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호 시인의 첫 시집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2006년 5월 5일)
2001년 「시평」을 통해 등단한 전성호 시인의 첫 시집. 가난한 유년시절의 기억, 파괴된 고향의 자연과 공동체, 도시의 주변적 일상, 연해주와 동남아의 옛 도시에 깃든 남루한 현실을 찬찬히 조감한다.
시인 스스로 '실존적 여행시'라 이름붙인 이 시집은 먼 사물을 크게 그리는 역원근법의 시각을 채택함으로써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을 우리네 삶의 한 조건으로 깊숙이 품어 안는다. 외금강에서 서울을 거쳐 미얀마 양곤에 이르는 긴 시적 여정 속에서 현대문명의 그늘에 가려 소외된 존재들의 표정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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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호
1951년 경남 양산 출생. 동아대 경영학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졸업. 2001년 「시평」에 '기관구를 엿보며'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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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
- 줄리아에게
차창에 눈 날리고
베료쟈 나무에 오도카니 앉았던 까마귀
오늘도 배를 모대 채운 채
둥지로 날아가야 한다
날개가 무겁다
아직 덜 자란 먹빛 날개가
열차 바퀴소리를 끌고 대지 속으로 간다
어두워오는 날개여
먹을거리보다 먼저 올려다봐야 할 산이 있다
지상의 모든 만남엔 까닭이 있는 것
들판에서 말라가는 흰 푸새들의 손짓도 기억해야 한다
너는 한점 썩은 고기를 찾기 위해 까악까악 투덜대지만
시시한 울음 속에 네가 살아 있다는 것
높은 산 쉬지 못하는 바람과 구름의 들판보다
빠르게 계곡과 절벽을 넘어라
하얀 들녘도,
네가 빈 내장을 채울 동안 불어가는 바람도
둥지 속의 어린 새끼들도
빛나는 비밀
태양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혹 낮달이 나타나 희붐한 슬픔을 머금더라도
오늘은 캄캄한 날개를 펴라
::시인의 말
나는 먼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우리 삶과 무관한 듯한 역사와 삶을 관찰함으로써 지평적 존재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남루한 삶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나 자신의 어두운 지난날과 먼 곳에 있는 자들의 꿈을 하나의 의미 속에 담고자 한 십수년간의 결과물이다.
우리시에 여행시는 많이 있지만, 나는 실존적 의미의 여행시를 쓰고 싶었다. 어디서나 나는 결코 혼자서 존립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앞으로도 파괴되어 가는 고향과 항상 나를 철썩이게 하는 바다와 강, 문명의 그늘 속에서 소외된 모든 존재들의 표정을 가슴에 꼭꼭 눌러 담고 살아가리. 가능하다면 나의 시가 이유 있는 포스나, 이유 있는 세계를 형상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전성호
::추천글
전성호 시인의 검은 날개는 어둠이 묻어 있는 새벽이다. 세상을 건너는 미몽의 자아를 응시하는 역원근법의 눈이 반짝인다. 순결이 넘치는 이 첫 시집의 날개는 작고 캄캄하지만 지극한 슬픔을 껴안았다. 얼마나 머리 날아가야 '나'를 잊을 수 있고 날개는 닳아 없어질 것인지, 집착으로부터 탈주를 지속하고 '망아(忘我)'에 닿으려는 시어들은 존재의 비극을 연소시키면서 없음[無]을 주인으로 삼으려는 허무의 '말'을 닮았다. 그의 말의 형상들은 모랫바람을 입에 문 낙타가 걸어가는 도시 사막의 풍경을 하였다.
시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기억 저편의 경계를 넘어가면서 감금된 탈근대의 낡은 문을 따고 탈주한다. 이때 전성호 시인은 눈이 쉽게 열리지 않는 어둠과 빛, 절망과 침묵의 건널목에서 멈칫, 환한 대낮의 거리를 보여준다. 먼 곳에서 부러져 결국 사라지게 될 날개는 기억을 남긴 채 언어의 형상을 벗고 비형식화하려 한다. 하지만 지학 사막에서 올라온 물이 아침의 포도알 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므로 시의 노역(勞役)은 짧은 위안의 순간이라도 맛보고 길, 떠나기 바란다. - 고형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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