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가위가 필요했던 이유 外 1편/ 나정욱:시인뉴스 포엠 (poetnews.kr)]
가위가 필요했던 이유
처음에는 한 가지였다
마음을 닮은 장미를 오리려고 가위를 찾았다
그러다가 가위가 필요한 곳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졌다
사람들이 태어나는 이유와
가위가 필요해진 이유가 같아졌다
이때쯤이면 장미는 사라지고
더 이상 가위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이 넘쳐나니 사람 귀한 줄을 모르게 되었다
이쯤 되면 사람은 가위나 마찬가지 존재의 이유로 산다
더 이상 장미를 오려 모을 필요가 없다
도대체 장미를 오릴 이유가 없다
장미의 향은 가위로 오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장미를 오리겠다는 발상으로
사람들이 가위를 만든 것은 대단한 오류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사람으로 진화 발전한 그 방향성이 의심되는 것이다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가위로 해결하겠다고
가위를 발명한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명이 되었다
접시와 그릇들의 만찬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르기 전 접시와 그릇들은 밑 뚫리지 않은
구멍에 불과했다 그것들이 우리의 식탁에 오르면서
그것들은 우리들의 입과 혀보다 먼저 우리가 맛볼 음식을
먹는 입이 되었다 우리보다 먼저 음식을 먹는 특권을 가지면서
그것들은 명품의 지위를 얻기도 한다 식탁에 앉기 전
우리의 음식을 먼저 맛보고 있는 그릇과 접시들을 일별해 보자
여기저기 침 흘리며 식욕을 자극하는 선정적 자세를 도발하는
식탁 위의 그릇과 접시들 우리의 음식을 우리보다 먼저 맛보고
남은 것을 양보하듯 넘겨주는 저 거만한 접시와 그릇들의 자세
저 거만한 자세 앞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사람의 품격을 지켜야 할까
어떻게 눈과 손을 처신해야 저 거만한 그릇과 접시들에게
책잡히지 않는 인간의 품격과 자세를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릇과 접시가 흘린 음식에 대한 결례를 예의로 바꿔
품위 있는 식탁 위에 오늘의 저녁을 차릴 수 있을까 식사 전에
접시와 그릇에 담긴 음식들이 우리의 자세를 일별하고 있다
접시와 그릇들이 만들어지기 전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식사법을
소곤소곤 얘기하고 있다 식탁 위에 진설된 음식과 관련된 전설을
밑 뚫리지 않은 구멍의 조용함으로 얘기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식탁과 식탁 위의 접시와 그릇들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군침 도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식탁 위에서 항상
우리보다 먼저 음식을 받아먹은 접시와 그릇들의 식후의 정담을 들으면서
우리는 늘 저녁보다 늦은 저녁을 먹는다
※ 나정욱 시인
1990년 <한민족문학> 창간호에 「실습 시간」 외 2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며칠 전에 써 두었던 내 문장에서 힘을 얻는다』
『눈물 너머에 시(詩)의 바다가 있다』
『라푼젤 젤리점에서의 아내와의 대화』를 출간함.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회의 회원.
회원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