 쫓겨나다시피 나의 아버지가 마을을 떠나고 같은 처지가 되어버린 나역시 석준이 이외에 다른 놀이상대는 없었다.하지만 그 애와 나는 그러한 사실에 아무런 서운함도 느끼지 않았다.오히려 다른 아이들이 제 스스로 우리를 피하는 것이 그 동안 방해를 받아왔던 우리 둘 만의 유희엔 더없는 기회가 되었다.석준은 엄마가 다녀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나를 불러냈다.그 즈음 바람 넣은 콘돔을 주무르는 놀이에는 이미 식상해 있었으므로, 우리의 유희는 그 강도를 더 높여가고 있었다.특히 밤새도록 잠자는 체 엄마와 미군의 짓거리를 훔쳐본 석준은 나를 불러낼 때마다 신기한 놀이를 제안하곤 했다.

“깜둥이 개새끼 죽여버릴거야”

놀이에 열중하던 중간중간에 그는 엄마와 같이 왔던 미군에게 연방 욕을 해대었다.그 때 마다 나는 섬뜩한 두려움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덩치큰 미군에게 칼을 들고 덤비다 빼앗긴 흉기에 가슴을 찔려 숨을 헐떡이고 마는 석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실제로 석준의 그러한 모습은 가끔 꿈속에서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어스름 저녁에 시작된 놀이는 한참을 계속되다가 동네아이들이 모두 잠들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나고.석준과 나는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로 숲속에 드러눕는다. 그리곤 아무말도 없이 우리 둘은 뚫어져라 별을 바라보곤 했다.

“ 나는 북두칠성을 좋아해 너는 ?”

“ 나두 ”

우리가 알고 있는 별자리라곤 북두칠성이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의견이 다를 리 없었다. 우리는 가장 밝은 국자 모양의 끝 부분부터 하나 둘 별의 숫자를 센다. 하지만 석준은 언제나 마지막 일곱 번 째 별을 찾지 못했다. 하기사 눈이 밝았던 나도 국자 모양의 밑부분 가장 작은 별은 조금이라도 구름이 낀 날이면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희미한 별빛을 찾아내려고 석준은 눈을 부릅뜨며 안간힘을 쓰고, 나는 그의 옆 얼굴을 바라다 본다. 어린 마음에도 그러한 집착이 서글퍼 보인다. 커다랗게 뜬 그애의 눈 끝에 구슬만하게 고인 물이 조금씩 커지더니 이내 굵어진 방울을 떨군다. 그럴때면 괜슬히 어색해진 나는 노래를 불렀다.-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하지만 석준은 끝내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그리고 ‘누나 누나’하고 있지도 않은 누나를 부르며 축축해진 목소리를 떤다.

그 숲속에서 놀이를 즐긴 사람이 석준과 나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숲속 맨 꼭대기 펑퍼짐한 우리의 자리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또 한군데, 그 곳을 찾았던 사람은 바로 미쓰리 언니였다.아버지가 떠나고 나서 저녁마다 흥청거리던 역전다방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 있었다.일거리가 없어진 미쓰리 언니는 초저녁이면 역전에 나와 서울행 기차를 바라보곤 했다.사위가 어두워지고 우리의 놀이가 한참 진행중인 시간이면 미쓰리 언니는 우리도 얼굴을 앎직한 사내와 함께 그 자리로 올라오곤 했다.하지만 그들의 놀이는 우리처럼 오랫동안 지속되거나 재미있지도 않아 보였다.컴컴한 어둠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된 두 물체가 요란한 소리만 내고 곧바로 떨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 미쓰리야 니 나하고 샐림 차릴래?”

“ ....... ”

“ 그럼 돈 모아 뭐 할 낀데 아직도 일편단심 이가 ”

“ 서울 갈 거예요”

“ 왜 안직도 양오얘지 그 자식 못 잊었나 ?”

그리고 몇 푼의 종이돈을 챙긴 미쓰리 언니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먼저 언덕을 내려간다.



언덕 밑으로 동네가 한눈에 보인다.내가 살던 집을 눈짐작으로 헤아려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작은 골목을 막 돌아서 있던 석준의 집도 흔적이 없다.그 해 여름이 지나고 석준은 엄마를 따라 아무도 모르게 마을을 떠났다.그 일로 마을은 또 한번의 홍역을 치러야 했다. 석준의 엄마가 지고있던 빚은 여기저기 꽤 큰 금액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그 중에서도 미쓰리 언니 돈이 제일 많았다고 했다.언니는 양공주 아줌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으리라,어쩌면 미제화장품을 팔기 위한 입발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을 여자들 중에 단 한사람 양공주, 석준엄마 만이 미쓰리 언니의 미모와 가치를 인정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언덕 밑에서 나를 찾는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 바람이 제법 찬데 그만 내려와.집은 찾았어? ”

“ ....... ”

아무런 대답 없이 남편의 잠바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 혹시 옛날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

남편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며 어깨를 감싸안는다.순진한 남편에게 내가 너무 짓궂은 짓을 한 것은 아닌가.남편의 입영전야, 그를 첫 남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나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혹시 그 시절 석준과의 관계에서 이미 나의 처녀성은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닐까.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석준과의 유희가 아무리 깊었다 한들 어릴 적 장난에 불과하였을 텐데. 바보같이 나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해야했다.그것을 놀이가 아닌 폭력으로 말이다.나의 거짓말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잘 짜여진 한편의 연극이었다.나는 그 연극의 주인공으로 그저 순진하고 착한 그러나 불행히도 가세가 기울어 집밖에서 헤메일 수밖에 없는 가련한 여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일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만들어진 각본이었다. 거기에다 세부적인 상황에 대해 다그치는 남편의 얼굴을 피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기만 하면 되었다.그 다음부터는 나의 연극에 진지하게 매달리던 남편의 위로를 듣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 그 일이라면 잊어버려 나도 이젠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냥 지나간 추억이라고 생각하면 돼 ”

남편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스물 서너살 무렵 나의 거짓말에 당장이라도 폭행범을 죽일 것처럼 흥분하던 그였는데.

“ 눈 올 것 같은데 집으로 가요 ”

“ 아쉬우면 차 타고 한바퀴 더 돌까? ”

“ 그만 됐어요 ”

차는 꼬불꼬불 찾아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천천히 나간다.

운정은 이제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외지인이었던 아버지를 쫓아내고, 또다른 외부와의 통로였던 양공주 아줌마도 거부한 이 마을은 한 동안 외딴섬으로 존재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그래도 아직까지 이 만큼의 흔적을 남겨두기가 어찌 쉬운 일 이었겠는가.고향이 혹은 지나간 과거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그것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몸속에서 기생하면서 사실과는 다르게 편집된 기억 때문일까?

골목을 들어설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조금 느슨해진 마음의 여유를 비집고 시야에 들어왔다.군데군데 현대식으로 지어진 주택들 문패엔 성아무개인 주인 이름이 간간이 보인다.그들도 이렇게 변해왔구나.서울을 향한 막연한 동경도, 생래적인 거부도 이젠 찾을 수 없는 모습으로 그들은 거기에 그대로 있어온 것이구나.

운정역 앞에서 우회전을 한 차가 조금 속도를 높였다.철길을 따라 나란히 평행선을 이루는 길이 이어진다.

“ 잠깐 멈춰요 ”

갑작스런 나의 말에 남편은 급브레이크를 밟고 그 바람에 아이가 다시 잠을 깬다.나는 차를 내려 기찻길로 뛰어내렸다. 삐끗하며 발목이 곱찔렸지만 찬 바람에 몸을 마주하고 서울쪽을 향해 팔을 벌렸다.

“ 그래 미쓰리 언니는 여기에서 서울을 향해 몸을 던졌지 빨간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로, 사람들은 그녀의 뱃속에서 함께 죽은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영문도 모르고 돈 떼먹은 양공주 아줌마 욕만 했었어, 아버지는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을까 ? ”

“ 엄마 왜 그래 ? 거긴 위험하잖아 ”



신도시를 지나면서 기어코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이산포IC를 빙그르 돌아 자유로를 접어들며 남편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따뜻하다.

‘ 사실은 오늘 당신에게 사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어쩌면 당신은 나의 능청스런 연극을 그대로 믿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할 것 같네요 당신의 따뜻해진 미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입밖으로 튀어져 나온 말은 전혀 엉뚱했다.

“ 여보 저 앞에 무인카메라 알죠 ?조심해요!벌금이 육만원이래요 ”(끝)

--2000년 여름 실천문학 수록



안덕훈 소설가.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 수상. 작품 [운정 가는 길] [카레라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