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이시백의 첫 소설집 [890만 번 주사위 던지기]
(삶이보이는창, 2006년 10월 16일)

1970.80년대 세태를 풍자하는 소설집. 오늘날 정겨운 이야기로 둔갑하지만, 그 속은 슬픔과 억울함이 넘쳐흐르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록된 50여 편의 짧은 소설들은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을 가진 '자유단편'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부득부득 하는 사람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던, 결국 ‘한 발의 총성으로 사라져간 그’와 ‘한 하늘을 이고 살’ 시절과 그 이후 시절의 권위적인 세태를 대상으로 한 이야기이다.

자유단편이라는 형식 안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드러낸다. ‘엄숙한 것들의 무덤 앞에서’라는 조사(弔辭)를 연상시키는 문구가 ‘자유단편’이라는 형식과 결합하고 있다. 이시백이『890만 번 주사위 던지기』를 통해 선보이는 익숙하지 않은 글쓰기 형태는 작가정신을 드러내는 새로운 형식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시백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8년 「동양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메두사의 사슬>, 소설집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산문집 <시골은 즐겁다>가 있다.

::책 속에서

무슨 놈의 여섯 번 던져 한 번도 나오지 않는 확률은 또 뭐고, 한 술 더 떠, 열두 번 던져 한 번도 나오지 않는 확률은 또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8만 9천5백6십7번을 던져도 3이라는 숫자가 한 번도 안 나올 확률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날 저녁, 비장한 눈빛으로 찾아가 따지듯 질문하는 그를 돋보기 너머로 지그시 바라보던 수학선생님은 말씀하시기를,
“얼라야, 세상에 어디 정답이 있노? 사는 기 다 정답인기라.”
멀거니 돌아서는 그에게, 희랍의 철학자 같은 눈빛으로 수학선생은 다음 말을 덧붙였다.
“8만9천5백6십7 번이 아이라, 890만 번을 던져도 니 3이라는 게 한 본도 안 나온다면, 그기 답이지 우야겠노? 근데, 니 설마, 주사위 붙잡구 890만 번 던지고 있을라는 건 아니겠제?”

-「890만 번 주사위 던지기」 중에서

::추천글

우리가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상층 부분은 빠른 속도로 바뀌지만 가장 자질구레한 하층 부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예컨대 정치와 상층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하지만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갑남을녀의 삶은 늘 그 타령이 그 타령이다.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시백은 별 변화가 없는 주변부 갑남을녀의 삶을 선택한다. 변함없는 것들의 자리에 덧없이 변화해가는 것들, 혹은 변화해가는 척하는 것들을 충돌시킴으로써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날카로운 풍자를, 때로는 따뜻하거나 쓰디쓴 진실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까? 그의 소설이 다루고 있는 연대와 짤막한 형식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 김진경 (시인)

인간사가 남긴 상처가 세월의 흐름 속에 스스로 아문다는 믿음은 대개 역사를 바로잡을 힘이 없는, 아직 살아남은 자들의 자기위안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것은 깊은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중금속처럼 우리 몸속에 남아 있다. 이시백은 그것을 헤집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 이시백 또한 스스로 불편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잊어서는 안 되지 않느냐고, 인간이라면 잊을 수 없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어서일 것이다. 거기에 이시백 특유의 슬픈 재담이 깃든다. -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

타락한 이 세계의 가치를 견디어내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 발견해낸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견고한 역사의 장벽에 균열 내는 노력을 동반하고 있다고. 선 굵은 투쟁이 어렵다면 나름의 방법을 찾아나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 홍기돈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