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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삼각관계 (수정)
이름 유중원 이메일



삼각관계

 

 

 

재판관에게 네 가지가 필요하다.

친절하게 듣고, 빠진 것 없이 대답하고,

냉정히 판단하고, 공평하게 재판하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기하학에서 삼각형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은 세 개의 점을 이으면 만들어진다. 각기 두 개의 점이 하나의 선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렇게 이어진 세 개의 선이 삼각형의 변을 형성한다. 삼각형에는 정삼각형, 직각삼각형, 두 변과 두 각의 크기가 같은 이등변삼각형이 있고, 이등변삼각형은 다시 예각삼각형, 둔각삼각형이 있다. 그러나 정삼각형은 같은 크기의 세 각과 같은 길이의 세 변을 갖추고 있으므로 조화를 상징하는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 모든 평면도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혼자 또는 하나가 아니다. 반드시 둘이 있고 그건 틀림없이 남자와 여자를 말한다. 사람 ‘人’ 자를 보라. 남자와 여자가 서로 기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상기해보라. 하지만 둘이 있으면 반드시 셋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남녀가 결합하면 몇 사람이 존재하는가. 세 사람이 존재한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식이 존재하지 않는가. 유대인들은 아버지, 어머니,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삼위일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삼각형인 것이다. 셋은 신이 선택한 수이기 때문에 행운의 수이다. 그러나 셋은 무한히 증식한다. 신이 최초의 인간들에게 번성하라고 명령한대로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어났으니, 지금 지구상 인구는 70억 명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 말씀이 있었던 태초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형사소송이란 역사적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한 인간의 지난한 삶의 단면을 정교한 언어로 서술한다는 의미에서 서사시이고 또한 소송 주체들의 내면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 끊임없이 극적으로 폭발하는 시적 특성이 나타나므로 서정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형사 법정은 변증법적으로 진행되는 그러한 논리의 세계라고 하기보다는 죄와 벌의 긴장관계를 팽팽하게 연결하는 신비한 힘이 작용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은 어두컴컴한 밤의 세계이기 때문에 절망적이면서 신비한 것이고, 시는 인간의 사고와 분출하는 감정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으므로 형사 법정은 시적 창조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이들 시를 휘갈겨 쓰게 만들면서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누구일 것인가? 누가 알겠는가? 전지전능한 신인지, 신의 섭리인지, 아니면 (어떤 운명이건 운명은 운명이므로) 운명인지, 아니면 단지 법률, 제도, 관습인지.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시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검사는 최초의 기소자이므로 시적 발화자이고 피해자의 수호신이고 그러므로 복수의 청부업자이다. 변호사는 죄인의 대리인이고 인권의 수호자로 자처하지만 실은 돈의 노예이다. 그렇다면 판사는 누구인가? 사법 권력의 화신으로 법정의 주재자이지만 지극히 냉엄한 비평가이고 잔인한 사디스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 속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작동하는 공판정에서 삼각관계는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양형을 둘러싸고, 둘은 웃고 하나는 울어야 하는, 또는 하나는 웃고 둘은 울어야 하는, 아니면 셋 모두 울어야 하는 긴장된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판정에서 그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비이성적인 인간사회의 현실에서, 그 축소판인 공판정에서 결코 동등한 삼각관계, 즉 정삼각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서울지방법원 형사법정.

법정의 뒷문이 열리자 재판장을 선두로 우배석, 좌배석, 법원 서기 순서로 입장했다. 모두 권위의 상징인 거추장스러운 가운을 걸치고 있다. 재판장이 법대 가운데 의자 앞에 멈춰 섰고 배석 판사들이 그의 좌우에 자리를 잡았다. 법정은 그 엄숙한 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판사들이 자리에 앉자 법정 정리가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라고 말했고, 그제서야 방청객은 띄엄띄엄 자리에 앉았다.

법정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재판장이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으면서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로 방청석을 내려다본다. 벽면에 걸린 원형 시계의 분침은 10시 10분을 지나고 있다. 그는 컴퓨터 화면을 훑어보며 오늘 진행해야 할 사건들을 점검한다. 그러고 나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재판장 : 이제는 증거조사가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지난 기일에 예고한 대로 오늘은 반드시 결심을 하겠습니다. 구속만기가 다 돼 갑니다. 검사께서 구형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형사 재판은 지겨워, 정말 지겨워. 민사부로 옮기려면 아직 6개월이나 남았으니. 요즘 마누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불만으로 가득 차있지. 혹시 이혼을? 도대체 뭣 땜에? 걔는 자폐적이야, 온통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으니까. 어쩌려고? 무언가 잘 못 돼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살지 못하고…… 범죄가 넘쳐나고 있지. 그 때문에 재판을 해야 할 사건은 캐비닛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거야. 요즈음은 재판을 끝내는 사건보다 신 건이 더 많이 들어온다. 저절로 한숨이 새 나올 수밖에 없다. 재판을 빨리 끝내야지.

마음이 뒤숭숭해서 도대체 기록이 읽어지지 않아. 내 손아귀에서 기록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판사가 기록을 읽을 수 없다면…… 직업적 타성인지 매너리즘인지. 그 불투명한 순간에 대충 띄엄띄엄 넘긴다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되겠지.

 

검사 : 지난번 사건은 공판 검사가 무능하고 불성실해서……? 재판을 대충 대충 하더니만 무죄가 나오고 말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너무 진술에만 의존했는데 법정에서 이를 번복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인가?

그 사건은 법리 오해도 수사 미진도 아니었어. 그냥 증거의 평가에서 법원과 검찰 간 견해 차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 자식이 무죄라고 해서 양심까지 무죄인 건 아닌 거야. 판사 역시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부족하다고 느꼈겠지.

그런데 그 판사는 자기가 뭐 인권 판사라도 되는 양 설치는 작자였지. 위에다는 유죄를 장담했는데 체면도 안서고. 금융조사 전문 검사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만 거야. 그리고 평가점수에서 3점이나 깎였지.

그래서 도저히 그 인간에게 맡겨 놓을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올 수밖에 없었지.

나를 믿고 이 사건을 배당한 거였어. 수사가 지지부진할 때는 부장검사가 도와준 거야. 윗선에서 돌려서 이야기하거나 은근히 눈치를 채게 하거나 하면서 수사에 간섭하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더욱 마음이 무거운 거지.

이 사건은 내가 직접 공판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 거야. 증인 신문이 아주 중요하거든.

이 사건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 6개월씩이나 고생고생하면서 수사를 했는데. 대포통장과 해외로 이채한 자금은 추적이 불가능했던 거야. 그래서 수사기술이 필요한 사건이었다고.

그 투자 자문사의 상무를 어르고 달랜 거지. 그 친구 겁을 주니까 사시나무 떨듯 지독하게 떨더구먼. 빼주는 조건으로 결정적인 제보를 받아냈지. 압수 수색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서류까지 받아냈던 거야.

그 친구를 보호해주면 나한테도 불리할 것은 없으니까 해외로 장기여행을 보내주었거든. 그럴 수밖에 없었지.

옛날엔 48시간 동안 조사했단 말이야. 그 시절이 좋았어, 그 시절이 그립구만. 그때는 밤새 조사하면서 심하게 윽박질렀지. 그랬으니 불지 않고 어떻게 배겨내겠어. 희한한 일이지만 대개 새벽 두 시쯤이면 어김없이 자백을 했다.

그런데 대화 시간이 중간에 끊기면…… 피의자를 설득시켜 자백하게 만드는데 시간이 부족하단 말이야. 그래서는 안 되는데…… 다음 날엔 마음이 쉽게 변하는 거야.

누군가는 인격수사 운운했는데 정말 현실을 모르는 한심한 소리라고. 그렇게 해서 수사가 되느냐 말이지.

계좌 추적이 안되니까 참고인 진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 그 역시 진술이 여러 차례 오락가락했지만…… 원래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진실에 다가가는 거지. 검사에게는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저쪽에서 부인하던 말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수사검사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언제나 검사로서 직업정신에 충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수사 의지가 중요한 거야. 수사는 생물처럼 살아서 꿈틀거리니까 말이야. 그러나 수사라는 게 100프로 완벽하게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계좌 추적에 실패한 것이 찜찜하고 증인들의 증언도 약간 엇갈렸지만 큰 문제점은 없다고 봐야겠지. 법정에서 하는 증언은 늘 그 모양이거든. 증인들의 증언은 언제나 그렇다.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앞에서 한 말을 번복하고 그러니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 인간의 기억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또 하나 저쪽에서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지. 그 계약서를 말하는 거야. 늙은 사무장 양반은 완전히 브로커이지. 변호사하고 50대 50으로 나눈다고 했는데 그 여우같은 양반 똑똑하기가 변호사 뺨을 치지. 그 양반 변호사법 위반으로 나한테 코가 꿰었으니까 계약서 사본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어. 그게 아주 중요한 보강증거가 되었거든.

저 변호사는 대학의 서클 후배이니까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잘 아는 사이인 것은 맞는 말이야. 술 마시고 광란의 밤을 보내는 서클의 후배. 그땐, 우린 철없이 젊었었다. 쟤도 술만 마시면…… 무엇을 증오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에 받쳐서 악을 고래고래 지르고 반쯤 미치지만 그래도 귀여운 친구였거든. 그때는 정의감도 살아있었고 낭만적이었지.

뭐라고……?! 판사는 심판하는 인간이고 검사는 심판 받는 인간이라고? 그건 판사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지. 꽁생원 주제에…… 검사나 판사나 법적 자격요건이 똑같은데 우리가 꿀릴 게 뭐람.

판사도 훌륭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어서 매우 답답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검사를 선택했거든. 하지만 검사를 선택한 인간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한 구석에는 권력에 대한 욕구나 집착이 도사리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걸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법원에서는 공익의 대표자인 검찰을 우리가 힘껏 지원해주어야지 방해하면 안 되지 라고 생각하고 있어.

저 재판장은 믿을 만한 거야. 검사들 사이에서 아주 평판이 좋은 거야. 정말이지, 믿을 만하지. 대부분 유죄이고 형이 무척 세니까. 그의 머릿속에 무죄는 없을 거야. 그는 인간혐오증에 걸려 있다고 봐야겠지. 교회에 다닌다고 하지만 가톨릭 냉담자가 아닐까? 맙소사, 할렐루야. 그렇다면 무신론자이고 회의론자가 아닐까? 그러니 내가 중형을 구형하면 내심 아주 좋아할 거라고. 그럴 거라고.

피고인, 이 자식 도저히 못 빠져나갈 거야. 내 손아귀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이 될 거야. 그렇다니까.

내가, 검사가 정의의 칼 맛을 보여주는 거야. 네놈이 당뇨에 심장병이 있다고 하였는데 안에서 골골하다가 죽어야만 하지. 저런 개자식! 악마 자식!

승부는 진즉 끝났다고. 너무 싱겁게 끝났단 말이야. 변호사가 되가지고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반대심문에서 핵심을 놓친 거라고. 변호사는 무능해. 네 놈은 쓸데없는 방어태세를 취했단 말이지.

또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나. 출퇴근이 가능한 서울 근교로 갈 수는 없을까. 호남선은 싫어. 누구처럼 나를 끌어줄 든든한 빽줄이 있어야 하는데……. 족보 있는 검사가 부러워.

검찰은 권력의 주구이거나 권력의 시녀인 거야. 정권의 충성스러운 파수꾼. 그럼 나는 누구란 말인가? 파수꾼의 파수꾼, 파수꾼의 들러리.

검사들은 인사에 굉장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나서도 다음 인사를 걱정하는 게 검사다.’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고 돈다. 그런데 파수꾼을 자처하는 높은 분들이 내 평가자료를 쥐고 있으니 이를 어떡한담.

어느새 내일 모레면 검사 10년차다! 나이는 어떻고!

지금쯤 훌훌 털어버리고 개업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마누라는 요즘 성화가 심하지. 애를 데리고 캐나다에 가겠다고…… 그래서 나더러 기러기 아빠가 되란 말이지. 이제는 생각할 때가 되었지 않은가? 이제는? 부장은 하고 나서…… 꾹 참고 기다려야 할까?

그때, 술자리이긴 했지만…… 높은 분이 말씀하셨지. 내가 높은 자리에 와보니까 알겠더라고. 승진을 해서 올라가면 그럴수록 넓게 보이더라고. 예전에는 법조문만 가지고 사건을 따졌는데 위로 올라가보니까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것이 참 많아지더라고.

지금은 그런 시대야…… 시대가 변했으니까. 권력은 총에서 나오는 게 아니란 말이지. 법치주의 시대가 도래하니까 권력은 검사의 칼끝에서 나오는 거지. 나는 지금 검사의 권위를 맘껏 즐기고 있는가? 캐비닛에 쌓여 있는 미제 사건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참에…… 전관예우를 받으면서 그냥…… 저 녀석처럼 말이야.

 

벌써 12월이다. 금년 한해도 저물었다. 아침부터 구름이 낮게 드리운 찌뿌린 날씨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비가 내리거나 첫 눈이라도 내릴 기세다. 막상 눈이 내리다가 비로 바뀔 지도 모르겠다. 습한 공기는 텁텁했다.

검사는 집을 나서면서 ‘나를 이토록 짓누르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곰곰이 생각했다.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머릿 속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재판이 끝나는 날. 나는 왜 홀가분하지 않는가? 지금 뭘 두려워하고 있는가? 구형량은? 결심을 했단 말인가? 오늘 재판에서 검사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 마지막 순간을 고뇌하고 있는가? 그러나 실제 그렇게 심각하게 고뇌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늘 했던 대로 하면 되는데 뭣 때문에?

나는 연민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의 여위고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아니면 피해자를 대신해서 복수의 감정으로 그를 노려보아야 하는가? 사무적인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멀거니 바라보아야 할까?

검사는 상대방을 조롱하듯이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가 바닥에 발을 굳게 딛고서 일어섰다.

검사는 딱딱하고 굳은 얼굴로 잠시 건너편에 나란히 앉아있는 변호사와 푸른 줄무늬 수의를 입은 초췌한 얼굴의 피고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피고인의 애매모호한 눈빛과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다시 법정의 궁형 낮은 천장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알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검사가 말했다.

이제는 그 철면피한의 가면을 벗길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판사님이 그걸 벗겨서 엄중하게 단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피고인 정의경은 이 신성한 법정에서도, 수사 과정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지그재그로 애매하게 진술하고 자신의 허구적 논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가 쓴 모순투성이 진술서를 보십시오. 그게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자기 죄를 인정하겠다는 말 없는 긍정이겠지요.

한 인간을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시키고 파탄으로 몰아넣었으니, 이는 정신적 살인 행위입니다. 그러니 입이 열 개라도 무슨 구차한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였던가……? 무조건 사랑을 하면 배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불쌍한 피해자는 사랑의 배신 때문에 죽음보다 더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친 듯이 절박하게 사랑하니까 이를 철저히 이용해 먹은 것이죠. 지금 극도의 신경쇠약 때문에 정신과적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피해자의 진술조서를 성립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은닉해 놓고는 피해액을 변상할 생각이 추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눈곱 티끌만큼도 반성의 기미가 없습니다. 피해자는 그 막대한 재산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것입니다.

변호인의 의견서를 보면, 그건 모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상당히 작위적이고 실질적으로는 창작에 불과한 소설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삼류 소설이지요.

그래서 중형 구형이 불가피합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3조를 적용해서 무기징역형에 처해 주시고, 추가적으로 범죄수익은닉규제및처벌등에관한법률 제8조를 적용해서 황금에 눈이 어두운 자로부터 범죄 수익을 완전히 몰수해주기 바랍니다.

 

재판장 : 검사가 지금 살기가 등등하지. 검사로서 입증책임을 다했다고 자신하고 있는 거야. 저 검사는 제멋대로 무기징역을 구형하고 있는 거야.

피고인이 계속 검사의 질문에 묵묵부답했으니까 괘씸하게 생각했을까? 그런 사적 감정 때문일까? 피고인이 가담한 정도를 고려하면 검사는 오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재판부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수사가 끝나고 나서 그 결론으로 아니면 지금 즉석에서 임기응변으로 구형량을 결정한 것인가? 정말 제멋대로야. 이 사건에서 검사의 구형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증거는 충분하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지. 그런데 대법원의 양형조건을 고려는 한 것인지.

그런 걸 믿고 있겠지. 판사의 선고 형량은 구형량의 절반이라는 속설…… 우리는 검사의 구형이 얼마이면 대충 그에 때려 맞춰 정했다. 그러니까 실제 선고는 판사가 하지만 검사가 선고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검사에게 부탁해서 구형량을 줄이려고 하고……

누가 뭐래도 내가 이 법정을 지배하고 있는 거야. 법정 모욕과 저항에 대해선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하지. 어쨌거나 형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검사가 하는 것은 아니지. 이건 검사보다 판사가 더 높으냐, 또는 검사도 판사와 똑같이 높으냐의 문제란 말이지. 그러나…… 왜 법대는 높고, 그래서 판사가 검사를 내려다보느냐고, 그걸 검사는 깨달아야 할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나는 판사이거든. 판사란 말이야, 판사. 그건 아주 초보적인 상식인 거야.

과연 법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게 가진 자를 위한…… 그러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닐까?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어.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그건 헛소리야, 개소리야.

그러면, 검사와 판사의 형량에 엄청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률 전문가가 똑같은 법조문을 적용하는데 말이야. 그것도 관행이라고? 사법 불신의 원인이 아닐까?

그런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위 말하는 시국사건에서는 법원은 검사가 구형하는 대로 선고하지 않았던가. 오직 판결을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영혼이 없는 법 기술자에 불과했던 거지. 만약 내가 그 시절 판사를 했다면…… 나는 겁쟁이인데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검사는 잔인하고 판사는 인간적이라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오히려 판사는 비겁한 작자들이겠지. 어설프고…… 꾀죄죄하고…… 겁쟁이들.

우리는 재판이 끝나는 이 시점에서 심증 형성을 끝마쳤는가? 합리적 의심 없이 말이다. 6개월간이나 재판을 했으면서…… 정말 인내심이 필요한 지루한 재판이었다.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어, 실체가 도대체 뭔데? 진실은 무엇이고 어디에 꽁꽁 숨어있는가? 신이 아닌데…… 인간은 신이 아니지 않은가. 죄와 벌의 형평성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관습적으로, 자의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거야.

배석들은 뭐하는 거야? 배석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주심이 무슨 할 말이라고 있을까? 그렇지. 눈치를 보니까 재판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군. 지루하겠지. 나는 그들과 함께 심의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타협해야 한다.

그러나 암담한 현실은……? 배석은 판결에 있어서 각자 3분의 1 지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법률이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지분 전부를 스스로 부장한테 반납한다. 그래서 부장이 전부 결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들은 굴종한다. ‘부장님, 결정하신 쪽으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나도 그 시절 그랬던가?

 

변호인은 할 말씀 있으시면 마지막으로 하시지요. 짧을수록 좋겠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 재판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변호사는 검사의 무기 구형에 일순간 얼어붙었다. 법정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압박감을 느낀다. 어떻게 무기씩이나…… 검사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아 보라지……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기록을 뒤적이고 있는 법대의 판사를, 당당하게 앉아 위세를 떨고 있는 건너편 검사를, 법정 서기를, 딱딱한 나무 방청석에서 몸을 뒤척이는 몇몇 방청객들을 얼핏 바라보았다. 그는 옆에 앉아있는 피고인을 애써 외면한다. 다행스럽게도 피고인의 가족들은 재판 내내 오지 않았다.

 

변호사 : 저 검사는 서클 선배이어서 전화까지 해서 부탁했는데 어떻게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있단 말인가. 요즈음 분위기에서 찾아가는 건 피차간에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구형하면 내 체면이 뭐가 되느냐 말이야. 정말이지 못해먹겠어.

그리고 말이야, 그 상무 놈은 해외로 빼돌리고…… 죽일 놈. 그러나 미꾸라지 같은 공범이 해외로 도망 가버린 것은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고 꼭꼭 숨어있어야만…….

피고인은 나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거야. 그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와 나 사이에 깊은 불신의 벽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 뛰어난 미모의 여자와 피고인의 관계는? 이경순? 혹시 불륜관계? 그의 말마따나 주식투자를 조언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단순한 고객이었지만…… 점점 깊은 관계로? 검찰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거든. 그 여자도 그걸 부인했다고 하니까. 어쨌거나 그 많은 돈을 날렸으니까 피해자인 거지.

내가 변호인인데 이 사건의 실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건 검사도 판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들은 애꾸눈이나 다름없어. 검사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점은 무시하고 불리한 점만 찾고 변호사는 유리하거나 정상 참작이 되는 쪽만 찾으니까. 하지만 판사야말로 기록에만 나타난 껍데기만 알고 있는 거지. 그게 판사의 한계란 말이지.

우리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귀신 곡할 노릇이네. 그 중요한 계약서가 사무실에 있었는데 그 사본이 어떻게 해서 검찰에 넘어간 거야? 모두가 글러먹었어. 저런 검사에 저런 판사라면. 사디스트들.

그렇다면 피고인의 형은 어떻게 되는 거야? 진짜 중형을? 뭘 기대할 수 있을까? 변론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알게 뭐야. 돈은 받았으니까 해야 하는 거지 뭐. 그러나 그럴듯하게, 아주 그럴듯하게 해야겠지.

이왕지사, 돈을 벌어야만 하니까, 큰돈을. 얼마나 벌어야 될까? 전관예우가 벌써 끝나가고 있어. 그러려면 날고뛰는 유능한 브로커가 필요하지. 크고 작은 사건을 물고 와야 하니까.

판사와 변호사는 전혀 다른 직업이야. 난 변호사란 말이지. 개뿔이나 무슨 정의감? 그게 밥 먹여주나.

우리는 견해 차이를 넘어서 정의의 관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거든. 다시 말하면 검사의 정의, 판사의 정의, 변호사의 정의가 다르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골프가 점점 안 맞고 있어, 계절 탓일까.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마음을 당분간 붙잡아 둬야…….

지난 6개월 동안 재판을 하시면서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금융계좌 추적을 위해서 신청한 그 많은 사실조회신청을 전부 받아주신 배려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추적이란 게 끝내 막다른 골목에서 막혀버렸기 때문에 피고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피고인은 무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사재판에 있어서 엄격한 증거의 법칙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고객을 소개하고 또는 자금을 유치해주고 그 수고비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검찰은 뒤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이 사건의 주범이고 핵심인물은 중국인지, 동남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이미 해외로 도피했는데 검찰이 무능해서 출국금지를 뒤늦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겠죠.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검찰은 금융계좌의 추적에도 실패했습니다. 이 사건 공판에서도 계좌 추적을 하기 위해서 여러 금융기관에 사실 조회를 하였지만 나온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돈은 전부 그 무늬만 화려한 벤처기업으로 입금되었고 피고인이 받은 돈은 자금 유치에 대한 수고비조로 받았기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증인들은 직접적으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역시 도저히 믿을 게 못 됩니다. 그들이 증언할 때 왜 저기 있는 검사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숨소리에서 왜 비린내가 풍겼을까요? 그들의 입에서는 왜 악취가 났을까요?

검사의 달콤한 회유, 너무나 달콤한 사탕발림에 끌려 이 법정에서 한 증언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검사 앞에서 충분히 예행연습을 했다는 말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이 과연 증언할 자격이 있을까요? 판사님은 인간의 희미한 기억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뚜렷한 기억일수록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이어서 결국 소설에 불과합니다. 더 나아가면 멜로드라마가 되겠지요. 그렇지요. 기억은 망각일 뿐입니다. 망각이란 말입니다. 이 모든 사건은 잊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잊히는 것 말고는 달리 써먹을 데가 없는 것이지요.

왜? 검사는 이 법정에서 끝내 원본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본만을 흔들고 있을까요? 어떻게 원본이 없는 사본을 증거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증거로 제출한 서류나 계약서 등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피고인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서류는 그 자가 작성한 것이지 피고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계약서 말입니다만, 피고인은 그 계약서에서 당사자도 아니고 단지 입회인에 불과하였습니다.

피고인이 범죄수익을 은닉했다고 하는데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이 샅샅이 찾아봤지만 숨겨 논 재산은 없었습니다. 몰수형 구형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가령 유죄라고 심증을 굳히신 경우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의 모든 정황을 살펴보면 피고인이 역시 피해자인 점을 감안하시고, 피고인이 어쩔 수 없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초범이고, 내심으로는, 그의 영혼만은 많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참작해서 집행유예를 선고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재판장 : 돈을 많이 받아먹은 변호사의 면피용 그럴 듯한 변론이군. 피고인과 그 가족들이 들으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궤변에 불과한 거야. 나중에 변명을 하겠지. 변호사는 최선을 다하여 할 만큼 했는데 판사가 그 모양이었다고.

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변호사가 없어야 하는가? 그 곳 주민들은 변호사란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인간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저 피고인은 그 흔해 빠진 탄원서도 쓰지 않았어. 차라리 잘됐지, 읽기 지겨운데. 그런데 저 변호사는 그 내용이 뻔하디 뻔한 변호인 의견서라는 것을 써냈지. 내가 거기에 속아 넘어 갈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걸. 뭐 억울하다고? 뭐가? 가사…… 뭐가 어쨌다고?

이 세상에 지금 정직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인가. 가령 정직이 있다고 해도 그게 최선의 방책일 수 있을까. 그러니까 거짓과 기만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 거지.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란?

나는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서 오랫동안 판사 노릇을 했지만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저지른 오판이란 죄를 어떻게 감당한담…….

무죄추정주의는 아주 오래 전에…… 아마 탄생한 순간부터 진즉 죽어버렸다. 그렇지 않은가. 그건 범죄자 인권을 외치는 위선자들의 요란한 구호에 불과한 거지. 우리들은 모두 유죄추정주의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다. 기소된 작자들은 다 인생에 실패한 죄인이 틀림이 없으니까, 설령 이번 죄가 무죄라고 하더라도 그 동안 저질렀지만 들키지 않았던 죄 때문에 어쨌거나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

유죄이건 무죄이건 그 따위 논리쯤이야 얼마든지 만들면 된다고. 그에 걸 맞는 법률해석은 나중에 갖다 붙이는 거야. 그게 그거라고. 판사가 양심을 저버리면 그런 건 식은 죽 먹기야.

그런데 저 변호사는 또 무죄 타령이군. 저 자는 언제나 무죄 주장이야. 연쇄 살인범에게도 무죄 주장을 할 거니까. 그리고 이 신성한 법정에서 선서한 증인이 한 증언을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깡그리 부정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그건 형사소송법을 능멸하는 짓이지. 증언의 신빙성은 내가 판단하는 거야, 바로 내가. 나는 판사란 말이지.

변호사들은 집행유예를 어김없이 상투적으로 들먹이고 있는 거야. 나를 지금 잘 설득하고 있는 거냐? 그게 옳은 변론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나 역시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저 변호사, 단독판사를 그만두고 개업하면서, 그때부터 이미 브로커 쓴다고 소문이 났던데. 유능한 브로커를 몇 명씩이나 두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돈을 벌어서…….

승진은 무슨, 누가 승진시켜 준대?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뭐 대수인가? 법원 행정처를 축으로 한 법원의 관료주의란…… 나는 그 쪽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나는 언제쯤 단독 개업을 해야 하나? 요즘은 전관예우가 예전만큼 못하니 차라리 대형 로펌으로? 오라고 하는 데가 있긴 있을까?

단독 재판을 처음 하던 날이 생각나는군. 나는 그때 얼떨떨하다가 그대로 얼어버렸지. 방청객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순간. 머리가 빙빙 돌고 법정도 함께 돌아버렸지. 벽들은 뒤틀리고 천장은 바닥이 되고 바닥이 천장이 되고 말이지. 그러니까 목소리가 잠겨서 잠시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었지. 어렸을 적 일이지만 사람들 앞에만 서면 덜덜 떨며 말문이 막혀버렸거든.

그런데 벌써 20년이나…….

판사가 되려는 자는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육체를, 마음과 정신, 감정, 지성, 영혼을 점검하고 이해해야 한다.

내가 자기 직업을 언제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어떤 종류의 죄책감을 느꼈던 일은? 나는 형을 선고하면서 쾌감을 느꼈던가? 아니면 고통을 느꼈던가? 언제 자신에게 의혹을 품어본 일이 있었던가? 한번쯤 법대에 앉아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감 때문에 셔츠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은 경험이 있었던가? 나는 가끔 악몽을 꾸는 일이 있었던가? 그 악몽 때문에 불면하는 밤은?

나는 국가의 대리인인가? 나는 법복을 입고 높은 법대에 앉아있다. 그러나 법복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무대 위에서 지그재그 춤을 추는 광대이다. 판사라는 직업은 나를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피폐하게 만든다. 누굴 위한 재판이란 말인가? 피고인을 위한, 국가를 위한 재판? 아니다. 나를 위한 재판이다.

 

피고인, 당신이 무죄랍니다. 만약 아니라면, 당신의 영혼을 들먹이며 집행유예를 선고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빌고 있군요. 마지막으로 진술하시지요. 할 말이 있다면 말입니다.

 

피고인 : 이쪽 사람들은 제멋대로 침묵을 묵묵부답이라고 하더구먼. 너희들이 침묵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는 하는 거야…….

그런데 저 검사가 어떻게 저럴 수가? 다 자백하면 잘 봐주겠다고 끈질기게 회유하더니만, 그거 별 것도 아니야,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그래봤자 경제사범이고 너는 하수인으로 이용되고 푼돈이나 받은 종범에 불과하니까, 피해자도 돈에 눈이 어두워 몰빵했으니까, 대충 집행유예가 나올 거라고 했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런데 무기징역을 구형하고 막대한 재산을 숨겨놨다고 하지 않나? 내가 주식 투자를 하고 도박을 하면서 다 날렸다고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진술했었다고.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네…….

나는 그때 구치소에서 별을 보고 검찰청으로 나갔다가 별을 보면서 돌아왔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수갑을 채운 채 몇 시간씩이나 벽을 보고 서 있게 하는 등 심한 모멸감을 주었다. 그러므로 굉장히 불안한 심리 상태에 있었고 집중력과 체력이 현저히 고갈되었다.

어느 날 부장 검사가 자기 방으로 불렀다.

잘 불라고…… 수사라는 게 코에 걸면 코걸이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야. 우리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하면 얼마든지 봐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당신 와이프를 소환할 수도 있어.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렇게 불러서 하루 종일 이것저것 다 물어볼 수 있어. 그러면 와이프 심정이 어떻겠어?

그리고 말이야…… 당신 집을 다시 한 번 압수수색할 수 있거든. 집안을 홀랑 뒤집어서…… 애들 앞에서 진짜 개망신을 주는 거지.

이랬다저랬다 하면…… 검사를 노리개로 아는 거니까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그게 알고 보니 나를 옭아매서 교묘하게 사람을 잡는 반은 치사한 공갈이고 반은 협박이었다.

변호사는 말했다.

검사한테 미운 털 박혀서 어쩌려고. 무조건 빌어라. 별 수 없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서에 꾹꾹 눌러서 지문을 찍었다.

검사가 말했다.

법정에 가거든 무조건 증거에 동의하란 말이야. 변호사는 헛개비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부동의하면 사내답지 못하는 거야. 재판장이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겠지.

재판장은 ‘죄를 지은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라고 생각하겠지. 그러고 나서 “재판을 끌자는 거냐” 라고 힐난할 거야. 그러니까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

어떻게 하면 저 비열한 인간에게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복수의 화신이야. 이번 사건도 복수 때문에 일어난 거지. 내가 언젠가 나가게 되면…… 그때는 변호사를 하고 있겠지. 찾아가서…… 다짜고짜 이 새끼야! 날 알아볼 수 있겠어! 내가 누구지! 그러고 나서 어떻게 처리한담……?

나는 마지막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생각을 정리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이 사건은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자 공범들이 도망가면서 자기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돈은 내가 전부 가졌다고 떠넘기며 그 여자를, 엉덩이가 탱탱한 그 자존심 강한 여자를 부추겨서 고소를 하면서 시작됐으니, 그 일당을 잘못 관리한 내 잘못이기는 하다.

그들은 당초에 맺었던 철석같은 약속을 어긴 것이다. 자신들은 열심히 연구와 실험을 계속했고 모든 투자금은 마지막 실험을 위해서 해외 구좌로 송금하였는데 나는 단지 투자자를 소개해주고 소액의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고 나서 미국 연구소에 의뢰하여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마지막 단계의 실험이 지체되고 있다고 변명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실험 지체를 핑계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 연구소장이 말했다는 것이다.

이건 순전히 그 인간 때문입니다. 자금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요. 자금관리를 그가 했거든요. 배달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으니 마지막 결정적 단계에서 마무리가 안 되는 거죠. 그게 끝나야 특허출원을 하는데 출원을 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정의경이가 모든 걸 망쳐놓은 것이죠.

나쁜 자식! 개자식!

그러나 그들이 당초 약속을 어기고 욕심을 부렸지만 내가 많이 양보해서 공평하게 나눴으니 분배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없는 거였다. 하지만 그들이 배반했다. 예정되어있던 모든 시나리오가 어긋나버렸다.

나는 긴급 체포되었고 바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나는 그때 이러한 사태를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을까?

그걸 이해할 수는 있다. 그 사기 전과범은 동물적 감각으로 무슨 낌새를 눈치 챘던 것일까? 만약 수사가 시작되면 자신들 역시 꼼짝없이 엮이게 되니까 나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일찌감치 해외로 삼십육계를 한 것이다. 애시당초 그들을 믿은 내가 바보라고 할 수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그리고 어떻게 철석같이 믿었던…… 믿는 근거는 깜짝 놀랄 만큼 꽤 많은 돈을 주었으니까…… 그 상무가 유리하게 진술을 해주기로 한 철썩 같은 약속을 어기고 해외로 내빼다니. 더러운 세상에 믿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별게 아니지. 중요한 사항은 나 혼자 결정했으니까 말이야.

일반적으로 보자면 피해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실체는 무엇이던가? 그자들은 황금을 쫓던 자가 아니던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누굴 탓할 수 있겠어. 법이 인간의 탐욕까지, 더러운 욕망까지 보호해야만 하는 거야?

저게 내 변호사 맞아.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줬는데……. 무슨 마지막 변론이 이래. 너무 뻔한 소리 아닌가. 검사가 무기를 구형했는데…… 판사는 콧방귀도 안 뀔 거야.

그 늙은 사무장이 자기 변호사는 판사 출신이고 무죄를 잘 받아낸다고 해서…… 무죄 전문 변호사라고 해서. 아직도 전관예우를 듬뿍 받고 있다면서 무죄를 장담했는데…….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반신반의하자 두고 보라고,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집행유예보다는 무죄가 훨씬 쉽다. 판사가 무죄라는데…… 누가 토를 달 수 있겠어.

그런데 압수수색을 피하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서 잘 보관하라고 건네 준 계약서가 어떻게 검찰에 넘어갔느냐 말이야. 그 계약서에 뭐가 들어있었던가. 그걸 도장 찍으라고 들이민 것은 그 여자 쪽인데…….

그날 투자 협상은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계약서는 그 결과물이었다. 그녀는 계약서를 내게 맡기면서 말했었지.

애정도 없는 돈 많은 늙은 회장을 내가 먼저 차버린 거야. 정신은 천박하고 육체는 빈약했지. 내가 그랬다고. 그래서 이혼을 한 거고. 나에게는 평생 처음인 사랑인 거지. 모든 게 그 신파조의 사랑 때문이야. 나의 사랑만큼은 의심해서는 안 될 거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런 포악한 짓을 할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잘 알아둬야 할 것이 나는 칼립소가 될 수는 없지. 그녀는 불사의 여신이지만 나는 인간에 불과하니까. 널 놓아줄 수는 없어. 절대로…….

나는 변호사의 제지를 무릅쓰고 그녀의 검찰 진술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증인으로 나와 법정에서 마주치는 일만은 피해야만 했다. 이 법정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와 변호사가 말싸움을 벌이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의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고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 쳐다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외면해야? 한 때는 맨살을 비벼대며 그토록 사랑했으면서 말이다.

나는 지금쯤 그녀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리차드 반필드의 명언을 인용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거기에 함께 살고 있다.

 

지금 재판이 끝난다고 하니까 돌이켜보자고. 우선 나 자신에게 결론을 내려야할 것이 아닌가. 내가 무죄라고 할 수는 없지. 죄가 있다고 분명히 인정할 수밖에…… 그러므로 내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나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재판이 끝나가면서 며칠 동안 밤이면 좀처럼 잠이 오지 않고 뒤숭숭하였다. 잠이 쉽게 들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바로 잠이 깨어버린다. 잠이 깊이 들지 않으면 그 몹쓸 꿈을, 악몽을 꿀 수 없으니까 그건 좋은 일이다. 어둠 속에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면 문득문득 무수히 떠오른 생각들이 뒤엉켜서 떠올랐다.

내 지나간 인생이 마치 드라마의 장면처럼 빠르게 또는 느릿느릿 스쳐지나갔다. 순서도 없이 제멋대로. 그리고 명징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자초지종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일련의 사건을 복기했다. 어찌해서 기억이 생생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 대로 중소 도시의 좋은 가정에서 자랐지 않은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재수를 했지만 소위 사립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에는 몇 그루의 오래된 사과나무가 서 있었고 가을이면 빨간 사과들이 담장 밖까지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 달콤한 향기란…….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천 강. 새벽이면 밤새 강에서 피어올라온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가 아침 햇빛에 쫓겨 흩어진다. 여름이면 그 강가에서 남동생과 함께 멱을 감고 물놀이하던 기억도…… 초등학교 시절 맨날 소풍을 갔던 탄금대…… 생생하다.

나는 증권 회사를 다닐 때 압구정동 지점과 서초동 지점에서만 순환 근무를 했다. 그 시절은 좋은 기억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기분 나쁜 기억도 없다.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신앙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 내가 성모송과 주기도문을 외우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 신부님을 만나 보기로 했다. 고백성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 어둡고 좁은 사각형 고해소에 앉아있으면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을 숨기고 앉아있는 늙은 신부님이 목이 약간 쉰 듯한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쨌다고? 하느님 앞에 고백을 해 보라고. 고백을 하고 참회를 해야겠지. 하느님 앞에서 뭘 망설이는 거야.

내가 말했다.

굵은 밧줄이 목에 감기게 될 것입니다. 중형을 선고 받고 감옥으로…… 거기서 평생 나오지 못하고 골골하다 죽을 지도 모르지요.

신부님이 말했다.

그렇게도 무서운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건 살인죄가 틀림없겠지? 도끼로 내려친 거냐? 그렇지 않느냐?

내가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살인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이 트림을 하자 역한 마늘 냄새와 도수 높은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느냐…… 어서 말해보라니까. 궁금하구나. 내가 꼭 알아야 할 것 아니냐. 그래야만 용서를 해줄 수도 있고. 내가 하느님이라니까.

……그렇지만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들리고 있느니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네가 지금 억울하다고…… 결백을 믿어달라고 여길 온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요. 아니란 말씀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느냐!

…… 죄송합니다. 죄송.

나는 속이 메스꺼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목구멍이 바싹 말라 버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도저히 내 죄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오긴 했지만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이제 와서 참회라니.

그때는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어떤 종류의 질문에는 결코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부님이 말했다.

…… 우리가 겪은 모든 시련은 하찮은 인간이 능히 감당해낼 수 있는 것들이라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시거든. 어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반드시 마련해주실 거야.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라고…… 신께서 형제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나는 내 사건의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 소위 잘 나가는 법조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주 희미한 윤곽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을 과거급제 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 어려운 법률용어를 쓰면서 법률 전문가인 척 으스대는 인간들. 그들의 뻔뻔한 얼굴들이…… 그들의 오만한 몸짓과 행위와 무수하게 지껄인 말들이……

 

그때는 성공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 때문에 마지막 순간 그 계획을 포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무섭고 두려웠다. 그러나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일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면 말할 수 없이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고 그러고 난 후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면 착잡한 심정에서 절망감이 찾아왔다.

그 무렵 나는 매일 밤 여의도에 있는 단골 술집에서 혼자 독한 술을 많이 마셨고 끝내 엉망으로 취해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을 섞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때 우리는 각방을 쓰면서 별거하는 부부처럼 살았으니까.

그때는 심한 불면증 때문에 만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성공이 확실해지자 통쾌하게 복수하였다는 짜릿한 흥분 때문에 실컷 웃다가 그만 오줌을 지렸다.

지금은 구치소에 몇 달째 갇혀있으면서 수사 과정에서 끝내 대질신문을 거부했던 그녀의 인간적 자존심과 엄숙함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으니 그녀와의 만남을 꺼려했고 두려워했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동했다.

그 여자는 육체뿐만 아니라 초감각적인 영혼까지 나를 사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처음 만나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만큼 놀랐고 두려움마저 느끼지 않았던가. 그녀의 몸에서는 언제나 재즈의 즉흥 연주처럼 비틀고 과장된 야생적인 리듬이 넘쳐나지 않았던가.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녀가 말했다.

육체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거야. 육체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징표인 거지. 사랑은 아름다워. 나는 그 육체를 사랑하고 숭상했던 거야.

그러니까 단순한 향락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섹스를 내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절대적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진정제로 사용한 게 아니란 말이지. 내 순수성을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목말라 했고 그걸 찾아 나섰던 거야.

그러나 나의 경우 육체적 향락이라는 베일이 걷히는 순간 벗겨진 베일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랑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 비열한 인간은 표면적인 것과 숨겨진 의미를 구별할 줄 모를 만큼 단순했으니 밀교적 사랑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 여자의 사랑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나와 동갑이지만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이는 그 여자를 속속들이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솔직했고 곧이곧대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숨길만한 비밀이 없었다. 그러나 결별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계속 전화를 했고 그녀는 계속 받지 않았다. 반대로 그녀가 계속 전화를 했을 때는 내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성미가 급하거나 당돌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성적 쾌감을 한껏 고조시키기 위해 함께 마리화나를 피우려고 설득했을 때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녀와 나누었던 마지막 밤이 언제였든가? 그날 밤 넓은 창문을 통해 은은한 달빛이 침입했었다. 그때는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 그런 인간에 불과하다. 아이라이너를 연하게 그리고 립스틱을 아주 연하게 칠하는 여자. 그녀의 젖은 입술이 내 가슴을 핥고 나서 그녀의 혀가 깊숙이 들어와 축축한 키스를 한다. 입 안에 과일 향과 함께 독한 포도주의 술맛이 퍼진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몸을 활짝 열어준다. 나의 몸 여기저기에 손톱자국을 냈다. 그녀는 매번 다른 향수를 썼고 끝나고 나서는 울었다.

주책없이 그 격렬한 밤들을 계속 떠올리자 사타구니가 끈적끈적해지면서 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으니……

이경순은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돈 많은 이혼녀이고 동시에 육체적 욕망 때문에 몸부림치는 섹스의 화신이었다. 그때는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여의도 일식집 방에서 일어난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여자는 얼큰히 취하자 본색을 드러내고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밀착시켰다. 몸을 격렬하게 비틀고 덤비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단번에 삽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다급했으니까. 그녀는 쉰 목소리로 계속적으로 즐거운 비명인지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그리고 또다시 요구를 하고 또 요구하였다.

그녀는 너무 감동해서 내 가슴에 안겨 한동안 눈물을 쏟았다.

그녀가 말했다.

내 살갗에는 어느새 당신의 체취가 깊숙이 배어있지. 당신과 나는 하나가 된 거라고. 당신은 내 마음속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사건이 시작되었다. 사무실에서 주식 투자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근처 단골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긴지 불과 몇 시간쯤 지나서였다.

그 이후 우리는 매일처럼 만나 먼저 이태리 식당에서 부드럽고 육즙이 많은 로스트비프로 가볍게 식사를 하며 치즈를 안주로 알코올 함량이 20퍼센트에 달하는 붉고 진하고 독한 와인을 마시고 약간 얼큰히 취했었다.

그리고 밤의 열기 속에서 굶주린 동물처럼 몇 번씩이나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였다. 마치 서로를 물어뜯어 삼켜버리는 성난 맹수처럼 말이다. 내가 굴곡진 육체의 곡선을 쓰다듬을 때마다 엄청난 욕망이 분출하였다. 나는 노련하게 여자의 리듬과 템포에 맞춰서 강하게 또는 부드럽게 번갈아가며 압박을 가하였다.

내 얼굴이 흥분 때문에 시뻘겋게 물들어서 변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지는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육체가 요동치며 꿈틀거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펄떡이고 척추 뼈는 뿌드득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을 쳤다. 너무나도 완벽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특별한 여자야.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그러나 그 순간 회색 머리카락들이 힘없이 이마로 흩어져 내렸다. 아내의 초췌한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는 눈길을 돌렸고 몸이 오그라들었다. 온몸에서 마지막 남아있던 기운까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피곤한 듯 하품을 하고 눈을 껌벅거리다 돌아누웠다.

우리의 경제적 형편은 눈에 띌 만큼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우리 사무실은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 동안 계속 사무실 운영비도 빠듯해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근 일 년여 동안 만나면서 서로의 육체에 익숙해지고 무한정 섹스에 탐닉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진 심미주의자가 나를 이끌고 리드했다. 그 대담한 행위와 체위를 수시로 바꿔가며 즐기고 즐겼다. 그래도 우리는 항상 성적 쾌감에 목말라 했다. 나는 그녀에게 배꼽 부분과 등짝, 엉덩이, 사타구니 사이에 피멍이 들 만큼 그 이상으로 심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그녀는 자신의 재력을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과시해가며 처음에는 은근슬쩍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그녀를 놓치기 싫었으므로 그렇다고 내 가정을 송두리째 버릴 생각도 없었으므로 갈팡질팡했고 대충 어물쩍 넘기곤 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나 몰래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또다시 아내를 만나서 냉정한 얼굴로 수표가 든 봉투를 내밀며 이혼 얘기를 꺼내고. 다시 음험하게 웃으며 당신이 원한다면 돈은 얼마든지 내 놓겠다고, 나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애들은 당신이 원할 테니까 당신이 키우라고, 나는 애들은 질색이라고 하면서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이 필요하니까 둘 만의 생활에 틀림없이 방해만 될 거라고 말하고.

그녀는 돈의 화신이고 황금만능주의자이니까 백 번, 천 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항상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거야. 자금도 동원하고 사람도 동원할 수 있지.’라고 말했으니까.

착한 아내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떨구었을 것이다. 그건 적반하장이었고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이었다. 아내는 희생자이면서도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 돈 많은 여자에게로 가라고, 더러운 돈은 필요 없고 애들은 내가 잘 키우겠다고 말했다.

나의 첫사랑이었던 아내는 나에게 절대로 화를 내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치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왜 진즉에 터뜨리지 않는가. 나는 아내가 나에게 화를 내지 않은 것에 더 화가 났다.

그러나 나는 그때 칼날 위에 선 것처럼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녀를 떠날 수도 없었고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극단적인 질투심이 지배하는 비이성적인 남녀관계에서 삼각관계는 둘은 웃고 하나는 울어야 하는, 또는 하나는 웃고 둘은 울어야 하는, 아니면 셋 모두 울어야 하는 자기 파괴적이고 위험한 관계일 뿐이다. 이건 역사적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례가 있다. 그러므로 명확히 증명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셋 모두가 정상적으로 인간다운 남자이고 여자이어서 진짜 미치지 않았다면 그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비이성적인 인간사회의 현실에서 결코 동등한 삼각관계, 즉 정삼각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들의 세계라면 모를까.

 

이제부터 그녀가 점점 짜증을 내더니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사랑은 악마이고 불이고 천국이고 지옥인 거야. 너네 가정은 돈도 없는 허수아비들의 아지트에 불과한 거지. 내가 다른 투자자들과 함께 돈을 빼내면 너의 투자 자문사는 당장 문을 닫게 될 테지. 그러면 너는 알거지가 되는 거야. 지금 당장 이혼하고 내게로 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정이건 회사이건 풍비박산이 될 거니까. 선택을 하라고, 선택을.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라고. 네가 이혼한다고 해서 결혼할 거는 아니니까. 남녀가 사랑을 할 때는 두 사람은 동등한 거야. 그래서 상호 관계가 형성되거든.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냐. 오직 당신만 있으면 된다고. 당신과 섹스를 하고 나서 드디어 당신 속에서 내가 찾고 있던 남자를 찾았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당신이 꼭 필요한 거야.

나는 머리를 숙이고 항복한 것처럼 했던 거지. 그럴 수밖에.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그녀를 몸으로 달래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벌었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라구.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아주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현대의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을 발견한 거야. 그 중에서도 연구소장은 천재 중에서도 천재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이 극비리에 연구소를 차려서 몇 년 동안 머리를 싸매더니 바로 얼마 전에 획기적인 매연저감 화학물질인 촉매제를 발명한 거였어.

그것만 있으면 자동차와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해물질을 90프로 이상 없앨 수 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발명인 거야. 지금 중국을 보라고.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매연 때문에 나라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시진핑 정권의 명운이 걸린 문제인 거지.

그게 해결된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대박 중에 대박, 아니지 대박 같은 거로는 설명이 부족하지. 그 촉매제를 특허 등록하면서 바로 세상에 공개할 거거든.

그 신기술을 발표하는 발표회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국내외 수백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며 사진을 찍어대고……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국회 상임위원장이 연이어 축사를 낭독하고 우레 같은 박수가 터지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란 말이야. 어때…… 짜릿하지.

그들이 세운 벤처기업의 비상장 주식은 바로 그 순간 암암리에 10배, 20배 폭등하고 일 년 후쯤 상장 되면 다시 수십 배 폭등할 것이거든. 그런데 그 벤처는 초기여서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연구와 개발에 너무 많은 자금이 필요한 거지. 내가 자금조달을 책임지기로 했지. 액면가 5,000원의 주식을 20프로 할인한 가격으로 500만 주만 취득하라고…….

이경순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상무와 함께 그 회사의 조직도와 현황, 재무제표, 연구소와 실험 장면을 찍은 동영상과 연금술사들의 화려한 프로필과 사진을, 촉매제의 화학적 원리와 시제품을 회의실에서 프리젠테이션하였다.

그녀는 의심이 약간 풀렸으나 그래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면서 그 천재를 만나기를 원했다. 최종적으로 그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안 그래? 당신은 전문가이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어. 그러니까 빨리 날짜를 잡으라고…….

우리는 판교 신도시 벤처기업들이 밀집해있는 거리에 있는 15층 건물의 전망 좋은 사무실을 1년 단기로 얻었다. 작업 기간은 1년이면 충분하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늦은 가을 스산한 날씨였다. 금요일 오후 거리는 혼잡했다. 바람이 가볍게 일었고 하늘엔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있다.

벤처기업의 사무실답게 꾸민 그 사무실에서 MIT 공학박사로 NASA의 우주특수물질 탐색반의 팀장 출신인 연구소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때 사무실에는 요란하지도 착 가라앉지도 않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 들릴 듯 말 듯 흐르고 있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벤처기업의 대표이사 겸 연구소장은 창백한 낯빛에 냉담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영락없이 사색형의 지식인 타입이다. 그는 실리콘벨리의 창업자처럼 몸에 꽉 끼는 청바지와 티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있다.

그가 켜 놓은 노트북 컴퓨터의 화면에 실험실 건물과 실험실의 복잡다단한 기구와 설비, 정교한 실험 장면 등이 연속해서 나왔다.

그는 열정적으로 촉매제의 원리와 액체나 분말가루처럼 만들 수 있는 제조공정에 관한 복잡한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매연의 원인 물질에 이 촉매제를 혼합시키면 유해성분 자체를 근원적으로 분해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련의 기호와 라틴어 단어, 숫자, 무슨 화학 방정식을 낙서하듯이 종이에 끄적거렸다.

그가 말했다.

한국에는 실험시설이 턱없이 부족해요. 그래서 저희와 조인트한 미국 연구소에 의뢰하였지요. 그게 완성 단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특허출원은 준비 중에 있습니다. 다만…… 그렇지요. 너무 빨리 세상에 이 기술이 공개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그 시기를 신중하게 저울질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코스닥에 먼저 상장할 예정이지요. 주가가 폭등할 것입니다. 대박 중의 대박이란 말입니다.

그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담배의 유해물질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연구소장이 대답했다. 그건 식은 죽 먹기지만 유해물질을 없애버리면 누가 맛없는 담배를 피우겠어요. 그러면 담배회사가 망하겠지요.

뮌히하우젠 증후군 증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연구소장은 진지하였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능수능란했다. 기대 이상으로 완벽한 연기를 해낸 것이다. 그녀는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그가 컴퓨터를 끄고 나서 말했다.

사모님! 아니 지금부터 회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회장님! 우리 회장님!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니까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상당히 어려운 물리학 이론이 나오지만 별 거 아니에요. 회장님은 명민하시니까 얼마든지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슈만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손가락 부상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지요. 그래서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슈만의 환상곡 악보 맨 앞에는 ‘은밀하게 엿듣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나오지요. 메시지를 알아듣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제품이 계속 개량되어 나오게 되면 이 지구상의 모든 유해물질을 모조리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MIT 예비 창업자들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마틴 트러스트 창업가 정신 센터’에서 확실하게 배웠지요.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중 공략할 거점시장이 중요한데 그건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바로 우리 곁에 거대한 중국시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계속 생산량을 늘려서 중국 다음으로 인도, 러시아, 유럽, 미국 등으로 해서 전 세계를 장악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10년 전에 나사에서 쏘아올린 우주탐사선이 우주에 퍼져있는 암흑물질 중에서 어떤 신비한 물질의 단서를 전송해온 일이 있습니다. 그게 실체를 도저히 규명할 수 없으니까 그냥 암흑물질이라고 한 것이지요.

그래서 나사 당국은 이것에 주목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생명체 형성에 필수적인 탄소가 함유된 유기분자 발견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거든요. 오직 저만이 그걸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후 캘리포니아 공대 케크우주과학연구소로 옮겨서 연구를 계속하였지요. 그리고 이 암흑물질을 분석하고 촉매제를 개발하기 위해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원장직도 사양하였습니다.

이 우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요. 다중우주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말이지요. 이 지구가 속해있는 태양계는 46억 년 전에 생성되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우주에만 1,000억 개가 넘는 행성이 있는데 이 우주에는 소위 말하는 암흑물질이 꽉 들어차 있지요. 우리 인간은 그 중에서 단지 4퍼센트만 그 성질을 규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물질은 아인슈타인이 인생 말년에 찾고 있던 궁극의 이론을 풀 수 있는 해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건 원자물리학자들의 꿈이었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연금술에서 찾고 있던 ‘현자의 돌’을 제가 찾아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제부터 인류의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믿습니다. 노벨 화학상과 노벨 물리학상은 당연한 것이고 동시에 노벨 평화상도 받게 될 것이지요…….

저는 모든 인류의 진정한 구원자, 21세기에 와서야, 이제서야 예수님이 재림한 것이지요. 완고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지요. 그들도 이제는 진정한 메시아가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회장님이 알아둘 게 있지요. 이 아이템에 대해서는 재벌기업들이 수천억 씩 투자하려고 줄을 설 것이고 벤처캐피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그들이 회사를 집어삼키게 될 것이지요. 그러면 저는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겠지요. 저는 새가슴이지요. 그것도 참새가슴…… 그걸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고 오싹해지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공존공영할 정직한 파트너가 필요한 것이지요. 너무 아름다우신 회장님께서 투자하신다면 대주주로서 상당한 권한을 갖게 될 이사회 의장쯤은 양보해야겠지요.

지금까지 대충 말씀드렸습니다만 회장님께서 만족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추가적으로 질문이 계신다면 얼마든지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강동욱은 암흑물질이라는 용어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정해진 각본과 미리 몇 번 연습한 리허설에 따라 훌륭한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마구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겨우 참았다.

어느덧 가늘고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때린다.

그가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무엇에 쫓기듯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부드럽게 물결처럼 흐르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다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마술을 부린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그런데 너무 낙관적인 것이 아닌가요? 장밋빛 환상……

그녀는 그 순간 넓은 사무실 안을 꽉 채우는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자아도취가 심했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속이 뒤집히고 메슥거렸겠지요. 그걸 아셔야 합니다. 강한 사람이 되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보다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을 비판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는 성공할 수 없지요.

저는 목숨을 걸고 저만의 해석과 관점에 따라 실험에 몰두했어요. 그러면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살아남으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목이 메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때 정의경의 표정은 신중했다. 전혀 입을 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가 말했다.

성공이 눈앞에 와 있지요.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 샤포가 이런 시를 썼지요.

 

나의 두 손으로

하늘을 만질 수 있다니

미처 생각지도 못했네.

 

그러면 기대 이상으로 훨씬 과장된 찬사가 쏟아질 겁니다. 그게 매스컴의 속성이지요. 제가 감당하기 벅찰 것입니다. 저는 성공이 한 없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슬픈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성공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자가 마누라와 이혼하고 돈을 도박을 하면서 탕진하고 다시 가난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가끔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파국이 오는 거지요.

저는 이번 사업을 진행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우리는 허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그 후로는 안 나갔거든요.

지금 돌이켜보니 인간의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는 성취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니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대표이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짧은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연민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에 휩싸인 채 가만히 그녀의 반응을 주시했다. 그 노련한 사기꾼은 안경 속에서 교활한 눈웃음을 치며 그녀의 표정 변화를 포착했다. 그녀는 황홀함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의 달콤한 유혹이 그녀의 욕망에 환한 불을 지핀 것이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장신구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값비싼 최고급 제품들이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다이아몬드는 더욱 광채를 발했다.

그녀가 말했다.

옛날 재즈가 흐르고 있었군요. 이야기에 열중하다보니까 그걸 미처 깨닫지 못 했네요. 비밥 모던 재즈가 아니라 1920년대 재즈 시대의 재즈가……

대표이사가 말했다.

시카고 재즈의 대부인 빅스 바이더백의 곡이지요. 그는 재즈도 낭만적이고 나른한 음악임을 보여줬지요. 그래서인지 루이 암스트롱이 빅스의 연주를 회상하면서 ‘정말이지, 그 아름다운 음들이 내 마음을 관통했다.’고 말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녀가 말했다.

우린 옛날 재즈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군요. 갑작스런 하느님 이야기는…… 전 믿지 않으니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죠. 그 암흑물질을 규명해서 촉매제를 만들었고…… 곧 특허출원까지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가 상대에게 틈을 허용하고 싶지 않은 듯 즉각 말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서둘러야 하지요. 세계적인 IT기업 쪽에서 냄새를 맡고 달려들지 모르거든요.

그녀가 정의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상기되고 마침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요란하게 몸짓을 하며 박수를 쳤다.

그녀가 말했다.

됐어요, 됐어. 위대한 과학자께서 오죽했으면 눈물까지 흘리고…… 눈물은 정직한 거예요. 저도 그런 순간에는 자주 눈물을 흘리거든요. 그 진심에 감동 먹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성장하게 될 환경기업의 대주주 겸 이사회 의장이 된다면야. 필요한 자금은 전부 내가 조달하겠습니다. 자금 걱정 말고 신속하게 진행해주세요.

우리는 헤어지면서 문간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그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감사를 표했고 그녀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이제 한 줄기 빛이 보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꼭 성공하겠습니다.

그녀는 전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은행 예금을 찾고 상장 주식을 팔고 강남역 부근과 삼성동 건물을 매각했으며 심지어 자기가 살고 있는 100평의 고급 빌라를 저당 잡혀 은행 돈은 물론이고 사채까지 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차례차례 그 회사의 가상 계좌로 입금하였고 우리는 나중에 다시 대포통장으로 옮긴 다음 반반씩 분배하였고 일부는 해외계좌로 이체했다.

그녀가 투자금 명목으로 자금을 송금할 때마다 회사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주식을 발행해서 교부했고 동시에 그녀의 요구에 따라 회사 명의의 차입금 증서를 발급해주었다.

그녀는 일생일대의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대박 중의 대박을 위해 올인한 것이다.

나는 그 돈 대부분을 무모하리만치 대담하게 주식투자와 선물투자를 하면서 일 년여 만에 다 날려버렸다. 가끔 마카오로 날아가서 거액의 카지노 도박을 하며 물 쓰듯 돈을 썼다. 그 돈은 부정한 범죄수익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몽땅 날려버려야 마땅했다. 그래야만 속죄를 하는 기분이 들면서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내가 구속되었을 때는 변호사 비용 마련도 빠듯했다.

 

나는 오래 전에 읽었던 그리스 신화를 떠올렸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케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천신만고 끝에 티탄 아틀라스의 딸인 님프 칼립소가 살고 있는 오기기아 섬에 표류하여 어쩔 수 없이 정착하였다. 그리고 7년 동안이나 요정 칼립소에게 사랑의 볼모로 잡혀 있게 된다.

그는 그 요정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는 천국과 같은 그 섬에서 칼립소와 함께 쾌락에 빠져 너무나 행복한 삶,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는 한동안 쾌락에 탐닉하여 고향 이타카도, 페넬로페도, 삶의 목적도,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렸다.

칼립소는 현명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많고 임기응변과 언변에 능한 탁월한 인물인 오디세우스를 연인으로 삼으면서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주겠다고 끊임없이 유혹하였다.

더욱이 키는 작으나 몸이 다부지고 정력까지 센 오디세우스에게 흠뻑 반한 칼립소는 그를 달래서 결혼까지 하고 그 섬에 주저앉히기 위해 한껏 애교와 위엄, 협박을 섞어서 말한다.

그대는 진심으로 지금 당장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나요? 진실로 나는 얼굴과 몸매, 신체적 아름다움에서 그녀 못지않다고 자부하지요. 그녀는 인간, 지금쯤 많이 늙어버렸지 않았겠어요. 필멸의 인간 여인들이 몸매와 생김새에서 불사의 여신들과 겨룬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지요.

오디세우스는 역시 정중한 어조로 칼립소에게 말한다.

존경스런 여신이여, 그 때문이라면 조금도 화내지 마시오. 페넬로페가 비록 정숙하기는 하지만 그대와 비교하면 위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소. 더욱이 그녀는 필멸하는데 그대는 늙지도 죽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매일 비는 유일한 소원은 집으로 되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맞이하는 것이요.

칼립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보내줄 궁리를 하고 출발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목욕시키고 향기로운 옷을 입혀준 다음 섬에서 떠나게 해주었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 그의 연인 칼립소 간에는 삼각관계가 성립하였지만 어쨌거나 신들의 삼각관계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칼립소가 대범하게 양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신이 아니었던가. 그들 셋은 모두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중과부적인 그녀를 뿌리쳐야 했다. 나는 그 신물나는 사랑 놀음에 진저리를 쳤다. 이제는 그녀의 체취가 낯설게 느껴지며 점점 역겨워졌다. 그녀의 얼굴에 보랏빛 피멍이 들게 한다면……

그래서 염치없는 일이지만 믿음에 대한 배신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고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아내와 애들 곁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다고 아내와 애들이 날 쉽게 용서해줄 리는 없었지만…… 하지만 그 이전에 어쨌거나 그녀가 가진 권력의 원천인 돈을 모두 빼앗아야만 했다. 그건 필리스티아인들이 들릴리를 이용해서 삼손의 초인적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통쾌한 복수.

황금만능주의자에게 그 황금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녀를 지탱했던 황금이 빠져나가버리면 말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들의 삼각관계, 나와 그 능수능란한 사기꾼 강동욱, 이경순의 관계는 지금 어떻게 결말이 지어졌는가. 나의 동업자는 나를 배반하고 안전하게 해외로 빠져나갔다. 그 여자는 재산을, 사랑을, 인생을 모두 잃고 완전히 파산하였다. 그리고 나는 구속 기소되었다. 한 사람은 통쾌하게 승리했고 둘은 완벽하게 패배했다. 이것이 결론 아닌 결론이다.

검은 법복을 걸친 저 판사의 뒤틀린 입을 보라고. 결국 저 입 속의 검은 입술이 나를 죽이려고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겠지. 저 판사는 구치소에 있는 모든 피고인들의 공공의 적인 거야. 지금 저 상기된 얼굴 좀 보라고. 내심 쾌감을 느끼고 있는 거야. 모든 게 개뿔이야…….

설마, 무기징역을…… 아니면 10년…… 20년……

사기 절도 9범이고 15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늙은 방장은 한 개비에 7만원이나 하는 비싼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말했다.

요즈음은 말이야, 전관예우가 옛날 같지 않다고. 괜히 비싼 돈만 쳐바르고…… 그거 믿을 거 아니야. 브로커들은 맨날 전관예우를 팔고 다니지만…… 그럴 바에 차라리 국선 변호사가…… 공짜 아니냔 말이야.

본론을 말하지. 내가 판사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 넌 그대로 놔두면 10년 이상이야. 그러니까 달아난 공범한테 떠넘기라고. 그러면 5년 아니면 6년쯤일 거야. 그리고 여자가 합의를 해주면 아주 좋아. 경제사범은 뭐니뭐니 해도 합의가 최고야.

그건 그렇고…… 5년 정도면 그게 금방 가버린다고. 범털이 가는 의정부 교도소에 가면 편하게 지낼 수 있어. 재벌 회장이나 유명한 정치인들은 다 거기에 있어. 내가 법무부에 손을 써서 그리로 보내줄 수 있다니까. 그러려면 돈이 좀 들어가야 하는데……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지금 사기를 치고 있는 거야.

저 판사에게 더 이상 뭘 기대한단 말인가. 내가 무슨 염치로 그 여자에게 합의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항소할 필요가 있을까? 항소심 판사인들…… 항소 이유가 있기는 할 것인가? 누가 내 구구한 변명을 믿어줄 것인가? 그건 자신을 속이고 신까지도 속이는 거짓말일 텐데.

벌써 새벽이다. 오늘은 6개월의 구속만기 때문에 서둘러 재판을 끝내는 날이다. 나는 밤새 한 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동 소지가 수용방 밖 복도를 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잠이 없는 우리 방장은 똥통에 앉아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오! 향기로운 담배 냄새여! 똥 냄새여!

 

법정은 언제나 우중충하다. 터무니없고 기괴하고 역겹다. 사막처럼 황량하다. 그러므로 생명의 맥박은 멈춰있다.

정의경의 안색은 창백했다. 입이 바싹 마르고 뱃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움푹 꺼진 눈은 어느새 광채를 빛냈다. 그는 법정 천장을 쳐다 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너무 초라하다.

검사의 말투에는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며 인간적으로 멸시하고 불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맞는 말이다. 내가 무슨 염치로 거기에 항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인간쓰레기다. 이건 재판이 아니라 고백성사 같은 종교적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버텨야 한다.

나는 지금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막막한 허공에 떠있다. 어떤 운명이 그 줄을 끊어 버린다면 곧 나락으로 떨어지리라.

판사님은, 네 죄는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저에게 고백성사 혹은 자아비판을 하라는 거 아닙니까? 최후 진술이란 게 그거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저는 피해자를 한 때 사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집념에 감탄했고 그녀의 자존심과 위엄을 존경합니다. 그녀는 강하므로 결코 파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성적이었다면 차라리 그녀의 심장을 칼로 찌르는 게 나았을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은 인간이 경험하는 일 중에서 가장 심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녀에 비하면 너무나 천박하고 비굴한 인간이지요.

저는 항변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원인은 깊이 숨겨져 있으면서 그 결과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신성한 것이지요. 성소이지요. 작은 새들의 둥지이고 보금자리이니까요. 그걸 송두리째 파괴하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반항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복수는 원인에 대한 결과일 뿐입니다. 원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인 또는 동기를 제공한 자를 법이 왜 처벌하지 않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그녀가 희생자이고 피해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녀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달게 받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그리스 시인은 ‘복수는 꿀보다 감미롭다’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구약성서와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화상에는 화상으로, 상처에는 상처로, 멍에는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던 가요.

지엄하신 검사께서 왜 무기를 구형했을까요?

검사는 피해자의 대리인 아니겠습니까? 그것 역시 복수의 감정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사 재판이란 게 복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형식적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과연 이 험한 세상에 진실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찮은 인간들이 말입니다. 신이 계시다면 신만이 알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신이 죽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반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걸 바라서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마음대로 하라지요.

 

재판장 : 판사란 무엇인가? 또는 판사란 누구인가? 우리들은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하고 지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건 거의 병적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경험과 삶의 깊이가 턱없이 부족해서 인간으로서 인격 형성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스스로에게마저 그걸 애써 부인한다. 그래도 법대에서 근엄하게 폼을 잡고 앉아있으니 자기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우리는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 아니면 무죄를 선고할 수도 있다. 우리 성인 인간들 중에 누가 무죄일 수 있을까? 유죄인 경우 양형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분명치 않다.

심증 형성이 합리적 의심 없이 확실한가? 더 검토하고 고민을 해야 한다.

미리부터 자포자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단은 금물입니다. 예단은 이 신성한 법정에 대한 정신적 모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나저나 피고인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요. 맞는 말입니다. 판사들도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산헤드린의 재판관들처럼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사회경험도 풍부하지 않고, 전문지식도 없고, 인간에 대한 애정도 없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해도 부족하니, 제가 판사로서 재판을 한다는 게 참으로 어불성설이죠.

이 자리에서 반성이니 회개니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진 죄악을 대신해서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진실이 있는지도 의문이군요. 우리가 진실을 너무 오랫동안 찾으면 진실은 도망가 버리고나서 오히려 우리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닐까요.

하여간에 그건 신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지금 겉만 핥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어찌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신만이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신이 죽어버렸다고 하니 안타깝군요. 무엇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을 대신해서 운명이…… 그렇지요. 운명이.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현실의 토대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은 바로 법률이고 제도이고 관습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법은 절대적으로 만능이 아니고 엄연히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아시겠습니까? 법이건, 인간이건 어쩔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과관계에서 원인은 무한정 확대되면서 과거로 계속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법은 현명하게도 결과만 가지고 따지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바쁜 세상에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나저나 개를 죽인다고 해서 물린 자리가 낫는 게 아니지요.

피고인은 섣부른 복수는 자신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군요.

그리고 구약성서와 함무라비 법전은 2,000년도 넘은 아주 옛날, 옛날 일이지요. 그 후 세상은 골백번 바뀌고, 바뀌고, 법도 골백번 바뀌고, 바뀌었지요.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법률가이지 성직자는 아닙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도 넘치는 도다’라고 말하지만 법률가는 죄와 벌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악마가 혹은 우주의 신성한 힘이 피고인에게 그 짓을 하게 시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범한 것이지요.

만약 최후의 심판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 재판관들 모두가 그들이 살아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상관없이 불려 나와서 피고석에 앉아 신의 재판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 재판을 내내 취재하며 공판정 중간쯤에 앉아있던 주간지 기자는 지루한 표정으로 자기도 모르는 새 긴 하품을 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오간 무수한 말들을 대충대충 메모했다. 어차피 빠진 게 있다면 먼저 기사가 나올 일간 신문의 주말판을 보고 보충하면 될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상상력을 발휘해서 소설을 쓰면 된다.

그는 메모 수첩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어서 법정 밖으로 빠져나가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가 웅얼거린다.

이 재판은 클리셰는 아니야. 보통 재판에서 나오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훨씬 심오했거든.

 

재판을 마칩니다.

선고는 3주 후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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