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오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지옥처럼 낯선]
(랜덤하우스중앙, 2006년 2월 25일)

2004년 출간된 <반대쪽 천국>과 짝을 이루는 시집. 하종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내'가 아닌 '우리'의 삶에 부지런하게 눈길을 준다. 지옥처럼 낯선,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자면 익숙하다 못해 천국 같은 우리네 삶을 담담하게, 거추장스럽지 않은 문체로 그려낸다.

'CCTV' 연작을 중심으로 한 사회 비판 시편들, 자본주의적인 삶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마케팅 에피소드' 연작들, 노숙자들의 소외된 삶을 그린 시편들, 자기 생활을 근거로 한 반성적인 시편들, 그리고 시인의 가족들을 등장시킨 곤궁한 이야기까지, 총 65편의 시가 실렸다.

하종오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 1980년부터 '反詩' 동인으로 활동했고, 1983년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지은 책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님시편>, <쥐똥나무 울타리>, <사물의 운명>, <넋이야 넋이로다>, <반대쪽 천국> 등이 있다.

::시인의 말

금세기 초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인가. 어떤 이는 자신이 망가뜨린 농촌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떤 이는 자신의 몫이 아닌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도시에만 머물려 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떤 이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간난에 헤매고 있지는 않는가. 그 모든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감시되고 있지는 않는가.

이 질문으로 내 시가 씌어지기를 원했다. 금세기 초는 국가와 기업 중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가. 개인이 생을 지탱하는 힘은 경영자와 노동자와 소비자에게서 나오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기꺼이 마케팅적인 삶을 선택하는가. 내 시가 그 실체의 일면이라도 시적 진실로 그려내기를 원했다. - 하종오


::책 속에서

한 달에 한 번


행색이 더러워서 나이 알 수 없는 여자가
공원 벤치에 앉아서
건너편 약국으로 갈 듯 말 듯
자주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실밥 터진 보따리 하나 들고
태평스레 거리 걷다가 버즘나무에 기대 쉬다가
때 되면 식당 뒷길 쓰레기통에서
음식 골라 먹었다

지금 여자는 꿉꿉해서
힘 주어 엉덩이 오므리고는
지나가는 젊은 처녀애들 살펴보며
말 붙일 듯 말 듯하다가
공원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달에 꼭 한 번
오늘도 여자가 약국 앞에 와서 서성거리니
여약사는 미간 찌푸리다가
두툼한 비닐봉지 들고 나와 건네주었다
벙시레, 여자가 생리대 꺼내 보다 웃었다


::추천글

하종오는 어떤 틀에다 맞추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진실한 울림으로 민중적 미학성을 갱신해왔다. 이번 시집은 집요하게 도시 혹은 도시인의 '마케팅적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도시에서 자연은 '어머니의 이미지'로 가공된 상품에 불과하다. 그런 반면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 변두리는 '지옥처럼 낯선' 것이 된다. 하종오 시적 미학의 탁월함은 이 지옥을 자신의 운명으로 창조하는 데 있다. 그는 긴 지하 보도 기둥 사이에 누워 의족을 떼내어 이불 밖에 내놓고 꿈꾸는 노숙인에게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그가 자연을 이상의 빛으로 설정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과 시대의 바닥을 응시하여 '노숙의 체온'으로 궁핍한 시대의 암울한 고통을 녹여줄 따뜻한 밥을 지어올릴 뿐이다. - 박형준

하종오의 시는 70년대 이후 급변했던 역사의 현장을 내면화하고 내면을 역사화하는 드문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농경적 상상력으로 민중의 삶을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근대의 이분법을 넘어선 현대성을 확보했으며, 나아가 가장 아픈 타인인 '님'을 통해 자아(自我)와 무아(無我)의 진실을 캐내는 가운데, 제국주의의 악몽을 연출하고 있는 자본주의 현실을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재현한다. 이번 시집은 노을과 바위와 철새까지도 상품화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까지도 팔아먹는 자본주의의 마케팅을 현미경과 망원경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서도, 막상 메스를 긋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서, 그의 손에 들린 메스에 반사되는 날카로운 불빛 속에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시인의 수많은 주장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종오의 조용한 열변을 꼭! 들으시라. - 차창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