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책소개> -『독일문학과 리얼리즘』에 대해

격동기에 진보 진영의 문학적 아성이었던 『실천문학』의 편집위원과 이사로 활약하였던 문학평론가 김태현 교수는 여전히 날카롭고 섬세한 필치로 우리문학 현장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 생생한 현장에서 체득한 인문학적 소양은 한국문학과 더불어 독일문학을 연구하는 김태현 교수의 정신적 뿌리다. 그의 독일문학 연구의 토대는 그의 비평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리얼리즘으로 독일문학을 탐구한 성과가 이곳에 모여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선구적이다. 게다가 개성적이다. 외국문학을 구경꾼처럼 건조하게 분석하거나 안내원처럼 산만하게 소개한 글이 아니라 선명한 입장을 견지하며 독일문학을 흥미롭게 분석하고 해석한 글이 이 책의 주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말하자면 이 저서는 리얼리즘이 지난 세기의 낡은 개념이 아니라 21세기의 다양한 동태를 정면에서 조준하는 이들의 살아 있는 문학사상임을 웅변한다.
독일의 시적 리얼리즘의 대변자인 폰타네, 서사극의 대가요 진보적 문학정신의 대변인인 브레히트,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온몸으로 겪고 이를 문학으로 조형한 이 시대의 독일 지성인인 크리스타 볼프와 귄터 그라스가 이 책의 진정한 주역들이다. 그들은 독일문학을 대표하면서 독일 리얼리즘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한 작가들이다. 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그들 문학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외국문학의 단순한 연구를 뛰어넘는 깊은 의미가 있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접점을 찾는 일과 우리 문학의 세계화라는, 이 시대의 요구와 위상에 부응하는 우리 문학의 당면 과제와 그것은 직결된 탓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외국문학의 연구가 오늘 이곳에서 나아갈 방향을 예시한다. 이 저서가 우리 학계와 독자에게 던지는 심장(深長)한 속뜻이 여기에도 있다 하겠다.

<머리말> - 독일문학으로 가는 길

1965년 4월에 가족과 함께 내가 아버지를 찾아 상경하는 길에 문경새재를 넘으며 바라본 진달래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11살의 나는 책보 대신에 고추장 단지를 어깨에 메고 버스를 탔다. 그 단지는 내 가족의 밑반찬을 담은 보물이었기에 그걸 간수하느라 나는 딴전을 볼 수도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맡아본 휘발유 냄새로 멀미가 심해 정신마저 혼미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낡고 위험한 버스 창밖으로 무심코 바라본 그 꽃은 지독하게 예뻤다. 난 아름다움에 취약하다는 걸 어렴풋이 감지하였다.
서울로 와서 내게도 꿈이 생겼다. 공부할 책상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는 게 당시 나의 가장 큰 꿈이었다. 나의 도토리 키만 한 꿈을 키울 책은 여전히 우리 집에 없었다. 이따금 만화를 본 게 그 시절 내 독서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덕동 사는 동무의 집에 갔다. 그곳에서 나는 『소공녀』와 『플랜더스의 개』 등을 읽으며 이야기라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그 蓮池에 잠시 빠졌다. 그날 나는 무단으로 외박하였다. 그 무렵에 이미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노출된 셈이다. 말과 이야기에 중독될 기미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지옥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다달이 시험지 값으로 500원을 내며 모의고사를 수없이 치렀다. 하지만 당시에 일류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과외 열풍이 불고 있었다는 것도 나는 하얗게 몰랐다. 나는 달동네에서 자란 변방의 이방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로 진학했지만 아직도 나의 곁에는 책상도 책도 없었다. 그때 나를 위로한 것은 수학이었다. 특히 무슨 數든 어떤 圓이든 계측하는 재미가 막연하게 삶의 쓸쓸함을 느끼던 소년을 달랬다. 의지할 책도 없이 지내던, 그러므로 정신적 孤兒나 다름없던, 소년에게도 어김없이 思春의 沙風이 거세게 불어 닥쳤을 때였다.
중학교 졸업할 때 제법 큰 상을 받았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상품으로 받았다. 나는 그 무거운 사전과 조악하게 인쇄된 졸업장을 옆구리에 끼고 학교가 있는 종로에서 집이 있는 아현동까지, 눈이 푹푹 내리는 가운데, 혼자 터벅터벅 걸었다. 졸업식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못 오셨다. 나는 졸업식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고교 입시에 대한 중압감과 알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남몰래 느끼며, 친구들의 사진 찍기 권유도 뿌리친 채, 二八靑春의 한복판에 있던 나는 그렇게 한 點의 雪景을 조성하며, 대도시에서 게걸음을 쳤다. 그 탓에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그 대신에 나는 『국어대사전』을 늘 곁에 두고 펴 보는 습관을 얻었다. 우리말은 어느새 나의 배신하지 않는 측근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 나의 일상은 이전과 판이하였다. 내게도 드디어 동생들과 함께 쓸 책상 하나가 생겼다. 그러나 나는 그마저 동생에게 양보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책이 즐비했던 학교 도서관, 친절한 할아버지가 차린 북아현동 서점, 여학생도 자유롭게 드나들던 독서실을 방과 후의 아지트로 삼았다.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통행금지 시간이 오기 전에는 그 세 은신처를 晝夜長川 오락가락하였다.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숙제하듯이 탐독하고, 이광수와 김동인과 염상섭과 최서해와 이상의 소설을 읽고, 김소월과 한용운과 윤동주와 이육사와 노천명의 시를 외우고, 조연현과 백철의 문학사를 들여다보며, 서정주와 문덕수와 김동리의 문학론을 성급하게 탐문하였다. 150여 편의 시를 외우고 소설 같은 한국문학사를 주절대며, 서지학자이셨던 白淳在 선생님과 학교에서 자주 대화하는 일로 분주하기도 하였다. 입시에 신경을 온통 내주는 모범생의 길을 벗어나 문학의 덫에 자발적으로 걸린 문학청년으로 부지불식간에 나는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문과생으로는 드물게 <수학반>에서 활동하였다. 수학경시대회에도 나가며 수학에 매료되었다. 말하자면 나의 오른팔에는 문학이 왼쪽 팔에는 수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을 하겠다는 각오는 비교적 단단하였다. 날이 갈수록 나는 문학 이외의 것을 상상하지도 못하는 바보가 돼 갔다. 부모님과 불화가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왜 그런 걸 하려고 하느냐고 아버지는 무척 꾸짖으셨다. 집안에서 말썽을 부리지 않았던 내게 그런 용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단호하게 인문대로 진학해 문학을 하겠다는 다짐을 공공연히 피력하였다. 부모님의 눈에는 내가 문제아로 보이기 시작한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관악산 밑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그 불화를 조금 줄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대학교는 나의 기대를 철저하게 저버렸다. 문학에 몰두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수상한 시절이 나를 기다렸다. 긴급조치와 교련과 군사정권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를 입에 담으며 학교에 염증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 여파로, 인문대나 도서관에 있다가도 ‘아크로폴리스’에 나가 최루탄에 눈물 흘리며 ‘사나운 새’와 대결하는 장면을 몇 번 연출하였다. 그 새도 그 쥐도 모르게, 학교의 철문마저 이따금 닫혔고, 병영에서 학교로 돌아와 맛본, 1980년 서울의 달콤한 봄날도 찰나였다. 그 직후 광주에서 번진 洶洶한 소문으로 이빨마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나의 청춘은 방황과 고통과 분노의 삼각형을 맴돌았다. 그 필연적인 귀결로, 學窓에서는 자부심도 즐거움도 거의 느끼지 못하였으며, 되레 부끄러움과 무력감과 절망을 天刑처럼 안고 지내는 나날이 많았다.
그 어둡고 갑갑했던 시절에 그나마 『창작과비평』과 김수영과 김지하와 황석영과 조세희와 박경리는 더러 나의 구세주가 되었다. 물론 그것도 일시적이었으며 나는 자꾸 다른 곳으로 눈길을 던졌고 발길을 돌렸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面目과 肉聲을 이런저런 현장에서 ‘몸’으로 보고 들으며 나의 세계관을 다졌다. 신채호와 백범과 백낙청과 리영희와 강만길, 그리고 막 쏟아져 나오던 사회과학 서적이 나를 사로잡았다. 넓게는 역사와 사회의 滾滾한 흐름에, 좁게는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이들의 困困한 현실에, 눈을 뜨게 해준 그 서책은, 내가 기증한 약 5천 권의 책 속에 포함돼, 지금 순천향대 도서관에 있는, 내 이름을 단, 서가에 고스란히 진열돼 있다. 젊은 날의 튼실한 받침대였던 그 도서로 나는 세상의 구조와 밑바닥을 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似而非 진보인사가 되었다.
그 틈바구니에, 차디찬 겨울바람으로 먼지가 풀풀 나는 학교를 등지며, 나는 무사히 졸업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 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토록 鬱鬱한 현실의 늪에서 슬며시 한 발을 빼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한때 꿈이었던 문학이 이제는 꿈이 아니라 현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의 무기력한 기호로 보였다. 서글펐지만 그런 문학이 나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인생의 패러독스를 통감하였다. 그 순간에는 젊음도 인생도 베일 속의 그 무엇인 것처럼 보였다. 야무진 야망도 뚜렷한 포부도 없이 그렇게 문학을 동아줄로 다시 붙잡았다. 그와 더불어 독문학과 데면데면하게 대면하였다.
대학원에서 재회한 독문학은 내게 여전히 낯설고 까다로웠다. 종잡을 수 없고 정체 모를 녀석이었다. 어디를 붙잡고 어디를 파헤쳐야 진면모를 드러낼 물건인지 모른 채 독문학의 迷路로 무작정 진입하였다. 이상하게도 그 수수께끼 같은 길에서 체득한 당혹스러움이 나의 ‘심보’를 건드렸다. 도전의 욕구가 불현듯 생긴 것이다. 학비 걱정을 덜어주신 은사님 덕분에 그 욕구가 현실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실현되었다. 공부하는 새새 한눈을 종종 팔던 제자를 크나큰 품으로 끌어안으셨던 은사님의 속내를 나는 아직도 모른다!
공부가 죄가 된다는 생각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서서히 나는 연약한 문학도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문학을 사랑과 변혁의 무기로 여기는 이들과 함께 문학 속에서 혹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길거리에서 행진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섰다. 한 손에는 독문학을 다른 한 손에는 우리 문학을 들고, 그 탓에 양손이 몹시 무거웠던 때에, 동인지를 만들고 문단에 얼굴을 내밀며 문학도로 행세하였던 것은 그 새로운 희망 때문이었다. 그 희망으로 『문학의 시대』와 『실천문학』과 인연을 맺으며, 나를 즐겁게 유혹하고 기만한 문학, 나를 부추긴 문학 주변의 사람과 잡지 덕분에, 나는 문학에 대한 뜻 모를 미련을 끝끝내 버리지 못했다. 나를 문학의 올가미에 가둔 그 세목을 나열하고, 그리운 이들을 부르고 싶지만, 참자!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처지인 만큼 독문학을 하되 우리 현실을 읽는 데 이바지할 독일의 작가와 작품을 물색하였다. 그게 나를 변호하리라는 속셈의 산물이었다. 특이한 리얼리스트 폰타네는 그래서 문득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가 나의 벗이 되자마자 나는 짝사랑하는 情人에게 순정을 바치듯이 그의 책을 구했다. 독일에서 1년 동안 연구교수로 있을 때는 한국으로 부친 고가의 책이 대략 500권 되는데 그 대부분이 폰타네와 관련된 책이었다. 나의 문학적 情婦요 精分이었던 그 책들도 순천향대 도서관으로 수년 전 이사해 새 주인을 鶴首처럼 고대하고 있다.
문학과 동행하면서 줄곧 나는 너무나 어리석었다.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에 철저하게 무관심한 시대착오적인 행적으로 일관하였다. 그런 것과 한참 동떨어진 冊과 冊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물질을 숭상하는 근대화의 물결 바깥에서, 책과 노닐던, 전근대적인 인문학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看書癡였다. 내가 책을 읽을수록 책은 나와 다투었고 나를 어지럽혔으며 그리하여 간혹 책이 미워질 때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문학과 관련된 책은 더러는 나의 베개가 되고 더러는 나의 이불이 되었으며, 그 책은 나에게 조국의 젖과 타향의 꿀을 준, 은밀하게 나를 키운 나의 保姆였고, 종국에는 나의 울타리가 되었다. 그 울타리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였고, 술과 우정을 나눈 文友와 弟子를 만났고, 스무 살 무렵에 품었던 관념적인 혁명을 포기하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명분을 얻었다.
이 책은 그런 道程에서 독문학을 만나 얻은 사연 몇 가지를 거칠게 드러낸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감추어 두었던 비밀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 같아 약간은 두렵고 조금은 떨린다.
오래전부터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우주와 세상의 축소판처럼 보인 말에 탐닉하며, 서늘한 서정과 진진한 이야기에 붙인 마음의 끈을 終是 떼 놓지 못하던 이가, 독문학을 넘어 문학을 넘보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인문학을 슬쩍 훔쳐본 자취가 여기에 좀 있으렷다! 그게 독문학으로 가는 길에서 내게 일어난 촌스러운 사건이렷다!

2011년 가을
김태현

<저자 소개>

김태현(金泰賢) 약력(2011.10)

1956년 3월 1일 경북 예천 출생

서울고 졸업(1975년 2월) 서울대 인문대 졸업(1981년 2월)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서울대 조교(1981.6-1984.2)
서울대, 단국대, 순천향대에서 강의(1984.3-1985.2)
순천향대 교수(1985년 3월 1일 이후 -현재)

독일 지겐(Siegen) 대학교 국비 파견 연구교수(1988.9-1989.8)

순천향대 인문과학연구소장(1997.4-2002.2)
순천향대 인문대 학장(2000.3-2002.2)
순천향대 교무처장(2005.1-2006.12)
순천향대 교학부총장(2009.1-2010.12)

문학활동:

1989년 이후 2010년까지 문학 전문 계간지 『실천문학』 편집위원과 이사를 역임

『출판저널』 서평편집위원(1990.7-1994.1)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편집위원(1995.8-1995.12)
<대산문화재단> 대산문학상 심사위원(1995, 2002)
<중앙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 『실천문학』『시와정신』등 여러 신문과 잡지의
신춘문예와 신인문학상 심사위원(1991-)

<대산문화재단> 기획위원(1998)
<대산문화재단> 한국문학 번역 심사위원(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