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고 전면적으로 뜯어고쳤겠지만 새로 문을 연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한층 산뜻해졌다. 손님들로 노상 가득한 문화 공간이 더욱 붐비게 생겼는데 내가 찾은 재개장 이틀째는 하물며 굉장했다.
마침 광화문 근처에 볼일이 있어 길을 나선 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을 걸 각오하고 우정 들렀다. 그 사이에 얼마나 잘 꾸몄는지 궁금하고, 마음에 둔 책도 살 겸 인파 속을 헤적이었다. (참. 나는 교보 회원카드 소지자다.)
이전의 종로쪽 출입구를 없애고 오른편 길가를 넓게 터 새 출입문을 떡하니 세웠다. 이참에 진열방법을 완전 개가(開架)식으로 바꾼 것도 좋았다. 그걸 페이스(Face) 진열이라고 일컫는다든가.
하지만 단일층 매장의 한계는 어쩔수 없구나 싶었다. 실정에 어두운 과객의 무리한 주문이겠지만 이왕이면 도쿄의 기노쿠니야서점처럼 매장을 층층으로 나눌 수는 없었을까. 그들마냥 8층짜리가 어렵다면 층수를 줄여서라도 말이다. 분야별로 입장객을 분산시켜 더좀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노력을, 말 타면 경마 잡히고픈 인심으로 가볍게 억지를 쓴다.
서울이 몰라보게 달라졌다지만 우리에겐 베이징의 류리창(琉璃廠) 흉내 비슷한 거리도 없다. 그게 언제쩍 일이라고, 연암 박지원이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찾아나설 정도로 유구한 지역을 들먹이다니 꿈도 크다 하겠으나 안타깝다. 1천만 인구를 자랑하는 도시에 서로 이마를 맞댄 책방동네 하나가 없다.
있느니 먹자촌 뿐이다. 인사동에서는 골동품 냄새가 빠진지 오래다. 젊은이들의 ‘집성촌’이라할 대학로나 홍대앞 역시 문화보다는 식후경(食後景)을 앞세우는 듯한 느낌이 짙다. 어느덧 음식점 간판 투성이다.
변방이라도 좋으니 고서점이나마 나란히 줄을 섰으면 괜찮겠는데 어림없다. 동떨어진 골목쟁이에 각각 흩어져 기식(氣息)이 엄엄(奄奄) 하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다는 말을 일부러 고색창연한 어투로 깨지락거리자면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어판 『1Q84』(Book3)과 그밖의 문고본 몇 권을 사 들고 밖으로 나온 나는 잠깐 어리둥절했다. 광화문 네거리에 말뚝을 박고 보낸 청춘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울 바닥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대개 상경(上京) 설화의 주인공들이다. 하경(下京)하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고 죽자사자 매달렸다.
일찍이 서울내기들의 ‘시굴학생’ 타박에 겁먹고, 장세정이 노래한 “울어라 은방울아/세종로가 여기다”로 낙후감을 달랬다.
그런 기분의 연장선에서 사투리가 아주 심한 종로구청장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왜냐. 토박이들에게 너무 염치없는 짓이라고 믿은 탓이다. 대권을 넘보는 정치시장(市長)은 모를까 종로는 서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본토박이들의 마지막 거처 아닌가. 웃기는 소리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이윽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을 바라보는 왼쪽 길가로 눈을 돌렸다. 외서(外書) 중심의 <광명서림>이 있던 곳이다. 대학 동기동창인 친구가 국회의원인 사형(舍兄)을 도와 운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물론 흔적조차 없다.
교통신호기가 없을 무렵, 그리고 지하통로가 생기기 전의 광화문 네거리 명물은 한 교통순경의 호각 소리와 수신호였다. 일반 행인보다는 경무대와 중앙청을 오르내리는 까만 관용차 중심의 교통정리를 도맡아 인기가 높았다. 굴러다니는 자동차가 적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이 백 미터 전방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장차관 내지 국회의원들의 차를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눈썰미가 비상했다. 차 안의 고관이 보거나 말거나 즉각 차렷 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착 붙였다. 그바람에 발이 묶인 보행자는 할 수 없이 불평을 구경거리로 바꿔 모두 빙긋 웃었다.
온몸을 하필이면 황금 빛으로 치장한 세종대왕께서는 이처럼 달라진 광화문에 납시어 요즈음의 ‘아륀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나는 교보문고에서 챙기지 못한 책을 마저 구하기 위해 영풍문고 방향으로 느린 걸음발을 놀리면서 지난 세월의 자잘한 광화문 엘레지에 쬐끔 젖었다.
50년대에 벌써 이름 한번 근사했던 세르팡(Serpent)이나 보레로(Bolero) 다방을 되새겼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던 무과수 제과점과 이름을 잊은 장의사 자리를 지나면서 행인들에게 속으로 물었다. “차곡차곡 쌓인 관과 빵의 상시 대면을 그대는 아는가.” 이렇게.
큰 행길을 건너면 아 무교동이다. 동명(洞名) 자체로 한 권의 책이 너끈한 곳이다.
교보문고에서나 영풍문고에서나 일어로 된 문고본을 주로 산다. 예외가 없는 건 아니되 대개 그렇다. 그때그때의 내 동선과 형편에 따라 두 서점의 본점과 강남점 등을 수시로 기웃거리는 것이다. 일반도서는 동네 책가게에 주문하여 일괄 구입한다. 분당으로 집을 옮긴 십여 년전부터 생긴 버릇이다.
광화문까지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왕복 세 시간이므로 KTX 타고 부산 가는 시간보다 길다. 직행버스나 지하철이나 매일반이다. 따분하고 지리한 동안을 차중 독서로 때울밖에 없다. 고개 숙여 노추(老醜)를 가리고 ‘어느새 다 왔네’ 안도하는 재미를 누리기로는 손바닥만한 문고본이 딱이다.
하다가 내릴 곳을 지나거나 앞당기는 일이 어찌 없을라. 있다. 하지만 헐레벌떡 당황하지 않는다. 고령을 무릅쓰고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바람에 저지른 실수를 의뭉스럽게 즐긴다.
동석한 승객의 핸드폰 소음 때문에 정신이 헷갈려 읽은 데를 또 읽다가 책장을 덮는 수도 있지만 전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차 속임을 앞세워 상대편의 장광설(?)을 미리 차단한다든가, 차만 타면 가수(假睡) 상태에 빠지는 이들의 안면 방해가 두려워 으밀아밀 속삭이는 교양시민이 늘었다.
그러는 너는 일본말 찌끄러기로 티를 낼 셈이냐. 어째서 그쪽 것만 탐하느냐 물으면 난감하다. 별다른 뜻이 없는 까닭이다. 소년시절부터 일어교육을 받은 데에다 멍하니 앉아 가는 자신이 바보스러워 맛맛으로 선택했을 따름이다.
지질(紙質) 차이 또한 무시 못한다. 일본책은 모두 누르스름하여 눈이 편하다. 우리 것은 너무너무 새하얗다. 형광등 밑에서는 더구나 반사가 심해 눈이 쉬 피곤하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어떻게 안 될까.
우리나라에서도 한때는 문고본이 참 많았다. 을유문고, 정음문고, 삼성문화문고, 범우문고, 춘추문고, 박영문고 등이 활발히 간행되었는데 이제는 드물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범우문고의 건투가 돋보인다. 지하철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촉망 받던 손 안의 책이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다.
구미의 페이퍼백과 일본의 유명 문고는 기왕에 성가를 누린 일반 도서의 축소판이 대부분이다. 실컷 독서시장을 누빈 책을 싸게 만들어 대중화시킨 것인데, 대를 이어가는 젊은 독자들에게 아주 제격이다.
문고 이야기는 그만하자. 나의 일상적 독서는 어디까지나 집에서 대하는 보통 책에 중점을 둔다. 종이신문의 광고와 서평 등을 참고삼아 고른 책을 달에 서너 권쯤, 가까운 동네 서점을 직접 찾아 주문한다. 급한 것은 전화로 알린다.
아마존이나 알라딘 같은 인터넷서점에 비하면 번거롭다. 애들 참고서 위주로 운영하는 가게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서적은 당장 입수하기 어렵다. 모두 들어왔다는 전화를 기다렸다가 재차 발걸음하는 불편이 따른다. 하지만 버릇이 되면 괜찮다. 교대로 자리를 지키는 주인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산보를 겸해 들고 오는 비닐빽의 묵직한 하중(荷重)이 나쁘지 않다. 같은 값이면 이웃 것을 팔아준다는 따위 알량한 생각도 아주 없지는 않다.
오만 서적이 즐비한 책사에서 맘에 드는 놈을 고르는 재미만은 물론 못하다. 사기로 작정한 책도 책이지만 그밖에 숱한 읽을거리에 홀려 뒤적뒤적 간색(看色)하는 시간이 못지않게 좋은 것이다.
얼마 전에 작고한 일본 작가 이노우에(井上)히사시는 자신을 ‘서치’(書癡)로 공언할 만큼 책에 들렸던 사람이다. 무려 13만 권의 장서를 고스란히 고향(山形縣 米澤)으로 옮겨 도서관을 세우도록한 걸로도 유명했는데, 그는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빼곡한 서점 책을 ‘직업적으로 자기를 유혹하는 여자’로 보았다. (『續 家庭口論』)
“어서 와요. 멋진 양반.”
“나를 사 줘요.”
“나를 당신의 정부(情婦)로 삼으세요. 결코 후회하지 않을 테니.”
“오늘밤 나를 댁의 침상으로 데려가라구요. 내일 아침까지 당신을 재우지 않을 거니까.”
웃자고 의인화한 셈인데, 매일처럼 출입하면서 두 시간을 넘게 서가 앞을 배회하는 것도 그같이 요염한 유인책이 만족스럽기 때문이라고 거듭 익살을 부렸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그토록 인기를 누리는 유일한 장소가 즉 책방이라면서.
희곡과 소설과 방송대본과 에세이집을 끊임없이 펴낸 원천을 짐작하게 만든다. 몇 해 전 서울서 열린 한일작가들의 세미나 자리에서는 뜻밖에 김산(金山)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이르도록 폭 넓은 독서의 어떤 지향이자, 일본 작가로서는 드문 관심사다. 하고 보면 그는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서도 범연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책은 서점에 가서 사는 게 낫다.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기분으로 현장에서 골라야 맛인데, 나는 그 안의 번잡이 싫어 자꾸 게으름을 피운다.
파천황의 온라인 변화 속에서 경륜·원만 따위 노년에 대한 상투적 수식어가 차라리 거추장스런 세상을 산다. 아침에 놀라고 저녁에 기죽기 바쁜 와중이라서 활자책의 선전(善戰)이 참으로 고맙다.
일상의 서술형 정보 획득 수단으로 다시없다. 나를 계속 긴장시키는 지식의 멘토인 까닭에 앞으로도 더욱 친했으면 친했지 정분이 날 리 만무다. 초라한 사고(思考) 역시 거기서 얻은 교양과 보편적 경험의 혼합이다.
큰소리는 첬다마는 편식을 우려한다는 거짓말을 넘어 내가 읽는 책은 무척 잡스럽다. 얼마만큼 난잡하냐 하면 읽던 책에 나오는 특정 인물이나 단어의 원적(原籍)을 더 자세히 검색하다가 미로를 헤매기 일쑤다. 번지수가 전혀 다른 제삼의 서적에 슬그머니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게 오랫동안 거들떠보지 않은 책일 경우엔 더구나 미안하고 안쓰러워 얼김에 딴판을 벌이기 쉽다.
단행본 위주로 나가는 것도 아니다. 사계(斯界)에 공헌한 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을 두고 정성스레 기증지를 우송해 주는 여러 공공기관이나 단체의 기관지 또한 열독(閱讀)의 대상이다. 화제를 제공한 종합월간지는 하물며 그냥 넘기지 못한다. 일독할 내용이 있다 싶으면 일제(日製)도 마다하지 않거니와 올 「문예춘추」(文藝春秋) 신년호에 게재된 「소화(昭和)의 육성(肉聲)60인」이 한 예다.
소화천황 64년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회상한 게 아니다. 기왕에 발표된 유명인들의 다양한 증언을 분야별로 추려 정리한 특집이었다. 개중에 특이한 것으로 「천황폐하 크게 웃다」를 들 수 있다.
때는 1949년 봄. 장소는 궁성 안. 천황이 불문학자 다츠노 유다까(辰野隆), 시인 사토 하치로, 배우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의 ‘어전 방담’을 듣는 자리였다. 하지만 세 사람이 나중에 따로 만나 좌담회 형식으로 밝힌 것은 방담 내용이 아니다. 초점은 담배연기에 묻힌 천황의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객초는 준비돼 있었으나 덴노헤이까가 피우지 않았으므로 자기들도 처음엔 궐련을 입에 물지 않았다. 동석한 세 시종이 시범을 보이듯 먼저 피우는 통에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천황은 두 시간 동안 입심 좋기로 호가 난 세 문화인의 중학교 때 추억 등을 시종 꼿꼿한 자세로 앉아 들으며 자주 ‘핫 핫 핫’ 웃었다. 방담이 끝나 방문을 열었을 때는, 방 안의 자욱한 담배연기가 일시에 구름처럼 퍼져 천황이 그 위를 걷는 모양새였다고 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우리는 아침마다 그가 사는 궁성을 향해 일제히 허리를 굽혔구나. 깊은 땅속에서 울려오는 듯한 무조건 항복 방송의 쇠잔한 ‘교쿠옹’(玉音)과 4년 후의 즐거운 ‘핫 핫 핫’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독서에도 메너리즘이 있을까. 있다고 생각한다. 한동안 손에서 책을 놓으면 어쩐지 불안하고, 의무감에 등떠밀려 책을 펴면 눈이 먼저 알고 맨날 비슷비슷한 것만 앵긴다고 불평이다. 그래서 딱히 독서 축에 끼지도 못할 읽을거리에 한눈을 팔기 쉽다.
이실직고하자면 근력이 달린 탓이다. 때문에 건조한 이론서는 통독하기 어렵거늘 주종목이 대강 나라 안팎의 소설들이어서 그렁저렁 버틴다. 흥부 내외가 시루렁 실근 톱질로 어 여루 박을 타듯, 진양조로 늑장을 부리다가 휘모리장단으로 되우 치는 독법을 구사하여 끝장을 보는 날도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이랄지 그밖의 전문서는 정독하기 힘들지만 취향껏 고르면 된다. 구미에는 안 맞되 쓰는 일에 도움이 될 양이면 정성들여 살핀다. 곁에 두고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한 책마저 없으란 법 없다.
책과 독자는 요컨대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 그러자면 출판 전문가와 눈밝은 독서인이 ‘사전답사’ 끝에 내놓는 감상문을 참작함직하다. 내 경우는 한겨레신문의 주말 독서 페이지에 나오는 소설가 장정일 씨의 연재 리뷰에서 적잖이 도움을 받는다.
최근 출판된『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그의 여덟 번째 『독서일기』(1994년부터 시작한)인데, 초기의 세 권을 열심히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 퍽 반가웠다.
시야가 넓다. 직업작가의 포괄적 안목으로 신간을 설명하되 개성에 넘친 주관을 서슴없이 개입시킨다. 당대의 우리 현실도 짚어주기 때문에 서평을 위한 서평과 다르다. 정확하고 능란한 문장이 뒤를 받쳐 읽을 맛이 난다.
이번 책은 또 자신의 비법(?)마저 밝혀 재밌다.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공개했다.
책 제목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나의 독서 버릇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데, 책을 읽는 도중에 빌려 읽기가 너무 아까운 좋은 책이나, 다 읽고 나서 필히 곁에 두어야 할 책을 뒤늦게 산다. 이런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책 가운데는 읽고 나서 버려지는 것들도 많다. 책을 읽는 방법이 천차만별이듯 버리는 일도 그럴 것인데, 내가 가장 애용하는 방법은 외출을 할 때 버릴 책을 미리 준비했다가 아무 공중 박스의 전화기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대단히 합리적이다. 나도 예전엔 도서관에 개근하다시피 죽치면서 소장 도서를 모조리 읽겠다고 허풍을 떤 적이 있지만 빌릴 생각은 못했다. 그때 내가 살던 고장의 시립도서관에서는 책을 대여해주는 관례가 없었던 탓이겠는데, 아무튼 괜찮은 방법이다. 우선 돈이 덜 들어 좋을 것 같다.
책을 버리는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다. 특히 이사짐을 꾸릴 때마다 골치들을 앓는다.
한데 아무 공중전화 박스에나 슬그머니 놓고 나온다? 곧장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마땅한 임자를 찾아주려는 착상이 남다르다. 책에는 임자가 따로 있는 폭이므로 자신에겐 더 이상 소용이 없을망정 어떤 행인의 눈에는 매우 반가워 냉큼 집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폐기 처분에 따르는 수고를 덜 겸, 일석이조의 수수한 책 보시(布施)가 자연스럽다.
‘보시’라는 표현이 과장되다면 ‘책인심’으로 말을 바꾼들 어떠리. 청소년 시절의 독서는 실상 대부분이 공짜다. 집 안에서 물려받지 않으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빌리는 수가 많다. 나 또한 도서관과 친구와 선배들 사이를 오가며 밤을 도와 죽어라고 팠다. 여간해서 맞돈 내고 살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누구는 책방에서 속독법을 익혔다고 했다. 주인의 기색을 살피고 적당히 엉너리를 처 책방 출입 두세 번에 책 한 권을 떼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보았다.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농담 역시 그런 정황 속에서 나왔을 게다. 훔친 물건이 대수롭지 않은 점도 있지만 소년의 지적 욕구에 대한 사회적 관용의 내림이 크다.
나이 들어 엔간히 책이 쌓이면 이번에는 빌려주는 쪽으로 입장이 바뀐다. 나도 그 축에 낀 경험이 있다.
빌려가는 건 좋은데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돌아다니다 돌아온 책은 모양이 거진 다 엉망이었다. 가령 손창섭 씨의 단편집 『비 오는 날』은 뒤표지가 아예 떨어져 나갔다. 장편소설 『낙서족』은 빌려간 누군가가 망가진 책등을 스카치 테이프로 동이도록 꼴이 숭했다. 그 정도로 독자가 많은 증좌겠으나 일본서 별세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의 작품집들을 다시 들추는 시간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간수를 잘못한 자의 귀책사유 감당은 여하간에.
내가 민국일보에 다닐 무렵은 장편소설 『저마다 가슴 속에』를, 동아일보에 있을 때는 『길』을 연재한 관계로 알게 된 그는 깐깐한만큼 도저하고 도저한만큼 꼼꼼한 사람이었다. 한 회에 일곱 장 반씩, 일주일치 원고를 흰 바느질실로 따로따로 묶어 한꺼번에 보내주었다. 첨삭한 글자 하나 없이 정서하여.
그처럼 똑떨어진 성깔 탓일까. 주변이 너무 맑았다. 간혹 만나는 이로는 곽학송(郭鶴松) 작가가 유일했던 것 같다. 자기 고향(평양)과 가까운 정주 출신인 데에다 『문예』를 통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단한 인연이 겹쳐 교분을 튼 줄 안다.
하다가 돌연히 서울을 떠난다.(73년) 일본인 아내(우에노 지즈코)의 뒤를 이어 말없이 동경으로 갔다.
일본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소설을 썼다. 한국일보에 재일동포의 고단한 삶을 다룬 「유맹」(76년)과, 원나라에 저항하던 고려의 여걸 「봉술랑」(棒術娘)(78년)을 잇따라 연재했다. 두 장편 이전에는 또 이 신문의 자매지 「주간여성」에 가족해체 소설인 「삼부녀」(70년)를 연재한 적이 있다.
해서 마음을 먹었으랴. 확실한 연도는 잘 모르겠고 80년대 중반쯤으로만 기억한다. 손창섭 씨가 작고한지 오래 된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의 묘소를 다녀갔다는 얘기를 누구에게선가 들었다.
신문 연재의 단짝이었던 삽화가(李友慶씨)한테만 미리 기별했다던가. 자기 형세가 더없이 어려울 때 그토록 은고를 입은 분을 잊을 수 없어 가는 길이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왔다 갔다는 게다.
함께 묘소를 찾았지 싶은 삽화가마저 작고한 뒤라서 자세한 사정을 몰라 유감이지만 틀림없다고 믿는다. 오로지 감사의 절을 올리기 위해 먼 길을 나선 의고적(擬古的) 의리의 사나이를 상상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몇 번 한국에 왔었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처가의 나라에 묻힌 한 작가의 책을 매만지는 김에 덧댄 이야기가 좀 두서없지만 책은 필경 사람이다. 반대로 말해도 좋다.
그러자 책을 한 됫박의 쌀과 바꾸던 시절이 떠오른다. 애지중지하던 서적이나 고전 반열에 드는 희귀본 등을 보자기에 싸 고서점 아저씨와 어설픈 흥정을 벌였다. 하다못해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도 사전이랄지 참고서를 팔아 빵을 사 먹고 자장면집에서 모처럼 깐풍기를 시켰다.
책의 위의(威儀)와 현물거래 가치를 지금은 입에 담지 못한다. 자초지종을 따지기 번거롭다. 사는 곳이 한적한 까닭인지 늦은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고물상의 마이크 소리가 오히려 저간의 사정을 간접적으로 정확히 짚어 준다.
“헌 전자제품 삽니다아. 냉장고나 에어컨, 비디오나 레인지 사요오.”
외치고 다니는 품목을 내가 제대로 옮겼는지 모르되 여하튼 책 소리는 없다. 부속품을 빼먹자고 사 가는 전자기기들의 득세와 더불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간에 대충 시선이라도 돌려야 직성이 풀린다. 책광고를 두리번거리던 눈을 들어 빈약한 서가를 문득 훑다가 별스런 백일몽을 날조하기도 한다. 방 안의 책들이 서로서로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한 착각에 부러 빠지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 자꾸 새 식구를 들이는 바람에 죄 없이 퇴출 당할 걸 염려하는 책들의 겁먹은 표정이라니. 연민을 보내는 내 응시가 오히려 민망하다.
아니다. 그토록 의지가 나약한 책이 있는가 하면 끝끝내 당당한 고집불통의 책 또한 많다. 서서 죽을지언정 결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투로 기질이 센 책이 적지 않다.
다만 아쉬울 따름이다. 세상에 나올 때는 저마다 객관적으로 보편 타당한 이유가 있어 기세 등등했으나 이 풍진 세상의 변화에 눌려 본래의 몫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 또한 훊다. 수많은, 또는 이질적인 동료들 사이에 끼어 세월을 죽이는 동안에 겪는 운명의 장난이나 필연성을 어쩌지 못한다.
나는 헌책방에서 산 책의 속표지에 여태껏 새빨간 아무아무의 장서지인(藏書之印)에 미소를 머금고, 다른 고서의 원래 소유자가 찍었을 방점 역시 지우지 않는다. 내 손으로 들어올 때까지 몇 사람이나 거쳤는지 헤아릴 것이 없는 기연을 막연히 상상할 뿐이다.
싯누렇게 바랜, 지질이 아주 형편없는 옛 책의 판권란에 으례 들어있는 ‘우리의 맹세’는 또 무엇인가. 오십년대 사회상을 되짚는 기록의 하나로 짧은 전문을 허실삼아 옮긴다. 당시의 표기법 대로.
<우리의 맹세>
1. 우리는 대한의 아들딸 죽엄으로 나라를 지키자.
1.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을 쳐부수자.
1.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머지않아 음반에도 군가를 몇 곡 씩 넣어야 했다. 훗날의 국민교육헌장과도 연결되는 발상일 법하다.
그나마 주인인 내 눈에 띄어 다행이랴, 얼마 되지 않는 책 중에는 고이 모시기만 했지 한 번도 속을 들여다 보지 못한 것도 필시 있을 테다. 사서 죄를 짓는 심정이다. 더 늦기 전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등을 쓸고 책갈피를 어루만져야겠다.
내일을 여는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