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내일을 여는 작가』신인상 수상자 발표


본회에서 공모한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은 시 부문에만 수상자가 나왔습니다.
소설과 평론부문에는 아쉽게도 당선작이 없었습니다.
수상한 분께는 축하를, 투고해주신 모든 분들께는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보냅니다.


수상자┃김경철 - 도원경 외 4편




도원경(桃源境)



전생에 한 번 와 봤음직한 어느
후미진 뒷골목, 오래 전 잃어버린
집 주소지를 찾은 듯 멈추어 서서
오래전 잊고 있었던 복사꽃 향기를
훅 하니 맡는다

오늘은 운이 좋아 이곳을 찾아왔다지만
내일은 운이 나빠 이곳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담에 어린 꽃문양이 손 사이로 지나간다 안방의 벽에서부터 흘러왔을, 뿌리내린 자잘한 금들의 냄새가 훅하니 다가온다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을 저 자잘한 금들, 안을 열면 고스란히 귀뚜라미의 젖은 눈썹들이 쌓여 있을 법한, 햇살에 감긴 눈꺼풀에 한 세상이 어린다. 혼몽한 꿈결에서나 본 듯한 시절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빗물이 소복이 고인 장독대며 말라버린 우물에 철렁 떨어진 불빛들이 고스란히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내 눈의 일부가 저 불빛 속에서 자랐다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복사꽃 환하게 핀 집 안을 남몰래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졸다가 지나가버린 한 생처럼 오래 전 이곳에 묵었던 바람에 타고 있는 저 향기.






왕오천축국으로 가는 주문
-절벽에 찍혀 있는 새



입을 열자, 산철쭉에 앉은 붉은 점모사 나비가 파르르 떠는 스님의 눈가에 스쳐 날아간다. 거북의 등껍질 속 갑골문자를 읽는 듯한 저 주문은 서쪽으로 지는 저녁해를 달았다. 목구멍 너머 발끝에 걸린 왕오천축국으로 가는 말문(末文)은 아니었을까? 목구멍 속, 울대에 매달린 붉은 꼬리 원숭이가 목젖에 범벅이 되어 있다. 끄아악 끄악 입으로 넘어오려는 저 포유류는 주문의 근원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제 목소리를 닮은 짐승 하나씩 키운다. 햇살 한줌과 터럭에 걸린 이슬을 모아 한 끼를 때운 듯한 가랑잎 위에 맺힌 다시래기 소리처럼 저 주문은 쓸쓸한 화전의 열기는 아닐까? 스님의 콧잔등에 어린 땀방울은 열을 마친 염주알로 둥글게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 허공에서의 삶을 다 마친 거미의 속눈썹이 땅 그늘에 맺혀 있다. 박제된 벌레들의 날개 소리 속에서 불고 있는 주문의 열은 스님의 눈을 해동시킨다. 눈알에 절벽에 새가 찍혀진 것처럼 금이 간다.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



혹,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졌다면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은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내달렸을 것이다 초목과 유목민이 사는
몽골 어디쯤, 흙 속에 움트는 씨앗처럼
몽골 고원지대를 소원했을 것이다
나침반처럼 자장 끝을 매섭게 노려보는
저 말, 말 등잔이 몽골알타이에서
고비알타이로 이어진 산맥처럼 씰룩이며
울란바토르의 젖줄, 툴강이 생각난 듯,
처음 켜는 시동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떤다
과열된 엔진처럼 부동액을 끌어올리며
전생에 한 번 스쳐온 듯한 그 길, 그 고원,
그 광야를 떠올리면서
수백 억 년에 걸쳐 묻어두었던
원유를 뽑아 올리면서 화염처럼 뜨겁게
심장을 달군다 신호도 없고 경계도 없는
그 광야로 택시미터기 안에서 뛰고 있는 저 말은
한없이 뛰어간다 마침내 택시 그림자가
택시를 박차고 달려나간다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진 듯
택시 한 대가 눈동자 속 터널을 빠져나간다




천 개의 고원



심장에 닿기 위해 내 안의 말은
사방팔방 몇 십 리,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 내달려간다 히말라야
산하에서 내려다본 무수한 하천 너머
푸른 대지를 녹이는 한낮의 햇살처럼
작고 따사로운 풀잎에게 눈인사하는
내 안의 말은, 산양의 피를 마시는 저
저녁의 목책까지 훌쩍 뛰어 넘어간다
동음이의어로 가득한 일상의 목울음까지
내 안의 말은 새롭게 되새김질한다
산과 바다를 향해 절벽이 끌어안는
포말까지, 버티고 서서 우는 내 안의 말은
잠시 말울음으로 흩어진 갈매기떼를
정렬시키고 다시 비상한다 내 안의 말은
심장 너머를 본다 천 개의 고원, 천 개의
하천이 모이는 이 바다에서 내 안의 말은
말갈기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본다
내 안의 고동이 저기 저 천 개의 고원까지
둥둥둥 울려 퍼지는 뱃고동으로 전해진다
하루를 천년처럼 충전하는 하루살이처럼
내 안의 말은 잠깐 동안 반짝인다, 눈빛을




시집가는 날



가을에는 붉은 단풍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시집간다. 자기 가문을 떠나 다른 가문으로 이동하는 바람의 가마를 탄다. 허나 눈물짓지 아니하는 단풍이 없고 뒤돌아 손 흔드는 쓸쓸함이 베이지 않은 나뭇잎이 없다. 부정의 부정을 손 흔드는 단풍이여, 가을이여. 나 시집간다.
황금 들판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는 새떼들에게 한 편의 시를 띄워 보낸다. 허구처럼 쓸쓸한 날, 지나온 생이 그렇다. 저 논에 무르익어 가는 벼들은 왜 고개 숙일까. 밑동이 베이는 아픔을 삭이기 위함인가. 나 빈 논처럼 쩍쩍 갈라지는 겨울 지나 봄을 맞는 새색시 같다. 허나 시집이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텃밭을 가꾸다, 꽃 지고 속내 오므리는 열매처럼 단 하나의 씨앗을 뱉어내는 것. 붉은 저고리 하나 푸는 밤. 하늘은 높고 쓸쓸한지 이내 손톱을 깨문다. 철렁, 우물에 떨어진 두레박처럼, 다시는 길어 올리지 못할 마음 하나 깊고 깊다. 문풍지 너머 벌레들의 울음이 밤송이처럼 까칠하다.



• 당선소감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그는 내 곁에 없었다.” 영화 『동사서독』에서 복사꽃을 떨어뜨리던, 여배우의 이 말이 자주 생각나는 가을이었다. 기다림은 나의 뿌리를 땅 밑 깊은 곳까지 뻗어가게 했다. 컴컴한 땅 속에서 나는 지하의 비밀들을 시어로 길어 올리곤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하이에크의 ‘암묵적 지식’을 이해했을 때, 나는 수면 아래 잠든 언어들과 함께 행복했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둠이 주는 습기에 서서히 젖어들었다. 내 뿌리는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 걸까? 뿌리를 거두고 싶은 날엔, 세상과 절연한 장자 형을 찾아가곤 했다. 택시에서 내리기 직전 형이 말했다. 꿈이 아름다운 것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재연 스님은 과정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몰랐던 땅 위에서 봄소식이 왔다. 그곳에서, 그 가지 끝에서 첫 복사꽃이 피었나보다. 세상 끝까지 꽃향기를 퍼뜨리고 싶다.

나의 ‘암묵적 시어’를 혼자만 간직하지 않게 해 준 두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나의 글쓰기를 이끌고 기다려 준 선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유정이와 나의 유토피아 ‘BC 3세기’ 동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카오산 로드에 있는 ‘우리들의 천재’ 홍진이의 위대한 소설을 기다리겠습니다. 말없이 우리들의 가슴을 달래주던 태건·경인·태영·원갑 형과 해설 씨에게 이 꽃소식을 전합니다. 끝으로 이 시들이 실리기까지 수고로운 땀을 흘릴 편집자들과 제3세계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 인쇄소 노동자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약력┃김경철-1974년 인천 부평 출생.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재학 중.



• 심사평(시부문)

2005년 『내일을 여는 작가』신인상의 시부문에 응모된 작품들은 작년에 비하면 응모 편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평년작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일상을 놓치지 않으면서 섬세한 서정으로 새로운 시적 활력을 꾀하는 서정시들이 눈길을 끌었다. 2000년대도 중반에 접어들면서 시단에는 젊은 시인들의 환상적이고 발랄한 언어들이 넘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보다 더 진취적일 것 같은 응모자들이 삶에 진중한 자세를 보인다는 점이 특기할 만했다. 응모자들의 이런 현상은 삶과 유리된 언어들의 화려한 비상만이 시적 새로움은 아니라는 반성이 작용한 탓도 있지만, 우리 잡지가 ‘민족문학’을 표방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면도 있다.
선자들의 꼼꼼한 토론 과정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된 작품으로는 김두란의 「낙타」외 9편, 정영희의 「상처」외 9편, 안동하의 「빛무덤」외 9편, 심인숙의 「숭어처럼」외 9편, 김경철의 「도원경(桃源境)」외 9편 등이었다.
김두란의 작품은 사막에 비유되는 삭막한 일상을 견디는 화자의 내면을 잔잔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신의 내면에 치중한 나머지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고 언어의 밀도가 약화되고 있다. 자신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지 말고 좀더 사물의 편에서 자신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정영희의 작품은 객관적 심상의 제시를 통해 자연 풍경을 묘사한다. 언어를 만지는 솜씨가 오랜 수련 과정을 엿보게 하지만 표층에 머물 뿐 깊이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분에게는 시적 주제의식을 압축해낼 수 있는 깊이 있는 이미지가 요구된다. 안동하의 작품은 낡아가는 사물에게서 희망을 발견해내려는 시선이 장점이다. 그러나 이 장점이 단점이 될 수 있다. 낡은 것들에 대한 애착은 좋지만 그것이 정형화되면 세상을 자기 나름의 깨달음의 언어로 제단할 우려가 있다. 마지막까지 남은 심인숙의 작품은 자기 나름의 시적 호흡으로 시적 대상을 육화해내는 솜씨가 수준급에 이르고 있다.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숭어의 움직임으로 형상화낸다든가 하는 이미지의 생동성이 반짝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편들이 세련된 감각에만 머물러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목소리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김경철의 작품에서 보이는 사물의 이면을 투과해낸 감각적이며 비의적(秘意的)인 언어와 유목민적인 활달한 상상력에 대해서 조금은 칭찬해줄 필요가 있다. 그의 시편은 전생의 기억처럼 우리 주변으로 습합하는 점성을 지니고 있다. 「도원경」에서 보이는 후미진 뒷골목에서 만난 담벼락 안의 복사꽃 향내에서 “귀뚜라미의 젖은 눈썹들”을 건져내는 내밀한 상상력이나, 「천 개의 고원」에 나타나는 “동음이의어로 가득한 일상”을 “새롭게 되새김질”하려는 말(馬 )의 운동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오래 전 사라져간 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예민하고 활달한 언어를 운용할 줄 안다. 그러나 투고작에는 수준이 고르지 못한 작품들이 섞여 있을 뿐 아니라 적절치 못한 직유의 남발 등 가다듬어지지 않은 표현 등이 눈에 띈다. 앞으로 내밀한 감성과 드넓은 상상력이 절묘한 시적 울림으로 결합될 수 있게끔 더한층 매진하여 좋은 시인이 되기를 기원한다.
- 안도현, 박형준



• 심사평(소설부문)

올해에도 소설 부문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작년보다 응모작의 평균 수준은 높아졌으나, 안심하고 내세울 만한 신예는 아쉽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신인 소설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그들 대부분이 또 너무나 쉽게 잊혀지는 요즈음이다. 젊은 소설가들의 목소리가 서로 어슷비슷하게 닮아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럴수록 소설가라는 짐을 오래 감당하리라는 믿음을 주는 어떤 개성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독자의 정당한 권리이다. 단순한 기술적 세련이나 동시대의 유행에 재빨리 편승하는 영리함과는 필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을 그 새로운 소설적 개성과의 만남을 선자들은 한 해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응모작 가운데서 선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든 작품은 4편이었다.
한빈 씨의 ｢무숙｣은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의 육성을 담고 있다. 열차역에서 노숙하는 이들의 뼈아픈 사연을 들추면서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기극의 내력을 미화 없이 펼쳐보인다. 이런 제재의 소설들을 여간해서는 찾아보기 힘들어진 마당에 당대의 현실에 밀착하려는 작품의 의도는 사줄 만했지만, 그것이 어색하거나 부정확한 문장의 잦은 구사, 인물 묘사의 평면성이라는 단점까지 덮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유선주 씨의 ｢귀무덤｣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보내진 조선인들의 잘린 귀가 묻혀 있다는‘귀무덤’을 공간적 배경으로, 어느 파산한 한국인 사내의 고독한 행로를 다룬 작품이다. 문체는 세련되어 보이고 등장인물들도 선이 분명하게 그려진 편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일본인들이 신사에 매달아놓은 ‘소원 쪽지’들을 불태우는 결말 부분에 나오는 “떠도는 사람들한텐 고향도 타향도 따로 없어요”라는 말은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기는 하되 새롭다거나 울림이 큰 전언이라고 하기 어려울 듯하다.
김애현 씨의 ｢카리스마탭｣은 백화점 의류매장의 판촉모델들을 통해서 우아하고 화사한 조명 아래 벌어지는 살벌한 생존경쟁의 현장을 구경시켜준다. 이 작품에는 작자의 오랜 수련이 느껴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다만 바비인형처럼 박제된 채로 이윤추구에 동원되어야 하는 인물들의 고단함에 대한 묘사, 소소한 갈등 끝에 그들 사이에 마침내 이어지는 유대의 손길이라는 설정이 지나치게 정석적이지 않은지, 그래서 작품의 흐름에 대한 사전예측을 쉽게 허용하고 있지 않은지, 독자는 되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희 씨의 ｢나의 왼쪽｣도 아까운 작품이었다. 왼쪽 뺨에 화상을 입고 살아가는 여성이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 점이 가슴에 와닿는다. 주인공이 간직한 슬픔과 누추함의 자의식과 대비되면서 여러 번 등장하는 별/별자리의 심상도 낡아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이 이윽고 가닿는 자기긍정의 지평이 세상과의 구체적인 갈등 끝에 도달한 지점라기보다는 독백적 관념의 소산에 가깝다는 인상을 걷어내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승희 씨가 함께 보내온 여러 편의 소설이 이 작품의 수준에 많이 못 미치고 있다는 점도 선자들을 망설이게 했음을 덧붙여 말해두고 싶다. 조금만 더 정진해주셨으면 한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린다.
- 고영직, 박수연, 손경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