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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맹문재
1
대운하 공사를 반대하는 집회에 나오라는
친구들이 연락을 해오는데
나는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어쩔 수 없이 늙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를 위해
무너진 집의 서까래같이 젊음을 드러낸 적이 있던가?
우물 바닥에 찰랑이는 달빛 같은 간절함을 쏟은 적이 있던가?
싸움에서 죽는 것이 패하여 사는 것보다 낫다고
석가모니는 서른다섯 살에 깨달았다는데
2
집권자가 밀어붙이는 대운하 공사는 내게 모순인가?
가장 위대한 신통이란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는데
진리를 알아야 지혜를 소유할 수 있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는데
대운하의 모순을 밝히려면 이데올로기가 필요하고
시간을 마련해야 되는데
내게는 당장 재계약에 쓸 조건들이 급하다
모순이란 결국 밥에서 나오는 것인가?
3
이데올로기의 몸속에 물이 흐르거나 불이 타오르거나
구름이 흐르거나 파도가 철썩대거나
내게는 지금 모순이 아니다
깨끗한 손으로 생명수를 내거나 흉악한 손으로 새의 껍질을 벗기거나
대운하의 설계도가 지워지거나 곡괭이질로 요란하거나
또한 모순이 아니다
자신을 스스로의 섬으로 삼아야 된다고
석가모니가 한 말을 무슨 뜻일까?
내게는 광야를 함께 건너가야 할 친구가 필요한데
친구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하는데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1991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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