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의 뜰




김인숙




규상이 북경에 있는 형 규만에게서 전화를 받은 것은 밤 열한시가 가까워서였다. 서울에서 온 손님 몇을 그리로 보냈는데, 비행기가 연착을 하는 바람에 호텔 예약이 캔슬되었다는 것이다. 규상은 전화를 받으면서 베란다로 걸어가 꽝꽝 얼어붙어 있는 창문을 어렵게 열고, 창문 턱에 놓아두었던 온도계를 보았다. 수은주는 영하 이십삼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심야의 기온이 이 정도라면 하얼빈 날씨치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어차피 날씨가 아무리 추웠더라도 형의 전화를 무시해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난데없이 호텔문제라니……. 규상은 내복부터 양말까지 차례로 벗어두었던 옷을 다시 차례로 겹쳐 입기 시작하면서,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의 단축번호를 눌러 쌰오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라시 기사인 쌰오친에게는 출고된 지 얼마 되지 않은‘상해대중’ 승용차가 있었다. 이 시간에 집 바깥에서 택시를 잡기도 쉽지 않겠지만, 혹시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택시를 탈 생각은 없었다. 이맘때쯤이면 얼어붙지 않은 데가 없는 하얼빈의 도로사정은 최악이 되었으나, 그 도로 위를 달리는 택시는 사철 변함없이 형편없는 고물들이었다. 그는 하얼빈의 빙판 위에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쌰오친이 그를 데리러 온 것은 삼십분이 훨씬 지나서였다. 그가 집으로까지 전화를 걸어대는 바람에 별 수 없이 끌려나오기는 했지만 여간 못마땅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규만의 전화를 받기 전에 그는 이미 양주보다도 독한 바이주를 한 병 가까이나 비운 상태였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먼저 취해서 전화기를 집어 드는 손이 흔들렸다. 그는 바로 한 시간 쯤 전에 바로 그 전화로 화선의 전남편이 전하는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전화를 드리는군요. 낯선 목소리가 그렇게 말을 시작했을 때, 그는 그것이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전화라는 것을 알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수화기 저 쪽의 말마따나 너무 늦은 전화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화선이 화장치뤘습니다. 죄송합니다. 화선이 눈감고 지금까지, 전화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조금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화선이 이미 한참 전에 세상을 떴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선과의 마지막 통화는 거의 한달 전이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화선이 단지 사흘 전에 죽었다는 것이 놀라운 게 아니라, 지난 한 달 동안, 적어도 사흘 전까지는 그녀가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는 화선에게 어떻게 작별인사를 해야 할 것인가. 짜이지엔(再見)... 이런 경우에 중국말의 작별 인사는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그는 이제 그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규만이 말한 손님들은 대여섯 명쯤 되는 오십대 중 후반의 남자들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호텔의 로비에는 그들 말고는 프론트를 지키는 직원이 보일 뿐이었다. 5성급이라고는 하지만 낡고 오래된 호텔의 로비는 어두웠다. 그것은 어쩌면 전등의 빛이 아니라 시간의 빛 때문일지도 모른다. 낯선 여행지의 호텔 로비를 서성거리기에 11시20분은, 누구에게든, 지나치게 늦고 허황된 시간인 것이다. 저... 박사장님 동생분... 청년 하나가 규상에게로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넸다. 북경에서부터 사람들을 인솔해온, 말하자면 그들의 ‘입’인 모양이었다. 최상식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입’의 설명에 의하면 북경발 비행기가 늦게 뜨는 바람에 그들은 북경 수도공항에서만 세시간을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간신히 북경을 떠나 하얼빈에 도착한 것이 열시쯤이었고, 택시기사에게 엄청난 바가지 요금을 지불하고 호텔에 도착한 것은 열시 반쯤이었다고. 그런데 체크인을 하려고보니 그들이 사전에 해두었던 예약이 취소되어있더라는 것이다. 9시까지로 예약해두었던 체크인 예정 시간이 오버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약이 취소되면 객실요금의 할인가를 적용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예약했던 방이 이미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빙쒸에지에(氷雪節)가 열리는 1월, 하얼빈의 호텔들은 어디거나 여행객들로 넘쳐났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빈 객실을 여유있게 갖고 있는 호텔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규상은 상식을 한 쪽으로 불러, 그가 인솔해 온 사람들이 뭘 하는 사람들인가를 물었다. 규만의 손님들은 워낙에 다양해서, 거래 회사 간부들이 있는가 하면 해외여행이라고는 처음 해보는 향우회 노인들이 있기도 했고, 어떤 때는 국제학회에 참석을 했던 교수들이거나 방송국 기자들이 있기도 했다. 규만은 북경에 터를 잡은지 7,8년만에 완전히 성공을 한 한국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손님들에게 지불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날아가버린 보통 객실 대신에 할인가가 적용되지 않을 경우 하룻밤에 2천원 가까이나 하는 스위트룸을 잡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러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내의 대답보다 먼저 규만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규만은 규상의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아무리 성수기라지만 방 몇 개 뽑아낼 능력도 없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규상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결국 이런 소리나 듣게될 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소리나 듣자고 이 야밤에 여기까지 달려나온 것은 아니었다.휴대전화의 폴더를 닫아버리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싶은 것을 규상은 애써 눌러참았다. 한 여자의 육체가 불 속에서 소멸해버린 날이었다. 아직 자정까지 남은 20여분, 그는 누구에게도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규상이 프론트에서 스위트룸의 할인가를 흥정하고 있는 동안, 무슨 친목회의 회원들이라는 여행객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통처럼 담배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화가 날만도 할 것이다. 세시간 비행기연착도 기막힌 일이었을텐데, 호텔에 도착해서는 방에도 못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북경공항에서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요. 상식이 프론트에 여권을 늘어놓으면서 규상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비행기가 안 뜨는게 내 책임입니까? 하여간에 어찌나 볶아대던지. 규상은 풋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이해할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북경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은 것은 광동발이었던 비행기 승객중에 난데없이 고열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겨울 영하의 날씨에 난데없이 무슨 사스 소동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공항측의 설명은 그러했다는 것이다. 세시간 동안 상식은 그를 멸치볶음처럼 볶아대는 손님들에다가 5분에 한번씩 휴대전화를 쳐대는 ‘박사장님’ 때문에 머리가 다 타버릴 지경이었다고 했다. 규상이 웃음소리를 낸 것은 규만의 급한 성격이 눈에 보이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규상이 드디어 방수속을 다 마치고 손님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을 때 규만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너 내일 별 일 없지? 내일 하루만 그치들 좀 데리고 다녀라. 원래는 잘 돌아가는 조선족 하나 붙여주려고 했었는데, 그 자식이 어디 가서 뒈져버렸는지,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수배가 안되잖냐. 상식이 그 새낀, 중국말이나 할 줄 알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잖냐. 엘리베이터 안인데도 통화품질은 좋았고, 오히려 수화기 바깥으로까지 목소리가 울려 마치 확성기를 대고 떠들어대는 꼴이었다. 22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자 규상은 상식에게 열쇠와 사람들을 맡겨놓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끊어버렸던 전화를 다시 연결했다. 시계는 아직 열두시 오분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괜찮지? 전화가 연결되지마자, 대뜸 규만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규만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관광안내가 아니었다. 시내의 관광지를 안내하는 일 따위는 하얼빈 지리를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중국말만 조금 할 줄 알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택시를 부를 수 있는 정도의 능력과, 그 택시 요금을 깍을 수 있는 정도의 사소한 실력만 있으면 된다는 소리다. 규만이 그에게 말하는 것은, 관광 이외의 관광, 혹은 관광 속의 관광이었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는 일. 굳이 보신이니 매춘 따위의 단어를 들먹여 퇴폐적으로 몰아부칠 필요도 없이, 50대 남자들이 가족도 동반하지 않고 그들끼리만 여행을 왔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여흥이 바로 그것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여흥이야말로,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박아대는 일보다 더 중요한 본게임이기 마련이었다. 하얼빈이든 베이징이든, 혹은 저 아래 항주와 소주든, 그곳이 여행지인 한 다를 것은 없었다. 어느 정도로 해요? 규상은 규만에게 지불의 한도를 물었다. 대충해라. 방값만도 벌써 얼마냐. 빌어먹을, 바깥에서 오래 살다보니까 세상에 연줄 아닌게 없다. 그 치들 최영사 손님들이잖냐. 최영사, 체면 정도 생각해서 써라. 최영사라면, 비록 지금은 국내로 발령이 나있지만 다시 중국으로 나올 것이 뻔한 중국통이었다. 그러니 지금 최영사의 연줄을 챙겨두는 것은, 말하자면 보험을 들어두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중간 정도로 하죠. 규상은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말했다. 북경에서 규만과 함께 살던 동안에도, 이런 일은 규상이 전적으로 맡아 해왔었다. 중고자동차 무역으로 성공을 한 규만은, 돈이 쌓이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술도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다. 게다가 독실한 크리스천이기까지 해서, 매춘도 하지 않았다. 규상이 규만과 함께 있던 2년 동안, 규만은 몸무게가 5키로나 늘고 규상은 형편이 없을 정도로 간이 나빠졌다.
비행기 연착과 호텔예약 문제 때문에 잔뜩 열이 올라 있던 손님들은, 고급 객실을 차지하고나서야 마음이 어느 정도씩 풀린 모양이었다. 손님들에게 차례차례 인사를 하고 마지막 방의 문을 닫을 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 호텔 밖에다 둔 채로 까맣게 잊고 있던 쌰오친이었다. 집에 안 가? 잔뜩 볼이 부운 목소리였다. 그는 대답하기 전에,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열두시 십분... 그 사이에 날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쌰오친에게 호텔 바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마시지 않고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았으나, 혼자 마시고 싶은 기분도 더 이상은 아니었다. 쌰오친과 양주 한병을 뜯은 후에, 호텔 사우나에서 밤을 세우면 될 것이다. 아침에는 전신마사지를 받은 후, 손님들과 곧바로 시내 관광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었다. 하얼빈은 어차피 하루나 이틀 관광 코스였다. 하루를 묵지근하게 돌린 후, 룸싸롱에 가서 술을 먹이고, 이튿날 늘어지게 늦잠을 재운 뒤 공항으로 가면 끝이었다. 그렇게 바삐 하루를 지내고 나면 화선에 대한 생각도 그만큼 뭉근해져있으리라. 사실 화선의 죽음이 이제와서 새삼스러울 것은 전혀 없는 것이다.

내가 혹시라도 죽게 된다면, 당신한테 꼭 그 소식을 전할게요. 너무 궁금해하지 않게 말예요.
병원에 입원을 했던 초기에 화선이 그에게 국제전화로 했던 말이었다. 몸 어딘가가 안 좋은 듯 하다며 귀국을 했던 화선은, 보름 정도만 있다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대신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 암이래요. 워낙에도 속이 안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여자라, 만성위염이나 신경성 장염 정도는 늘 걱정했지만 위암이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하루에 두갑이나 담배를 피워댈 정도로 지독한 꼴초였으니, 암이라면 차라리 폐암이 어울렸을 것이다. 암, 혹은 죽음에도 몸에 맞는 옷처럼 어울리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화선이 자신의 죽음을 그에게 반드시 알리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소식이 완전히 끊겼던 지난 한달간, 그는 자신의 예상처럼 화선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떠나버린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그녀의 사망 소식을 국제전화로 알려온 사람은 그녀의, 이혼하지 않은 전남편이었다. 그는 이 복잡한 호칭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화선은 남편과 1년 가까이 별거 중이었고, 그녀 본인은 그것을 이혼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그와 마지막 통화를 할 때까지도 자신이 그를 속였으며, 그 때문에 그가 어이없는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나는 지금 이렇게 아픈데. 하긴, 그러했을 것이다. 무엇이 그리 중요했으랴. 화선의 부탁을 받고, 장례를 치룬 마지막 날 밤 그에게 전화를 걸어준 화선의 이혼하지 않은 전남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고요했었다. 그는 규상이 누구인가를 묻지 않았고, 화선과의 관계를 묻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규상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다. 규상이 웨이, 하고 중국말로 전화를 받았을 때 수화기 저 쪽에서는 마치 준비된 대사를 읊듯이, 유화선씨 소식 전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했다. 저쪽에서 할 말을 다 마치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 규상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어떻게 갔는지, 죽기 직전까지도 많이 아파했던지 묻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그녀가 언제 자신에게 소식을 전해줄 것을 부탁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이제와선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암세포가 성장하기 시작한, 병균의 서식처가 되어버린, 그리하여 소멸하기 시작한 그녀의 몸을 규상은 본 적이 없다. 그녀가 항암치료를 받고, 수술을 하고, 머리가 빠지고, 소변과 똥을 지리는 동안, 그는 단 한순간도 그녀의 곁에 있었던 적이 없고, 먼발치에서나마 그녀를 바라본 적도 없다. 그 시간들 동안, 규상은 마치 불법체류자처럼 중국에만 머물렀다. 보고 싶어요. 당신은 날 보고 싶지 않겠지만요. 아직 그다지 심각한 상태가 아닐 때, 화선은 그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가고 싶지 않았고 보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그를 속였기 때문에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누구 지켜줄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는데, 없다고 했어요. 그녀는 이혼하지 않은 전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중국에서 병을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요. 그녀가 그런 말을 덧붙였지만, 별로 중요한 말은 아닌 듯 했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삶과 죽음과, 소멸하는 육체와 썩어가는 냄새까지 맡기기에는 그들의 관계는 너무 헐거웠다. 병과 싸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전화에서는 더 이상 힘이 없다고도 했다. 당신한테 국제전화를 걸 힘도 없어요. 국제전화는 열일곱자리나 되잖아... 내 손은 다섯자리도 누르기 전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걸...
“나는 앞으로 아무한테도 인사하지 않을 거야.”
규상은 그의 중국인 친구 쌰오친에게 말했다. 양주 한병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새벽 두시경이었다.
“왠줄 알아? 왜냐하면 그게 예의인 거니까. 한 사람이 사라졌는데, 영혼도 사라지고, 몸도 사라져버렸는데,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다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안녕하지 말아야하는 거라구. 딱 며칠만이라도, 절대로, 결단코, 안녕해서는 안되는 거란 말이야. 아무 것도 아닌 관계라고 하더라도, 지켜야할 예의는 있는 거란 말이야. 그냥 딱 며칠만이라도 말이야.”

이튿날 아침 규상은 사우나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겨우 오전 일곱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술을 세게 마시고 난 이튿날은 늦잠이 오지 않는 대신, 낮잠을 자야만 하는 것이 불규칙한 생활을 하기 시작한 후부터의 습관이 되었다. 규상은 대충 샤워를 한 후 안마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침부터 전신마사지를 하고 있을 생각이 사라져서, 그는 발마사지만을 부탁했다. 머리를 양갈래로 딴 안마사가 따듯한 물과, 마사지 크림과, 수건을 들고 그의 자리로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십석이나 되는 자리를 갖추고 있는 안마실은 시간이 일러서인지 텅비어있다시피 했다. 자오샹 하오. 안마사가 그의 발을 감싸쥐면서, 아침인사를 건넸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가 쟈오샹 하오, 그 인사를 받았다. 쌰오친의 웃음소리가 바로 앞자리에서 들려왔다. 쌰오친이 그보다 먼저 와서 마사지를 받고 있었던 모양인데, 나라시 기사 주제에 오성급 호텔에서 마사지라니, 신세가 늘어졌다. 물론 돈을 내는 것은 규상이었다.
쌰오친은 적어도 하얼빈에서는 규상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유흥가의 조선족들이나, 한인회의 교포들, 그리고 상사 주재원과 유학생들까지 규상의 발은 넓었다. 그러나 그 중의 어느 누구도 쌰오친보다 더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규상이 그의 차를 처음 탄 첫 날부터, 쌰오친은 규상에게 속을 빼줄 듯이 굴었다. 쌰오친이 규상을 ‘하오펑요(好朋友)’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다섯 번을 만나기도 전이었다. 중국어로 하오펑요는 정말 친구일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 말이라고, 화선은 말했었다. 화선은 그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하오펑요’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러나 쌰오친은, 그의 고객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오펑요였다. 항상 돈이 두둑한 지갑을 갖고 있는 한국인 고객이라면, 쌰오친의 ‘하오펑요’가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셈이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겠는가. 규상이 때때로 쌰오친과의 시간들을 마치 독주에 취하듯이 즐기는 것은, 쌰오친이라는 인간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즐기는 것은 쌰오친과 나누는, 그러나 통하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의 중국어는 겨우 필요한 말만 하는 수준이었고, 한족과 만주족의 혼혈인 쌰오친은 한국어라고는 한마디도 알지 못했다. 그는 내키는대로 말했고, 쌰오친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만 알아들었다. 그래도 문제가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는 언어가 날것인 채로 언어이기만 한, 소통의 모든 오해들을 배재해버린, 그와 같은 순간들이 좋았다. 그는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번쯤 쌰오친을 불러서 같이 술을 마셨고, 그동안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곤 했다. 거의 40년 가까이 써온 모국어보다, 겨우 몇 년 동안을 익혔을 뿐인 낯선 언어가 오히려 그의 내부에 있는 곰팡이들을 제거하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있었다. 그런 순간들에 그는 때때로 오르가즘을 느꼈다.
그는 어떻게 죽었는데?
지난 밤,쌰오친은 규상이 말하고 있는 것이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것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쌰오친이 ‘그’의 죽음에 대해서 물었을 때, 이미 잔뜩 취해버렸던 규상은 ‘그가 아니라 그녀’라고 쌰오친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그러나 중국어에서 ‘그’와 ‘그녀’ 그리고 ‘그것’은 발음과 성조가 완전히 같은 단어였다. 화선은 죽었고, 불에 태워졌고, 먼지가 되었으며, 마침내 ‘그녀’의 성징도 사라졌다. 새벽녘이면 그녀의 성기를 일으켜세우려고 애쓰던 그녀의 부드러운 손도 사라졌다. 당신 언제든지 이게 불현 듯 서면, 섰는데 나한테까지 올 겨를이 없으면... 제일 가까운데 창녀라도 찾아가요. 어느날 새벽, 그녀는 그의 헐렁한 바지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웃었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그들이 함께 있던 시절, 몸의 문제는 그녀 쪽이 아니라 그에게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거의 매일같은 술, 그리고 며칠씩이나 연달아 밤을 세우는 포커판, 그런 밤들이 지나가고 나면 새벽녘 그의 바지 속은 항상 헐렁했고, 그녀는 성욕 때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경건함 때문인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섹스를 잃어버리는 건 슬픈 일이잖아요. 꿈과 이상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섹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했다.
그의 맨발을 주무르고, 누르고, 쓰다듬는 맛사지사의 손길에서 그가 불현 듯 섹스를 느끼는 것은, 화선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맛사지 크림을 듬뿍 바른 발가락 사이에 마디가 단단한 손가락을 집어넣어 힘주어 마찰을 시키고 있는 여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발에서 다섯 개의 성기가 자라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염려했던 화선은 사라졌으나, 그는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불태워지지도 않은 것이다. 안녕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스무살 정도 밖에는 안돼보이는 어린 여자 안마사에게 발을 맡긴 채, 규상은 섹스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잠시 슬펐다.

관광은 오전 열시경부터 시작이 되었다. 쌰오친의 상해대중과, 따로 부른 소나타 이에프 한 대에 손님 다섯과 가이드인 상식을 나누어 태우고 그도 역시 쌰오친의 옆자리에 몸을 실었다. 지난 밤에는 무슨 원수대하듯 눈도 잘 안 마주치려고 들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기분들이 완전히 풀어져서 그에게 차례로 명함을 내밀었다. 무슨 유통업체 대표도 있고, 요식업체 대표도 있었다. 중국은 정말 어마어마한 나라라고, 13억의 시장을 가진 나라가 아니냐고, 그들은 간혹 규상에게 동의를 구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경 북해공원에서 자금성을 내려다보는데, 정말 기가 탁 질리더라고. 크다는 것이 바로 저런 거구나 싶더라고. 규상은 건성으로 대꾸를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10년, 늦어도 20년 후면, 한국은 중국에 쪽도 못 쓸 거라고. 중국이 도약하고나면 미국이 지금 우리나라한테 하는 짓은 저리 가라일 거라고. 관광을 온 한국사람들은 누구나 한결같이 중국의 거대함에 탄복하고 중국의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표현했다. 그리고나선 정해진 순서대로, 현재의 비문명에 대해, 가난에 대해, 지저분함에 대해 맹렬하게 개탄을 해댈 것이다. 중국의 여행 경비에는 카타르시스의 비용도 포함이 되어있는 것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731부대 유적지였다. 가이드 노릇을 할만한 상식이 있는데다가 731부대를 모르는 사람도 없을 듯 했기 때문에, 그는 차 안에서 간단한 정도로만 설명을 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731부대는 2차세계대전 당시, 세균전을 실시하기 위해 창설된 일본군 부대입니다. 마루타라고 들어보셨지요? 말하자면 마루타는 생체실험 대상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데, 뜻이 뭐라더라. 껍질벗긴 통나무라던가... 하여간에 들어가보시면 설명이 있을 겁니다. 기분이 그리 좋은 곳은 못될 겁니다. 일본놈들 지독하긴 진짜 끔찍하게 지독하지요. 마루타들한테 콜레라, 매독, 발진티푸스 등의 세균을 투여하고 그 경과를 보거나, 일본군인들의 동상을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방안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대상들을 한겨울의 진흙밭 속에 알몸으로 묻어놓고 동상환자로 만들거나, 진공기에 넣어 인체의 피와 수분을 이탈시키거나, 말의 피와 사람의 피를 교환시켜보기도 했고... 아이고오, 그냥 들어가서 봅시다. 손님 중의 하나가 머리를 내저어가며 규상의 말을 끊었으므로, 규상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표를 끊어 상식과 함께 손님들만 들여보내고는 쌰오친의 차로 되돌아왔다. 쌰오친이 넌 안 들어가냐고 묻는 것을, 그는 ‘너같으면 또 보고 싶겠냐’고 퉁명스럽게 되받았다. 규상은 이제까지 세 번쯤 여행객들과 함께 731부대를 관람했다. 그러나 사실은 한번이라도 제대로 보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처음 볼 때의 충격과 고통과 역겨움은 사라졌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그대로 남았다. 살아있음에 대한 냉소와 환멸... 그런 말을 했던 건 화선이었을 것이다. 그는 화선과 함께 처음으로 731부대를 관람했었다.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고, 그 악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 있을까. 그는 거의 두들겨맞는 듯한 느낌으로 731부대의 기록들을 보았다. 전시실을 한바퀴 다 돌고 부대의 마당으로 나왔을 때, 화선이 그에게 기념사진을 찍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날이 처음이었지만 그보다 하얼빈 생활이 일렀던 화선은, 지인들이 올 때마다 안내를 하느라고, 그날이 최소한 다섯 번째는 될거라고 했다. 선과 악은 어느 지점에서 구분이 되는 거 같아요? 삶과 죽음처럼, 그건 그냥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충격은 사라지고 환멸만 남은 목소리로 화선이 그렇게 말했을 때, 토할 것 같은 역겨움과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고스란히 사로잡혀있던 규상은 이렇게 대꾸했었다. 한가지 분명한건, 무엇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거지. 사랑은, 연민은, 아픔은... 살인은, 폭행은, 강간은... 전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차 창을 내렸다가, 규상은 반개비도 피우지 못한 채 다시 차 창을 올렸다. 두어모금을 빨기도 전에 입술이 얼어붙는 걸 보면 기온이 영하 삼십도는 족히 내려갔을 듯 했다. 그러나 창을 닫자마자 히터 열기가 훅 끼쳐오는 차 안은 오히려 더울 지경이어서, 바깥의 모든 것이 곧 비현실적으로 바라보였다. 유적지의 마당에는 눈이 두텁게 쌓여있었는데, 그 눈밭에 장난스럽게 찍힌 발자국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전시실을 관람하고 나오는 사람들은, 희게 쌓인 눈밭 위에 자기 흔적을 남길 생각같은 건 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여기는 전쟁유적지가 아니라 무슨 성소같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는 화선의 말을 기억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불에 태워졌다는 그녀의 몸을 또한 생각했다. 그녀의 몸은, 바로 어제 성소가 되어 사라졌을까. 아니면 전쟁같던 생의 유적지로 남게 되었을까.
“어, 벌써들 나오네.”
한잠 잘 태세로 의자등받이를 뒤로 내리던 쌰오친이 도로 몸을 세우며 창 밖을 가리켰다. 과연 유적지 문 밖으로 나오는 일행들이 보였다. 모두들 더러운 것을 한웅큼씩 씹은 듯 불편한 표정들이 역력했다.
“좋은 데 없소, 좋은데?이런 거 말고, 좋은 것 좀 보러 갑시다.”
규상은 차를 출발시켰다. 좋은 데라... 다른 때 같았으면 그는 소피아성당을 생각했을 것이고, 혹은 사원이나 공원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역사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하얼빈 역전으로도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관광에 열정을 보이는 사람들이라면 아청까지 나가서 금나라 유적지를 보게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일행중에 아이들이 끼어있다면 호랑이 방목장에 가서 새끼호랑이를 끌어안고 사진을 찍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규상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는 쌰오친이 차를 모는데로 그냥 맡겨두기로 했다. 견딜 수 없게 피로가 몰아쳐왔다. 아침에 일찍 깨어난 대신에 낮잠을 자야만 했는데, 여행객들이 731부대에서 너무 빨리 나와버린 것이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지 몇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규상의 머리가 끄덕여지기 시작했다. 어이 형씨, 저게 바로 송화강이요? 뒷 자리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말을 건네왔지만, 규상은 눈을 뜨지 않았다. 어허, 저게 바로 그 하얼빈 역 아닌가? 규상이 반응을 하지 않았으므로, 뒷자리에서는 그들끼리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안중근 의사도 안중근 의사지만, 그 어머니가 대단하시지. 누군가의 말이 정신없이 몰아쳐오는 잠 속으로 스며들었다.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 자당께서 감옥으로 편지를 보내셨다는 거야. 그 내용인즉슨, 항소를 하지 말라는 것이지. 어차피 일본놈들이 너를 살려주지 않을 것이니 너는 그냥 죽어라. 억울하게 죽어라. 그 자당께서 그런 편지를 왜 보내셨느냐. 안중근 의사가 억울하게 죽을수록, 조선 백성의 분노가 더 대단해 질 거라는 것이지. 자당이, 편지 말미에 쓰시기를 네가 혹시 늙은 에미를 남겨놓고 먼저 죽는 것이 동양유교 사상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망설일까봐, 특별하게 일러둔다 하였다는 거야. 과연 범같은 어머니가 아니신가.

규상은 화선과 함께 안중근 의사가 갇혔던 여순감옥에 가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옷을 가져다 좀 팔아볼까하고 대련에서 의류무역으로 자리를 잡은 교포를 만나러 갔다가, 사업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고 며칠 밤을 세워 포커만 치다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겨우 함께 갔던 화선을 위해 관광을 나섰었다. 그날 그들은 대련의 항구를 보고, 게와 새우를 먹고, 바닷표범이 있는 해양수족관을 구경하고, 일본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했다. 그가 밤이고 낮이고 포커만 치고 있는 동안 혼자서 대련 시내를 돌아다녔던 화선은, 대련보다는 여순엘 한번 가봐야겠다고 우겨댔다. 화선이 꼬박꼬박 뤼슌이라고 발음을 하는 여순은 대련에서 한시간쯤 거리에 있었고, 도처에 전쟁유적지들이 있었으며, 러시아와 일본 점령기 당시의 감옥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당한 감옥이 외국인 관람 제한구역이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정작 그 감옥 앞에 이르러서였다. 중국인이 아닌 그들이 감옥을 관람하려면 담당부처에서 발급받은 허가증이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도 그들을 태우고 갔던 택시기사가 마침 친절한 사람이었다. 택시기사가 그들을 대신해서 입장권을 사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인인 것을 드러내는 언어’를 입 속에다 감추어둔 채로, 감옥 안을 한바퀴 돌 수 있었다.
규상은 그날 감옥의 뜰에 내리비추던 오후의 햇살이 빛이 아니라 소리로 여겨지던 것을 기억한다. 침묵보다 더 낮고 적요보다 더 깊은... 감옥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마치 깊은 우물 속 숨죽인 소리 같았다. 며칠 동안의 노름에 찌들려있던 몸이 홀로 덜그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평일의 오후, 감옥에는 관람객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 안내원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문득 빛이 스며드는 층계를 걸어내려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연결통로를 걸었다. 그들이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 때문에 안내원은 그들이 규정을 위반하고 있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했다. 안내원도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거나,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들지 않았다. 고요는 완강했다. 바닥이 철창으로 되어있어 1층과 2층이 한눈에 보이도록 되어있는 옥사의 복도에서는, 보이는 것이라곤 아래 위로, 앞으로 뒤로 감방 뿐이었다. 감방은 비어있었고, 어두웠고, 조용했다. 안내원은 정해진 순서대로, 옥사에서 고문실로, 그리고 사형실로 걸음을 옮겨갔다. 오래 전에 쓰였던 형틀이 그대로 놓여있는 고문실은 눈이 아프도록 어두웠으나, 교수대가 설치되어있는 사형실은 창마다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교수대도 교수대였지만, 그 밑바닥에 문처럼 생긴 구조물이 섬뜩했다. 교수대 밑바닥의 문 아래에는 사람의 몸집만한 나무 통이 놓여있었는데 형이 집행된 사형수는 그 문으로 떨어져내려 곧바로 통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 집행자는 통째로 사형수를 들판에 내다 버렸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규상은 교수대에 서서 바닥의 나무 통을 내려다보았다. 몸 속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 그 항아리 속으로 툭 떨어져내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물론 어리석은 환상이었다. 그의 몸 속에 든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렇게 쉽게 쑥 빠져, 툭 떨어져내리는 일은 없을 터이니.
감옥에는 안중근의사가 갇혀있던 방이 특별실로 전시되어 있었고, 안중근 의사에 대한 한글안내판도 설치 되어 있었다. 화선은 그곳에서,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는 것도 잊은 채, 그 안내판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안중근 의사는 서른한살에 죽었다. 안중근 의사는 서른 살에 이등박문을 저격했다. 하얼빈역에서 그는 이등박문을 저격하고, 코레아우라라라고 러시아말로 조선만세를 외치고, 그리고 서른한살에 여순감옥에서 죽었다.
그날 밤 막비행기를 타고 하얼빈으로 돌아온 규상은, 하얼빈역을 지나쳐가던 택시 안에서 화선에게 말했다. 만일에 내가 서른한살에 죽을 수 있었다면, 내 죽음도 그렇게 위대할 수 있었을까?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잠에 빠져있는 듯 하던 화선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잠꼬대처럼 그의 말에 대답했다. 우린 오래 살 거예요. 그는 화선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래 살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에 남은 것이라곤, 이제까지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닌, 원통한 마음 뿐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서른한살에 죽지 못한 것이다. 그가 백살까지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서른한살에 죽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그때 죽고 싶었어요?
화선이 그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물었고, 그는 웃음으로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런데 화선이 물은 그의 ‘그때’란 언제인 것일까. 그는 서른일곱살에 이혼을 당했고, 같은 해에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감사원에서 퇴직을 당했고, 서른 다섯 살에 이미 주식에 손을 댔다가 집을 통째로 날려버린 경험이 있었다. 퇴직 후 중국으로 건너와서는, 형 대신 술을 마셨고 형 대신 여자들을 샀다. 그건 북경을 떠나 하얼빈까지 흘러온 지금까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북경에서든 하얼빈에서든, 그는 형의 돈과 연줄을 파먹고 살았다. 그가 화선을 처음 만난 것이 하얼빈에서였으니, 그녀는 그의 한국에서의 삶이 어떠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의 이력서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묻는 ‘그때’란 언제일 것인가. 서른한살의 어느날. 그는 어쩌면 20대에 죽어간 그의 친구들을 잠시 잠깐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죽었든, 교통사고로 죽었든, 고문을 당해죽었든, 실연의 상처 때문에 스스로 자살을 했든, 죽어간 자들은 어떻든 그와 함께 삼십대를 맞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미 그때 생각했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아주 오래 살 것이라고.
화선은 어땠을까. 화선 역시 서른한 살이 훨씬 지나도록 살다가, 생의 끝을 맞았다. 그녀의 생은 어느 순간 어느 정점에서 위대했었을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을 이혼녀라고 했고, 그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를 남편한테 줘버리고, 자기는 무작정 중국으로 와버렸다고 했다. 그가 형의 돈과 연줄을 파먹으며 무위도식하고 사는 것과는 달리, 화선은 중국어를 배우러 하루 결석도 없이 학교에 나가고, 정보를 모우고, 물가를 조사했다. 매순간이 치열하고, 매순간이 숨가빴던 그녀. 그랬음에도 그녀는 그와 달라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삶의 물결이 밀어낸 생의 가장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같았다. 그가 밤세워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치고 귀가를 하는 새벽이면, 홀로 잠들어있는 화선의 침대 옆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쌓이다 못해 넘쳐나 있었다. 아이가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 그가 침대에 누우면,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안아주지 못했고, 그녀가 울고 있는 동안, 등을 돌려 누운 채 헐렁한 바지 속에 손을 넣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져들곤 했을 뿐이었다.

소멸하는 것... 얼음과 눈의 축제는 그 소멸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고 웅장했고 거대했다. 축제가 열리는 곳은, 송화강의 섬, 태양도였다. 하루 종일의 고된 관광에 지쳐보이던 여행객들은, 축제의 마당에 도착을 하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우와... 머리가 희끗한 사내의 입에서 그런 감탄이 세어나오기도 했다. 빙쒸에지에의 얼음과 눈으로 만든 조형물들은 조각이라기보다는 건축에 가까웠다. 얼음 조형물 속에 등을 넣어 오색의 불을 밝힌 빙등은, 맹렬하게 기온이 떨어져가고 있는 혹한의 밤을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밝혀 놓았다. 1월 한달 동안, 하얼빈은 얼음의 도시였고 태양도는 축제의 섬이었다. 그것은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처럼, 환상적으로 도도했다.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어대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규상은 매점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시키고, 난로 옆으로 가서 휴대전화를 열었다. 그는 룸싸롱의 예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룸싸롱 샹그리라는 조선족이 사장인 곳으로, 술값도 괜찮았지만 무엇보다도 여자애들이 괜찮았다. 그 룸싸롱의 상무는 한동안 북경의 규만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고, 규상과는 둘도 없는 노름친구였다. 전화를 하는 동안 난로의 열기를 받아 녹기 시작한 발가락이 사정없이 근지러워 그는 발을 동동 굴렀다. 기온은 아마도 영하 삼십도 아래로 내려가 있을 것이다. 바깥에 있는 동안은, 콧물이 훌쩍훌쩍 나오는가 싶더니 코 바깥으로 흘러내리기도 전에 코 안에서 살얼음이 되어버리곤 했다. 날씨가 추운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아이들처럼 즐겁다고 하더라도, 셔터를 누르기도 힘들정도로 손이 시린 바깥에서 50대의 사내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건 확실했다. 룸싸롱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그들은 빨리 취하게 될 것이다. 잘 하면 자정이 되기도 전에, 여자 하나씩 붙여주고 자리를 끝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쉬고 싶었고, 자고 싶었다.
과연 풀어놓은지 삼십분이 채 못되어, 매점 쪽으로 종종 걸음을 쳐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쌰오친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행사장 입구에다 갖다 대놓으라고 했다. 매점에서 차를 마시고 몸을 풀게한 뒤 다시 바깥을 돌아다니게 할 생각은 없는 것이었다. 여행객들 쪽에서도, 기록사진을 몇장 박았으니 더 이상 볼 것은 없다 싶은 얼굴들이었다. 우와, 이거 정말 장난아니게 춥소이다. 매점으로 들어서는 사람마다 바깥의 추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하얼빈에 간다고 했더니, 누가 그럽디다. 거기서 노상방뇨를 했다가는 오줌줄기가 그냥 얼어붙는다고 말이요. 예의삼아라도 웃어줘야했지만, 규상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습관처럼 시계를 바라보았고, 오후 여덟시가 넘어서고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화선이 몇시에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에게 화선의 죽음은, 그녀의 이혼하지 않은 전남편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어제 9시 50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규상에게 있어서는, 그녀의 장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었다. 제일 짧은 3일장을 치룬다고 해도, 아직은 하룻밤이 더 남아있었다.
룸싸롱은 태양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들은 운동장처럼 넓은 방으로 들어가 침대처럼 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님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은, 덥게 뎁혀놓은 난방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바야흐로 본게임의 시작인 것이다. 웨이터가 들어와 양주병과 맥주병을 따고 안주를 가져다놓고 나가자, 상무가 들어와서 규상과 규만과의 친분을 강조한 인사를 했고, 그러고나서는 여자들이 들어왔다. 사내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룸 안으로 들어온 여자들이 자그마치 스무명 가까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고르십시오. 규상은 손님들에게 말한 뒤, 여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한족은 오른 쪽, 조선족은 왼쪽! 여자들이 우루루 자리를 바꾸었고, 그는 다시 손님들에게 말했다. 가운데 저 빨간 미니 입은 애를 기준으로 오른 쪽은 중국애들이구요. 왼쪽은 조선족애들입니다. 태양도에서 노상방뇨 이야기를 했던 사내가 제일 먼저 한족 쪽에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난 저애로 할까요, 했다. 말이 안 통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규상이 물었고, 사내는 말이 뭐 필요합니까, 대꾸했다. 규상은 사람들에게 술을 한잔씩 따라 준 후, 그자신은 자작으로 한 컵을 쭈욱 들이켰다. 뭐, 원하시는 분들은 오른 쪽 왼쪽으로 하나씩 두셔도 괜찮습니다. 규상이 큰 소리로 말하자, 사내들은 입이 찢어지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의 말을 알아듣는 조선족 여자들은 눈을 흘겼다. 파트너가 결정된 뒤, 그는 앞으로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부는 갈대밭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너의 아, 파, 트! 어, 저 친구 이제보니 참 잘 노네. 규상이 재스쳐를 크게 써가며 악을 써 노래를 부르는 동안 흥이 오른 손님들은 박수를 치고, 규상을 저 친구라고 부르고, 양주를 마시고, 여자의 다리와 가슴을 주물렀다. 자, 저는 불렀다 하면 메들리입니다! 규상은 마이크를 놓지 않은 채, 이번에는 ‘찬찬찬’을 부르기 시작했다. 초장에 분위기를 빨리 띄워놓고 1분이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자신이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는 노래를 세곡까지 부른 후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선택하지 않았으나 조상무가 알아서 넣어준 그의 파트너가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규상은 샹그리라에 올 때마다 늘 ‘전의 그애’를 찾았다. 전의 그 애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그 애를 찾는게 귀찮아서일 뿐이었다. 도리도리 있냐? 규상이 물었다. ‘전의 그 애’가 눈을 흘기면서 드러내는 흰 자위가 불쑥 섬뜩하게 느껴지는게, 하지도 않은 도리도리에 어느새 취해버린 듯 했다. 화선의 몸은 어디부터 타기 시작했을까? 그는 아직 화장터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가 비리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떴는데, 눈을 감기 직전 어머니는 아들을 감옥에 둔 채 땅에 묻힐 수는 없다면서 굳이 화장을 고집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불에 타는 동안에도 그는 감옥에 있었다.
두 번째 양주와 안주가 들어오면서, 룸 안의 분위기는 이제 무르익을데로 무르익었다. 그는 룸에서 나와, 규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대충 마무리가 지어졌으니, 내일은 북경에서부터 쫓아온 상식한테 모든 걸 맡기고, 자기는 이쯤에서 빠지겠다는 말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규만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받은건 형수였다. 아, 삼촌. 형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형님이 기도 중이셔서요. 요새 특별기도 중이거든요. 규상은 시계를 보았다. 밤 열시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혹시 어디 건강이라도 안 좋으신겁니까? 규상은 그대로 전화를 끊기가 뭐해, 그냥 안부삼아 물었다. 형수는 한숨을 쉬었다. 안 아픈데가 어디 있겠어요. 형님이 이젠 그럴만한 나이잖아요. 규상은 전화를 끊고, 손님들이 있는 룸이 아니라 비어있는 다른 룸으로 들어가 조상무를 불렀다. 좀 쉬었다가 가도 되지? 규상이 말하자, 조상무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화선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어. 조상무의 눈이 커졌다. 어, 언제 죽었는데? 장례치루고나서 소식 전하는 거라니까, 벌써 한 댓새됐겠네. 피로 때문에 뒷목이 뻣뻣해 규상은 목을 주물렀다. 도리도리 한번 하자. 목을 주무르면서 규상이 조상무에게 말했고, 조상무는 쯧쯧 혀를 찼다. 화선의 죽음에 대해서인지, 아니면 규상에 대해서인지 알 수 없는 쯧쯧 소리였다.
규상이 어쩌다 간혹이기는 했지만 엑스터시를 복용한다는 것을 알게된 후, 화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 이제보니 불량 청소년이었군요’ 말했었다. 그때 그는 웃음을 터뜨렸었다. 이봐, 내 나이는 말이지. 재기가 어려운 것만큼이나, 타락하기도 어려운 나이야. 사실을 말하자면 양쪽 다 불가능이지.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말을 해놓고난 뒤에는 그 말이 마치 가슴을 찌르는 듯 했다. 고백하건데, 그 어느 쪽도 포기가 안되었던 것이다. 불가능을 인정한다는 것과 포기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성질의 문제였다. 이렇게 끝낼 거라구?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렇게?
손님들의 룸에서 규상을 기다리고 있던 ‘전의 그애’가 규상의 룸으로 건너왔다. 잠시 후 웨이터가 새 술병과 안주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저 방 분위기 어때? 뭐, 보통이예요. 나 안 찾지? 지금 남자찾을 겨를이 어디 있어요? 조상무가 뭐 안 주대? 꼭 해야해요? 입 닥쳐. 조상무가 전의 그애를 통해 가져다 준 약은, 세게 취할만큼의 양이 아니었다. 그는 양주 한잔과 함께 그 약을 입 안에 털어넣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여자가 알아서 노래를 틀었다. 머리를 흔들기에 적당할만큼 리드미컬한 노래였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 어둠 속에서,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노래가 격렬해지고, 머리를 흔드는 것도 격렬해졌다. 그는 어딘가 벽에 붙어 서있는 듯 하다. 벽을 바라보고, 그 벽에 두 손을 댄 채, 다리를 넓게 벌리고, 그는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어댄다. 곧 어떤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모든 것을 잊거나, 혹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거나. 보다 확실한 엑스터시를 위해, 그는 머리를 흔든다. 맹렬하게 흔든다.
화선, 그 여자가 보였다. 새벽녘이면, 헐렁한 그의 바짓 속을 들여다보던 그 여자. 섹스가 사라지면 슬픈 일이잖아요. 당신 그게 서면, 어느날 아무데에서나 느닷없이 서면, 그런데 나한테까지 올 겨를이 없으면... 화선이 그에게 했던 말이, 숨결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화선아, 나 지금 서있니? 그의 성기로 다가오는 그녀의 손이 뜨거워, 그는 비명을 지른다. 그녀의 손에 불이 붙어있었다. 그녀는 손으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한 쪽의 팔이 다 탄 후, 불길은 어깨를 지나 가슴으로 번진다. 그녀는 타오르고 있다. 아기가 보고 싶어요. 너무나 보고 싶어요. 불길이 그녀의 말을 삼킨다. 그는 그녀를 안고 싶다. 불덩어리인 그녀의 몸에 세게 사정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사정의 순간에 말하고 싶다. 너 아니, 화선아. 무언가를 잃어버리기에도 속절없어져버린 시간들... 노름으로 밤을 세우고,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자를 붙여주고, 꽝꽝 얼어붙어 있는 도시의 한구석에서 새벽담배를 피우고... 그 시간들 속, 생에 대한 경멸조차도 속절없어져버린, 그렇게 비굴해져버린 나이를 너는 아니.
그는 여순에서 보았던 사형대 밑의 어두운 통을 떠올렸다. 화선처럼 다 타올라 사라져버리지도 못한 그의 몸은, 어느날 언젠가에 이르면, 그와 같은 통 속에 담겨 폐기되어버릴 것이다. 생은 향기롭게 썩어가는 흙이어야했으나 그의 흙은 이미 메말라버렸다. 그러나 맹렬하게 머리를 흔들고 있는 그 순간, 그에게는 슬픔과 환멸까지가 ‘엑스터시’다. 그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멋진 소풍길인 듯 하다. 따사로운 날의 봄볕이, 룸싸롱의 어두운 방안에서 머리를 흔들고 있는 그의 온몸을 뎁힌다. 우우, 우우... 그는 사정의 순간처럼 신음을 내뱉는다. 화선아... 그는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네 몸이 썩어가는 것도, 타오르는 것도 보지 못했다. 미안하다, 화선아. 미안하다...

그곳은 아청(阿城)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얼빈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한시간 가까이 벗어나 있는 소도시 아청은 발전의 속도를 타기 전인, 중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나는 이런데서 살고 싶었어요.
그의 손을 잡고, 들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화선이 말했다.
이런 데 어느 곳의 집을 사서 텃밭을 일구는 거예요.
그는 단지 화선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런 일이라면 한국에서도 가능했을텐데. 뭐하러 중국까지 와서, 그것도 북쪽 맨끝까지 와서 하얼빈에 머물게 되었을까.
텃밭을 일구다 보면요. 호미 끝에 뭐가 걸려나오는 거예요.
호미 끝에 걸려나오다니, 뭐가?
오천년 전의 사람의 뼈, 만년 전의 토기, 그런 것들이요.
아청은,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의 발상지였다. 북쪽 오랑캐 여진족들은 무서운 기세로 남쪽으로 뻗어나가 북경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그 영화의 기간은 100년이 채 되지 못했다. 아청에는, 금나라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멋진 건물이었으나, 아마도 예산부족 때문인 듯 관리가 형편이 없었다. 박물관의 유물들은 세월보다 먼저 낡아가고 있었다. 전시실의 유리상자들은 금이 가있었고, 화폭들은 투명테잎으로 찢어진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오랫 동안 도색을 하지 않은 벽에서는 회칠이 떨어져나오고, 화장실이 있는 복도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퍼지는게 아니라 터져나왔다. 그러나 화선은 그 박물관을 좋아했다. 유리상자 위에 소복하게 덮힌 먼지를 쓸어내고, 그 상자 안에서 낡아가거나 늙어가고 있는 유물들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박물관에는, 동경(銅鏡) 특별전시실이 있었다. 시대를 막라한 동경들이 넓은 전시실 하나를 가득 채웠다. 오래 전 여인들의 꿈과 욕망을 비추었을 동경들은, 세월을 쫓아 거무튀튀한 색깔로 모두 변색되어 있었다. 어머 이것 좀 봐요. 화선이 가리킨 곳에는, 동경에 슬어있던존재 당시의 상태로 말끔하게 닦아놓은 견본품이 놓여있었다. 그는 동경의 원래 색깔이 황금빛을 닮은 노란색이라는 것을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거울은 화선의 둥근 얼굴을 가득 담고 노랗고 은근하게 빛났다. 그 거울 속에서 화선의 얼굴은 창백해보이지 않았고, 예민해보이지도 않았다.
유리 상자 안의 동경들은 세월의 녹을 묻힌 채, 그 거울 속에 담겼던 천년 전 여인들의 얼굴을 모두 지워버린 채, 완강하게 어두웠다. 화선과 그는, 이제 그 존재의 형식이 달라진, 푸르고 검은 빛의 동경들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거울은 차갑고, 무겁고, 조용했다. 우리는 오래 살 거예요. 화선이 말했던가. 우리는 오래 살겠지만,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또 화선은 말했을 것이다. 참... 다행이예요.

규상은 이튿날 오전, 기어코는 손님들을 공항에까지 데려다 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공항에서 손님들은 북경에 있는 박사장님께 인사를 전해달라는 말로, 그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것은 그들이 ‘규만의 접대’에 대단히 만족했다는 의미였다. 그는 다섯명의 서울 손님들과, 북경에서 쫓아왔던 상식에게까지 일일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쌰오친의 차로 되돌아와서야 그는 몰아치는 듯한 피로를 견딜 수가 없었다. 손님들에게 두둑한 팁을 받은 샤오친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쌰오친이 보온병에 담긴 차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기가 마시려고 준비해둔 것이지만, 네가 마시는게 더 나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싸구려 모리화잎이 들어있는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가며 다 마셨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쌰오친의 차는 어느새 송화강변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쌰오친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삼십분이나 훨씬 지나서야 그는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규상은 쌰오친에게 다시 송화강으로 가자고 했다. 쌰오친의 차가 송화강변에 이르러 속도를 늦추었을 때, 규상은 그냥 아무 데에나 세우라고 말한 뒤 가방을 강변 쪽 길에다가 내려놓고는 다시 차에 탔다. 쌰오친이 놀라서 뭘 하는 거냐고 물었으나 규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쌰오친이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고, 심지어는 화를 내기까지 했기 때문에 규상은 무슨 말이든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죽은 여자 물건들이야. 이젠 필요없게 됐잖아. 쌰오친에게 그의 대답은 좀 의외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쌰오친이, 가방 속에 있는 것들이 옷같은 것들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뭔데? 왜 자꾸 물어봐? 아무리 죽은 사람 거라도, 길거리에 버리는 건 그렇잖아. 길거리에 버린 거 아니야. 강에다 버린 거지. 가방 속에 있는 건 그물이거든.
하얼빈은 만주어로 그물말리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였다. 화선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하얼빈에 정착을 했다고 했다. 그가 그녀와 함께 지냈던 기간은 6개월이 채 못되었다. 그 6개월 동안, 그녀는 필사적으로 중국어를 공부하고, 매일같이 정보지를 뒤적거리고, 끼니때마다 값싼 야채시장을 찾아다녔다. 그녀의 책상에는 매일같이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집안에서는 담배냄새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담배를 한 손에 들고 자판 위에 담뱃재를 툭툭 떨어트려가며 인터넷을 검색하고, 혹은 정보지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 그물로 건져올려진 새우나 게처럼, 필사적으로 싱싱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은, 한번 젖은 채 다시는 마르지 않는 성긴 그물처럼 슬퍼보이기도 했다.
이봐, 평요. 한동안 창 밖만 내다보고 있던 쌰오친이, 이름 대신 그를 그렇게 부르고, 이어 말했다. 내가 저 가방을, 아니, 그물을 대신 태워줄게. 쌰오친의 목소리가 뜻밖에 단호했다. 왜, 왜 그래야하는데? 그가 물었고, 쌰오친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게 예의니까. 그리고 넌 내 하오펑요니까. 저 가방을 내가 다시 가져오는 걸 보기 싫으면, 넌 여기서 내려. 강 얼음을 뚫고 들어가버리라구. 봄이 돼서 네가 그물에 걸려나오면, 그땐 내가 널 버려줄게. 됐어? 그는 쌰오친의 말을 들으면서, 웃었다. 쌰오친은, 어쩌면 정말로 그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그는 샤오친이 차에서 내려 가방을 도로 가져다가 트렁크에 싣는 것을 차 안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쌰오친이 차를 다시 그의 집이 있는 방향 쪽으로 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정반대 방향인 아청으로 가자고 했다. 아청엔 왜? 쌰오친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우고 싶지 않아. 다만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버릴 수 없다면, 묻어주고 싶었다. 낮고 둥근 언덕이 있는 땅에 그녀를 매장해놓는다면, 그녀가 훗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방 속에는 그녀의 옷가지와 함께, 아청의 금나라 박물관에서 산 기념품이 있었다. 그것은 작은 손거울 모양으로 된 동경(銅鏡)이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그 거울과 함께 아무 이름도 없이 남겨진 손목뼈나 쇄골뼈 등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녀가 봄의 들판에서 연초록 새순처럼, 부서진 거울조각이나 작은 뼈조각으로 태어나는 꿈을 꿀 때면 그는 그녀에게 가만히 인사를 건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잘 잤니, 내 하오펑요... 그것은 어쩌면 그의 생에 유일하게 남게될, 편안한 꿈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