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문장처럼 나는 수줍어질 것이다 外 1편/ 나정욱:시인뉴스 포엠 (poetnews.kr)]
문장처럼 나는 수줍어질 것이다
살면 살수록 나는 문장처럼 수줍어질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쓰다 만 일기처럼 접혀질 것이며
읽다 만 책처럼 덮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어느 가을 눈부신 오후 바람도 없는 날
누군가 눈을 뜨고 가만히 나를 펼쳐 읽을 것이다
조용히 읽다 보면 고개 숙인 문장 하나가 눈에 띄어
수줍게 인사할지도 모르겠다
없던 바람이 지나치며, 안녕! 하며 오래 전하지 못한
인사를 가볍게 건넬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수줍은 문장으로
나는 늙어갈 것이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가 적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아는 척하였을 뿐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사랑은 서로의 목에 목숨을 거는 것이니
누가 내 여린 목에 목숨을 걸려 했겠는가
그래서 나를 사랑한다는 그 여인에게
나는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들과 다르게 나를 사랑한 유일한
여인이다
※ 나정욱
1990년 <한민족문학> 창간호에 「실습 시간」 외 2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며칠 전에 써 두었던 내 문장에서 힘을 얻는다』
『눈물 너머에 시(詩)의 바다가 있다』
『라푼젤 젤리점에서의 아내와의 대화』를 출간함.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회의 회원.
회원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