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에세이 제20회

엄마의 첫 크리스마스

이 명 랑(소설가)

구립 어린이집의 로고가 새겨진, 강아지 얼굴 만한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을 향
해 걸어가다 말고 명랑이는 몇 번씩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는 한 동안 고개
를 갸웃거렸습니다. 이것은 그 즈음 명랑이에게 생긴 새로운 습관이었지요. 명
랑이는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리를 해봐도 명랑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
었습니다.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그 날도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어제와 똑같은 주
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명랑이는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이래봐
도 이 꼬마 아가씨, 자존심이 대단하거든요. 사실 속으로는 "그게 정말이야?"
하고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명랑이는 그딴 것엔 관심
도 없다는 듯이 등을 돌리고 앉아 스케치북 위에다 선긋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재인! 너는 작년에 뭐 받았는데?"
"나는 진짜로 이따만한 곰돌이 받았어."
이재인은 제 머리 위로 쭉 뻗쳐 올렸던 두 손을 다시 발등에 갖다댔습니다. 그
러니까 이재인의 몸짓대로라면 제 몸보다도 더 큰 곰돌이라는 얘기지요.
'거짓말!'
명랑이는 혀를 낼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거짓말은 끝도 없이 계속됐습니다. 명랑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에서 제일 잘 생긴 윤현상은 꼭 굴뚝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코흘
리개 민희는 머리맡에 걸어 놓을 수 있는 빨간 양말이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누구는 코가 빨간 사슴이 있어야 된다고 하고 또 누구는 그 빨
간 사슴의 코에서 반짝 반짝 예쁜 빛이 뿜어져 나와 밤하늘을 환희 밝혀줘야만
한다고 하고 바다반의 인철이 오빠는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만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제일 중요한 건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
리고 나서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되면 커다란 종이에 자기가 한 착한 일을 쓴
다음, 그 종이를 베개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명랑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아주 열심히 들었습니다. 앞으로 딱 열 밤만 자면
드디어 크리스마스거든요. 그 열흘 동안 명랑이는 무척이나 분주했습니다. 장
롱 서랍을 뒤져 빨간 양말 한 켤레를 찾아낸 일에서부터 스케치북 한 장을 찢
어 몇 월 몇 일에 어떤 착한 일을 했는지 기억해내어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까
지, 하나라도 빠뜨리면 큰 일이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크리스마스는 아직 이틀이나 남았는데 선생님께서는
바로 내일 산타가 온다는 겁니다. 명랑이는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선생님이 주
신 가정통신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크리스마스 이브에 명랑이는 엄마에게 필통 하나를 받았습니다.
필통 속에는 아직 깍지도 않은 새 연필이 세 자루나 들어 있었습니다. 명랑이
의 엄마는 그 필통을 선생님께 갖다드리라고 하고는 그 날 아침도 역시 시장통
의 식당으로 설거지를 하러 가셨습니다.
오전 간식을 먹고 나서 어린이집 식구들은 모두 마을 회관으로 갔습니다. 그곳
에서 명랑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정말 뚱
뚱한 데다 얼굴 전체가 하얀 수염으로 뒤덮여 있어서 그런지 명랑이는 자꾸만
웃음이 나서 혼났습니다.
재롱잔치가 다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이나 들어왔습니다. 명랑이는 깜짝 놀랐습
니다. 더욱 놀란 건 그 일곱 명의 할아버지들이 커다란 보따리에서 선물을 꺼
내어 아이들에게 나눠주는데 그 때마다 인철이 선물, 민희 선물, 하며 아이들
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명랑이는 그 동안 산타 할아버지
를 의심했던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어서 빨리 자기 차례가 되기를 애타게 기다
렸습니다.
드디어 산타가 명랑이 앞에 섰습니다.
"넌 이름이 뭐니?"
산타가 물었습니다.
"이명랑이요."
산타는 보따리를 펼치고 한참동안이나 선물을 뒤적거렸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그렇게 말하고 산타가 갑자기 명랑이네 반 선생님에게로 뛰어갔습니다. 하마터
면 명랑이는 울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잠시 뒤에 산타와 함께 온 명랑이의
선생님이 산타의 보따리 속에서 필통 하나를 꺼내 산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 산타 할아버지가 너무 바빠서 깜빡 잊고 포장을 안 했지 뭐냐."
산타가 건네 준 그 필통은 틀림없이 그날 아침 엄마가 선생님 갖다드리라고 했
던 바로 그 필통이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하고 필통의 뚜껑을 열자 낯익은 세
자루의 연필이 명랑이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와 명랑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엄마의 찬장 서랍 속에 가지
런히 넣어둔 가정 통신문을 꺼내어 읽는 일이었습니다.
이번 주 준비물: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 주세요. 정성껏 포장해
학부형께서 직접 담임 선생님께 갖다 주십시오.
그 날 밤 명랑이는 엄마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습니다. 잠든
엄마의 얼굴에서 명랑이는 뚱뚱하지도 않고 하얀 수염도 없는 메마른 얼굴의
산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명랑이는 보았습니다. 생활에 쫓겨 단 한번도
산타를 가져보지 못한 슬픈 얼굴의 소녀를.
명랑이는 베개 밑에 숨겨둔 빨간 양말을 꺼냈습니다. 자신이 직접 그린 산타할
아버지의 그림을 그 속에 넣고 엄마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아마도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엄마는 태어나 처음으로 산타가 있는 크리스마스의 아
침을 맞이할 테지요.

처음 올린 날: 2002년 4월 7일(일)

이명랑(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