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책소개>

“공룡시대, 비상구를 찾아가는 시편들”

“……다리 아픈 그녀는 눈썹 긴 달빛에 이끌려 구석구석 검은 재를 채웠네 배신이 무르익는 동안 신나는 호루라기 식어버린 마법을 덤핑 판매하는 호루라기 소리, 붕어 떼는 연이어 태양계를 탈출하고 빵집은 영영 문 열리지 않았지 꼼짝 없이 꿈에 갇힌 날들 나는 간절히, 알싸한 빵냄새를 꿈꾸는데”
- ｢겨울에 살해당한 마법사 이야기｣ 부분

이 시에서 그녀는 붕어빵을 굽는 여자인 듯하다. 노점단속을 하는 호루라기 소리에생계를 굽는 여자의 마법이 산산조각 흩어지는 정황이 짐작된다. 이처럼 이정섭의 시편들은 우리 삶에 대한 슬픔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아니 슬픔을 묻어둔 채 음습한 골목으로 미끄러지며 불온한 이미지와 이미지들이 충돌하는 기제로 작동되고 있다. 눈물을 자르고, 햇빛과 신선한 것들을 배제하고, 그림자 혹은 그늘을 찾아간다.

이러한 그의 시를 두고 이민호 평론가는 “이 시집에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몸의 이미지’와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하부 이미지’는 경직된 우리의 사고와 관념을 깨뜨리는 리얼리즘이다. 시인의 뜻에 따르면, 우리 삶의 모습에서 ‘햇빛’을 허물고, ‘그늘’로 변주시키려는 민중적이며, 탈중심적인 형식이다.”라고 평한다.

김백겸 시인은 표사를 통해 “이 시집에서 시들은 독자의 시선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인식의 낯선 광장에 독자를 끌어들인다. 독자들은 황학동 시장에 모인 제품들이 서로 모여 침묵의 절규를 하는 상황처럼 시편들의 언어가 상상력의 화음을 내는 소리를 듣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2005년 계간 ‘문학마당’으로 등단하기 이전부터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던 젊은 시인. 이정섭 시인이 바라보는 현대는 거대한 공룡시대이다. 먹고 먹히는 자본의 논리와 “경제불황 속 도시는 흉물스럽기 그지없다”(해설에서). 이러한 시대에 전통서정시를 배제하고 상징과 환상과 낯선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작법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의 비상구로 읽혀진다.

대전충남작가회의 사무국장 및 계간 문학마당 편집장 등을 맡으며 지역 문예일꾼으로도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는 이정섭 시인의 첫 시집은 도서출판 심지에서 출간되었다.

<책 속에서>

느티나무 아래 군청색 햇빛이 고여 있다 점점 묽어져 젖은 흙길을 푸르게 물들이는
느티나무를 가로질러 걸어가던 소년이 푸른빛에 녹아내리고
담장을 따라 하늘이 번진다 철책이 자란다 그 곁을 뛰어가는 소녀의 머리가 어두워진다
포로가 된 붉은 가방은 생살 사이에서 딱딱해지고 굳은 다섯 개의 방을 건너 변신하는
소녀의 몸에 금속성 냄새가 이식된다 부패하기 시작한다 머리가 줄어든다 사라진다 머리가 사라진 소녀가 소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눈보라처럼 비상구처럼
느티나무에는 군청색 토르소들 주렁주렁 여물고
그림자 밟은 햇빛은 독한 약품 냄새를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

-「햇빛의 냄새」 전문

<추천글>

이정섭 시인의 시는 사물을 인식하는 기존의 합리적 관계나 개념을 박탈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사물을 집요할 정도로 들여다보는 시선은 사실주의 수법이지만 사물과 사물의 관계 해석은 환상적이다. 그 해석은 익숙한 관계의 전복이라는 점에서 데페이즈망이나 콜라주의 회화적 수법과도 비슷하다. 이 시집에서 시들은 독자의 시선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인식의 낯선 광장에 독자를 끌어들인다. 독자들은 황학동 시장에 모인 제품들이 서로 모여 침묵의 절규를 하는 상황처럼 시편들의 언어가 상상력의 화음을 내는 소리를 듣는다.
_김백겸(시인)

그는 철저하게 현실에서 출발해 그 끝에서 다시 현실을 만나야 가쁜 숨꼬리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그 사이이다. 그가 휘저은 출발한 현실과 종착역인 현실 사이에서 이미지의 성찬으로 오감이 포만감으로 피곤해질 때 뭔가가 생긴다. 그 사이에는 은밀한 욕정이 엽기와 버무려지고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농담과 화해하고 팍팍한 삶의 거리감이 B급 영화의 스틸사진 몇으로 속살을 드러내고 벌어진 관념의 틈새가 우주적 판타지라는 옷을 입는 모든 요소들이 분말로 녹아 있다. 다시 현실이다. 그러나 돌아온 현실은 출발했던 현실과 다르다. 이 화려한 과정이 질러놓은 현실은 뜻밖에도 무채색이다. 그것이 그의 세계관이자 그가 결국 자신을 걸러내 버리고 시로 해석한 세상이다. 어쩌면 참 소심한 세상이다.
_김병호(시인)

<시인소개>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2005년 《문학마당》으로 등단했다. 2006년부터 대전충남작가회의 사무국장 및 청소년문예지 《미루》 편집위원, 계간 《문학마당》 편집장 등을 맡아 지역문예 일꾼으로 헌신하고 있다. ‘젊은시’와 ‘엽서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