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푸릇푸릇한 외각산 위로 부조화의 그림
처럼 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다. 내 가슴
에 칙칙한 삶의 빛깔들이 많아서일까.
회색빛 하늘이 싫지 않다.
박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
았다. 직장 동료였던 박은 낚시가 취미
다. 그가 괜찮은 낚시터 있으면 알려 달
라고 전화했을 때 무심결에 국화저수지
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낚시를 해보지
않아서 어느 저수지가 낚시하기 좋은지
잘 모른다.
삼 년 전 불과 하룻밤 사이에 6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만조였던 탓에 불행하게도 읍
이 빗물에 잠겼다. 그러나 예로부터 강화도는 자연 재해를 별로 입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비
가 내린다 해도 곧장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강화도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간석지를 논으로 바꾸는 사업이 있어 왔다. 주민들은 다섯 자
되는 말뚝을 대여섯 자 간격으로 갯벌에다 박고 싸리나무, 칡, 갈대 등으로 엮은 환장桓牆을
친 다음 개흙을 쌓아 뚝을 만들었다. 이러한 간척사업은 원주민의 현장 경험, 이주민의 인력
과 재력, 그리고 외세의 농정기술이 결합돼 이뤄졌다. 1706년 진강방죽과 선두방죽을 쌓아 마
니산이 있는 고가도古加島를 강화본도와 연결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바닷물 막는 일은 꾸
준히 진행되어 망월?장지? 삼간포? 가풍? 굴포 방죽 등이 완성됐다. 주민들은 새로 조성된
드넓은 벌판에다 볍씨를 직접 뿌려서 농사지었다.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강이 없기 때문이
다. 그러나 직파법은 농사를 전적으로 하늘에 의지하는 것이어서 수확량이 많지 ? 苛? 사람들
은 바다로 흘러가버리는 빗물을 가둬두기 위해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
부분의 천수답이 수리안전답으로 바뀌었다.

집에서 읍까지 가는 길에 내가저수지와
국화저수지가 있다. 국화저수지는 읍 주
민들 식수로 사용됐었는데 상수도가 가
설되면서 농업용수로 바뀌었고 낚시가
허용됐다. 주말마다 이곳에 꾼들이 몰려
든다.
“오랫만이다.”
내가 국화저수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
자 낚시모자를 눌러쓴 박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 그가 같이 온 동료를 정이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가방에서 낚시도구를 꺼냈다. 구름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풍경
화 속 배경처럼 산기슭 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습이 평화롭다. 저수지는 내 마음 속의 깊은
우물과 같다.
내가 삼성초등학교 다니던 그해 늦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비누를 가져오라는 과제를 냈
다. 이튿날 우리는 선생님 뒤를 따라 혈구산 아래에 있는 농도원저수지로 올라갔다. 양잿물로
만든 거무죽죽한 개똥비누가 아이들 손에 들려 있었다. 물자가 흔하지 않고 살림살이가 어려
웠던 그 시절, 아이들은 잘 씻지 않고 지냈다. 겨우내 손등이 얼어터졌고 길게 자란 손톱 밑은
새까맸으며 목덜미에 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모두 옷을 벗는다.”
저수지 둑에 올라서자 선생님이 소리쳤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옷을 벗었다. 나는 혈구산 능
선을 붉게 뒤덮고 있는 진달래를 건너다보며 머뭇거렸다. 차마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내 몸
에 더께가 져 있을 때를 생각하니 그대로 도망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옆에 내 짝인 동미
가 있었다.
“저기 옷 안 벗은 사람은 누구야?”
아이들 손톱을 차례대로 깎아주던 선생님이 호통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옷을 벗었다. 그
리고는 재빨리 작은 돌멩이를 주워 무릎팍을 벅벅 밀었다. 살갗이 금세 진달래빛 선홍빛을 띠
어 갔다.
“그러다 피나면 어쩔려구 그래?”
동미가 눈을 찌푸렸다. 면장 딸인 동미는 봄 햇살에 눈이 부실 만큼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
다.
비가 쏟아질 때 저수지에서는 이무기 울음 소리가 난다고 했다. 근처에 코가 뭉그러지고 눈
썹 없는 나환자 부부가 살고 있어서 저수지는 아이들에게 두려운 대상 중의 하나였다. 저수지
아래는 고마리와 환삼덩굴이 자라고 있는 습지대이다. 아이들은 소를 풀밭에 매놓고 그곳에
서 잠자리를 잡았고 어쩌다 뱀이 나타나면 여럿이 쫓아가서 작대기로 때렸다.
처녀 총각들은 남의 눈을 피해 저수지에서 만났다. 남녀가 숲에 나란히 앉아 있다보면 왠지
기분이 묘해져서 슬그머니 손을 잡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입도 맞췄을 것 같다. 가
끔 아주머니들이 누구누구가 저수지 숲에서 어찌어찌했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 소문이
있고 나면 가을에 어김없이 잔치가 벌어진다.
옥점이는 옆동네 남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남자네 식구가 혼인을 반대했다. 옥점어머니가
웃입술이 인중 중앙까지 찢어진 언청이였기 때문이다. 언청이는 유전성이 강한 질병이다. 결
국 남자가 결별을 선언하고 도회지로 떠났다. 반 넋이 나간 옥점이는 가슴에 점처럼 박힌 그
를 그리워하며 몸져 누웠다. 그녀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간호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가슴
시리도록 쾌청한 가을날 옥점이는 저수지에서 퉁퉁 부운 몸으로 떠올랐다.
비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아졌다. 국화저수지 수면이 명경처럼 말갛다. 낚시터에 사람들이
점점더 늘어났다. 해질 무렵 박과 정이 건져올린 붕어가 꽤 된다.
“유형, 집이 어디야?”
박이 물었다. 어차피 내 집에서 묵을 것이었으므로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자 박이 매운탕을 끓인다며 잡은 물고기를 손질했다.
“내가저수지도 괜찮을 것 같지?”

소주를 곁들인 저녁식사가 끝나자 박이
정에게 넌지시 묻는다. 낮에 경험한 손
맛이 아직 남아 있는 듯한 표정이다.
봄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둑에
앉아 밤낚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는 낚시 가방을 챙겨들었다. 걸어서
10분이면 내가저수지에 닿을 수 있다.
저수지에 도착하자 두 사람이 가장자리
에다 터를 잡았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내가저수지에 물이 그득
하다. 모내기가 시작되면 들판으로 흘려
보내질 생명수이다.

박이 내게 낚싯대 하나를 건넨다. 나는 낚싯대를 엉성하게 설치해 놓고 앉았다. 야광 찌가 푸
른빛을 냈다. 고려산 위로 보름달이 솟아올랐다. 저수지가 은색으로 물들었고 주위는 적막하
다.
농도원저수지는 삼 년 전 폭우 때 둑이 무너졌다. 더 이상 물을 가두어둘 수가 없게 된 것이
다. 나의 유년기 추억이 배어 있는 그곳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날 한적한 시골 동네에 몰려온 중장비가 농도원저수지와 환상적인 진달래 능선을 파헤
쳤다. 그 자리에다 대학교를 짓느라 우중충한 시멘트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
년 후면 고등학생 수보다 대학교 정원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한다. 군 인구가 6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대학교라니. 부동산 투기꾼들이 전국을 무대삼아 대학교를 짓게 하고 땅값만 올
려놓는 경우도 있다는데 군청에서 혹시 그런 술수에 휘말려든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도 그
렇지만 저수지가 없어졌으니 앞으로 논에 물을 어떻게 댈 것인지 의문이다.
“왔다!”
박이 나즈막이 외쳤다. 손가락만한 피래미가 그의 낚싯대에 매달려 몸부림을 친다.
은빛 저수지가 잔잔하게 출렁거린다. 옥점이도 저수지에서 남자와 입을 맞췄을까. 나는 담
배를 피워 물었다. 동미 얼굴이 달처럼 커다랗게 떠오른다.
한순간 찌가 솟아올랐다 가라앉는다. 내가 엉겁결에 낚싯대를 당기자 작은 붕어가 달려나왔
다. 아가미에서 바늘을 떼어내 슬그머니 물 속에 놓아주었다.
달이 하늘과 저수지 그리고 내 마음 속에도 하나 떠 있다.

■ 유영갑: 소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