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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같이 쓰기
조정권
황학동고가구시장에서 거저 줍다시피한 이 흑단목 책상은
폐병쟁이가 사용하다 버린 것 같다
이 책상의 표층에는 일제의 호스키스자국과 거멓게 그슬린 포연(砲煙)과
4.19 함성과 5.16 균(菌)이 번창하다 간 것 같다
다리 네개로 세월을 버티고 있는 둥그런 시커먼 흑단목
(아, 이 눌함!의 책상은)
목리(木理) 속에 객혈같이 피 쏟아낸 깊은 골이 있다
먼저 주인은 해골처럼 책상 위로 하얀 몰골 파묻고
땅속을 기어가는 괴물소리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밤늦게까지 내가 뭘 쓰고 있으면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내 옛 양정학교 김교신(金敎信) 선생이
해골이 다 된 새하얀 팔다리 들고 와
(뭐 해?)
등 너머로 내 시를 들여다보는 소름 끼친 밤 많다
질소비료공장이 있는 땅속의 굴에서 촛불을 들고
선생은 해골 사이를 기어다니고 있었을 거다
그 시커먼 물체와 책상을 둘이서 쓰는 느낌이 나는 싫지 않다 좋다
가끔 이 흑단목이 살고 있었던 밀림에서 들리는
수백 개의 둔탁한 종소리가 내 귀를 놀라게 한다
이 소리들이 어떻게 어디서 오는 것인지
나무 무늬 숲을 헤치고 들어가보니까 안개 속에서
수십마리 수백마리 검은 젖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목에 달린 소방울들이 종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런 날
내 책상 위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가느다란 다리 하나만 보인다
조정권 서울 출생. 197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산정묘지], [떠도는 몸]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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