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여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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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특별호(통권 58호)



[선택과 비판]


강남은 꿈 꿀 수 있는가



권채린



1. 2007년에서 2010년으로, 장편소설의 새로운 모럴

한 작가의 진술로부터 시작해 보자. “문예지들이 단편소설을 청탁하니까 소설가들은 단편소설만 쓰는 것이다. (.......) 문학제도가 작가들에게 장편소설을 요구하면 작가들은 장편소설을 쓰게 돼 있다.” 3년여 전 불거졌던 ‘장편 대망론’의 대대적인 논의 한가운데서 작가로서 김연수가 던졌던 이 간단명료한 제언은 마치 주술과 같이 현실화되었다. 각종 문예지들은 장편 연재 지면을 확대하거나 고정화하였고, 고액의 고료를 내건 장편문학상이 생겨났으며, 인터넷 서점과 웹진에서의 온라인 장편 연재는 하나의 시야에 포섭되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다양한 채널로 늘어났다. 작가들의 창작 패턴도 바뀌었다. 단편 위주로 작업했던 작가들-윤성희,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 등-은 최근 첫 장편을 출간하거나 집필 중에 있으며, 장편공모를 통해 문단에 나온 신인들의 활약도 눈에 띤다. 장편소설 시대의 도래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요 몇 년 간의 ‘지각변동’은 무엇을 말하는가.

현재의 시점에서 ‘장편을 청탁하면 장편을 쓸 것’이라는 3년여 전의 제언은 커다란 격절감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단편에서 장편으로의 급작스런 무게 중심의 이동이라는 현상적 측면으로부터 연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장편 지면의 증가를 요구했을 때, 거기에는 단편 중심의 문학제도가 출판시장의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 따른 우려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시장의 논리에서 한국소설이 배제되어 있다는 위축감, 그리하여 한국문학이 더 점유하고 확보해야 할 투명한 영지로서의 시장이란 인식. 즉 시장과 문학의 (실제적이면서 무의식적인) 배타적 관계 설정이야말로 장편 활성화의 ‘선(善)’을 소리 높여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애초에 장편 대망론이 제기된 근간에는 ‘평론가의 개입을 최소화한 작가와 독자대중의 직접 소통’(최재봉)이란 문제의식이 가로놓여 있었고 그것이 결국 시장의 확보라는 절실한 과제를 향하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최근의 장편 붐에서 창작의 열기를 주도하는 것은 오히려 출판시장이다. 작가들에게 장편을 요구하는 ‘문학제도’의 중심은 급격하게 문단으로부터 시장으로 옮겨갔으며, 출판 자본의 제도적 개입 속에서 작가들은 자신들의 소설적 역량을 시험받고 있다. 물론 장편소설은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며 철저히 시장 속에서 유통되는 장르라는 점에서 소설의 시장화는 필연적이다. 더 나아가 소설의 상업화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작가의 입장에선 시장의 입맛과 자신의 소설적 실험의 긴장 사이에서 운신의 폭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이며 출판시장의 입장에서도 소설의 상품화를 측정할 수 있는 매우 과감하고 전면적인 장이 될 수 있다. 또한 평론가와 문단이라는, 일종의 검열 기제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들이 보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서사적 화법을 구사할 여지가 늘어났다는 점 또한 나쁘지 않다. 물론 오프라인의 ‘판매고’와 온라인의 ‘조회수’가 또 다른 검열 기제로 작동한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지만, 그로 인해 장편 창작 풍토가 시장의 입맛에 전적으로 종속될 것이라 여기는 것도 기우이다. 장편소설이란 본래 미학적 완결성보다는 서사의 광범위한 운용을 거점으로 하는 장르이므로, 독자와의 ‘소통’이란 측면에서 시장의 ‘눈’은 다양한 서사적 모색을 추동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장편소설의 활성화가 지닌 긍정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다소 기우뚱한 균형과 불안한 징후를 감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지하듯이 시장의 요구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왜 장편인가’에 대한 문단과 작가 내부의 소통적 대화와 인식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문제적인 작품이 만개했던 70-80년대 장편의 부흥이 당대 사회 ․ 역사적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대응으로서 점화되었던 것과 비교할 때도, 최근의 경향은 시장의 요구 이외의 별다른 내발적(內發的) 이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이전부터 작가들 사이에선 장편을 쓰고자 하는 욕망들이 편재해 있었지만, 그것이 ‘장편이 소설의 본령’이기 때문이라거나 ‘작가적 역량의 시험대’이기 때문이라면 곤란하다. 단편이 현실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창’을 통해서도 충분히 날카로운 통찰을 드러낼 수 있다면, 장편은 ‘바라보는’ 행위와 세계와의 ‘거리’를 통해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세계와의 연속적인 접촉, 접촉을 넘어선 심부(深部)로의 다가섬, 현실과의 마찰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균열과 파괴까지도 모두 장편의 몫이다. 단편이 세계 안에 성채를 만드는 일이라면 장편은 그 성채를 깨부수고 거리의 복판으로 나아가는 작업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실세계와의 접점으로부터 맥락화되는 소설의 자기 정체성을 서사 내부의 ‘물음’과 ‘대답’의 형식으로 포괄할 때 비로소 장편소설은 시장의 요구를 넘어설 서사적 역능(力能)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장편의 향방에 대한 공준화된 인식과 기본적인 틀을 설정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각개약진으로 장편을 창작하고 있는 2000년대의 젊은 작가들에게 동일한 함량과 내용으로 수렴되어질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들에게 있어 ‘현실세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소설적 대응은 이전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의 핵심을 자아의 내적 서사와 치환시키며 자신들의 소설적 공간을 창출해 온 자들이다. 세계 인식의 전체성보다 파편화되고 훼손된 세계의 부분적 감각에 집중했던, 그리하여 시대를 꿰뚫는 통찰보다는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였던 세대에게 장편소설에 대한 원론적 이해와 보편적 정의들-가령, 규모있는 이야기와 당대의 핵심을 건드리는 적실한 문제 제기, 현실에 대한 대결의식 등-을 똑같이 요구할 순 없다. 또한 그것만이 장편소설의 질적 성취와 생산적 미래를 담보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최근 제출된, 세계와 대결하지 않는 2000년대 문학은 바로 그 때문에 장편의 요구 앞에서 진화할 수 없다는 한 평론가의 비관적인 전망은 오늘날 장편이 처한 난경(難境)을 선명히 짚어 주지만, ‘세계와의 대결’이라는 보편적 명제를 시대적 낙차와 세대론적 변주로써 이해하고자 할 때 해소될 수 없는 의문을 남긴다.

이 시대 장편에게 필요한 것은 최대 정의가 아니라 최소 정의일는지 모른다. 장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난망한 질문을 던지기보다, 시대를 호흡하는 문학으로서 장편이 마지막까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문학 주체들이 해야 할 온전한 몫일 수 있다. 그럴 때 변화된 현실에서 오늘날의 장편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솔직한 모색이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은 문학이 놓인 가장 첨예한 현실의 최전선으로부터 포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막연하지만 답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을 수 있다. 시장의 요구에 의해 소환된 장편 소설의 현 지점, 그 불안하고 기우뚱한 지대야말로 오늘날 소설이 처한 가장 ‘핫’한 현실이다. 소설의 욕망과 그것을 제도화하는 자본의 기제와의 긴장감, 그 모종의 분열과 간극이 ‘장편 대망’의 시대를 몸소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 소설가들의 가장 강력한 발화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창작 환경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엠에프(IMF) 이후 진행된 급격한 신자유주의화의 물결 속에서 성장한 2000년대의 작가들에게 자본주의적 현실과 소비적 일상은 일종의 태생적 현실이다. 소비의 일상이 화려하게 펼쳐지지만 한편으론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불안이 어른거리는 지금, 이곳이야말로 장편소설이 태어나는 자리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분열증적 환부이다. 자본과의 대결이 불가능한 지금,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자본과 ‘불편하게’ 동거하는 행위 자체일는지 모른다. 자본주의적 일상과 공모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신을 성찰하는, 이념과 일상의 간극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정직하게 응시하는 행위야말로 이 시대의 장편소설이 당면한 새로운 모럴이다. 위반과 전복의 불온한 상상력, 혹은 환멸과 절망의 포즈를 통해 ‘불편한 간극’을 에둘러 봉합한 것이 2000년대 단편 소설이 보여주었던 한 인상적인 성과였다면, 봉합선을 다시금 열어젖히고 간극에서 아우성치는 파열음으로부터 삶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지금의 장편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물론 장편소설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분명 다르며, 최소 정의의 확인이 장편 소설 논의의 귀착점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지금은 변화의 거센 흐름 속에서 작가들의 야심찬 행보가 막 시작된 시점에 불과하며 아직은 문제적 징후들이 난만한 과도기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작가들의 고투가 현재를 넘어 어떠한 소설적 문턱에 다다를지에 대해 예단하는 대신, 그들이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환기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리고 여기로부터 다시, 시장이란 제도를 넘어설 서사적 역능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자신의 소설적 분투로서 펼쳐보일 수 있을 것이다.

2. 역사에 압착된, 앙상한 욕망들

그러니 젊은 작가군들의 미래에 대해서보다, 누구보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시대의 거센 물살과 변화를 온 몸으로 겪어 낸 한 작가에게 눈을 돌려 볼 필요가 있다. 「객지」 「삼포가는 길」 「한씨연대기」 등의 빼어난 중단편 소설을 남겼지만, 황석영 소설의 본령은 의심할 바 없이 ‘장편’에 있다. 2000년대 이후 󰡔오래된 정원󰡕을 시작으로 󰡔손님󰡕 󰡔심청󰡕 󰡔바리데기󰡕 등의 작품을 통해, 황석영은 누구보다 쉼 없이 장편을 창작해 왔으며 스스로의 문학적 경계를 확장해 왔다. 큰 이야기의 운용과 시대적 통찰력, 새로운 소설 형식의 모색, 그리고 인터넷 연재라는 최근 창작 환경의 수용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의 소설적 이력 안에 한국의 장편이 거쳐왔던 연속과 단절의 감각을 모두 보유한 진기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황석영의 소설은 지금, 여기의 장편소설을 둘러싼 갖가지 특징적 징후를 응축하는 모델이면서, 한국 장편의 현재에 대한 균형적인 이해와 분석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다.

더구나 그가 공지영, 신경숙, 김훈 등과 함께 실제적인 한국 장편 시장을 주도해 온 작가라는 점은, 시장의 거센 개입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시험받고 있는 최근 장편 소설의 향방에 대한 의문을 대답의 형식으로 들려준다. 그 대답이 보편적일 수는 없다 해도, 시장과의 마찰을 견디며 소설이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어디서 존재론적 유효성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참조점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선 무엇보다 황석영이라는 대답이 대중적인 인지도와 대표작가로서의 프리미엄과 같은 외부적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의심할 나위 없이 용인케 하는 서사적 힘과 사유의 파장을 내장한 채 당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황석영의 최근작 󰡔강남몽󰡕은 흥미롭게도 ‘강남 형성사’를 다루고 있다. 하나의 지리적 공간이 무수한 인문학적 담론의 화두로 다루어졌던 데서 알 수 있듯, 강남은 하나의 강력한 현상이고 문화이며 무엇보다 ‘내 안의 욕망’이다.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최전선이자 부동산 불패 신화와 개발성장 신화의 발원지로서의 강남을 향한 뜨거운 시선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다시금 내 안에 굴절되어 들어와 물음을 남긴다. 강남 형성사가 곧 우리 욕망의 기원을 더듬어가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강남몽󰡕은 여전히 황석영이 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현안을 소설화할 줄 아는 감각의 소유자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강남몽󰡕은 다섯 개 장의 유기적인 연결 속에서, 각 장을 주도하는 몇몇 인물 군상들의 인생 유전을 통해 ‘강남 형성사’를 추동하고 있다. 요정과 룸싸롱의 마담을 거쳐 대기업 회장의 후처가 된 복부인 박선녀, 일본군의 밀정과 미군의 정탐 노릇을 하다 굴지의 건설회사를 차린 김진, 부동산 투기와 매매로 부를 축적한 심남수, 조폭 홍양태와 강은촌 등 주요 인물들의 성공신화와 인생역정은 그대로 강남의 신화가 되고 한국 근현대사의 자취가 된다. 역사의 대의와 명분이 아닌 오직 ‘돈’과 ‘생존’의 논리를 추구한 인물들의 평범한 욕망이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와 조우하는 장면을 인화함으로써, 󰡔강남몽󰡕은 역사가 이데올로기의 기록이 아닌 개인들의 물신적 욕망이 만들어 낸 흐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이념과 역사에 대한 전망이 불가능해 진 90년대 이후의 현실 세계에서, 제어할 수 없이 뚜렷하고 유일한 ‘진리’로 부상한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의 거침없는 행보에 대한 소설적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강남 형성사’에 녹여내고, 동시에 ‘강남’이라는 메타포를 일종의 역사적 실체로서 접근하는 󰡔강남몽󰡕의 전체 윤곽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심찬 기획에도 불구하고 󰡔강남몽󰡕을 순순히 우리 시대의 의미있는 문제작으로 끌어안기에 망설이게 되는 것은, 의외로 너무나 단순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소설적 야망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소설이 소설로서 온전히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남몽󰡕은 주지하다시피 팩트(fact)와 소설적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 스스로 언급했듯 ‘팩트’의 비중이 더 높은 일종의 ‘다큐 소설’이다. 그러나 팩트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이 작품의 소설적 함량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팩트에 의존하지만 소설을 소설로서 향유하는 데 전혀 문제되지 않는 무수한 작품들을 이미 만나왔다. 또한 모든 소설은, 그것이 역사소설이던 아니던지, 정도의 차이-비율과 변용의 측면에서-는 있을지언정 팩트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 소설’이라는 말도 작가의 창작 경위와 상황을 설명해 주는 ‘사후적’ 확인 사항이지, 작품의 이해나 판단의 단서가 될 순 없다.

그렇다면 󰡔강남몽󰡕을 편안히 소설로서 읽을 수 없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지적될 수 있지만, 가장 먼저 인물들의 형상화와 운용 방식에서 드러난다. 중심 인물들을 포함해 󰡔강남몽󰡕의 플롯을 엮어내는 무수한 인물들(김창수, 이희철, 박기섭 등)의 다수는 역사 속의 실제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익숙한 누군가를 환기하거나 실제 인물들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자면, 그 사실이 소설을 독해하는 데 방해를 유발하거나 소설적 성과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딱딱한 정보가 실감나는 이야기로 복원되는 광경이야말로 󰡔강남몽󰡕을 읽는 주요한 재미 중 하나이다. 문제는 역사적 연대기 속에 놓인 인물들의 삶이 매우 제한적인 방식으로 가동된다는 데 있다. 작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인물에게서 의지와 감정, 갈등과 고뇌를 비롯한 일상적 삶의 내면 질료들을 삭제한다. “세상살이의 이치”나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가”(79면)라는 간명한 동기에 의해 그들의 삶과 꿈은 간결하게 정리되며, 유장한 인생의 물결은 역사의 연대기 속에 압축적으로 전개된다. 그러한 인물 운용의 방식이 갖는 효과는 비교적 명백하다. 자본가들의 삶은 비루한 욕망의 보고서가 아닌 주관적 가치 판단이 배제된 쿨한 역사가 된다. 자본의 냉정한 생리와 거침없는 행보는 절제된 사실적 긴장감을 유지하며 서사에 속도감을 부여하고, 종국적으로 개발과 속도의 전장으로서의 강남 형성사와 그 파국이라는 인상적 장면을 입체화한다. 그래서 󰡔강남몽󰡕은 악인과 속물들의 투명한 생존기이며 핍진한 분투기로서 완성된다.

그러나 󰡔강남몽󰡕은 사실적인 재현과 서사적 흡인력을 확보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물의 개성적인 질감과 소설적 역능을 희생했다. 󰡔강남몽󰡕의 인물들은 역사의 주요 갈피와 흐름을 실감나게 체현한 개인이 아니라, 역사에 압착된 앙상한 개인이다. 그들은 역사적 격량의 일자(一者)로서 미리 결정화된 역사적 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인물과 함께 서사가 추동되기보다 강남 신화와 그 붕괴라는 예견된 서사 속에 인물이 위치한다. 이는 󰡔강남몽󰡕이 주어진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물들을 서사를 전개시키기 위한 매우 기능화된 단자로서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강남몽󰡕에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지만 욕망의 차별성이 거의 읽히지 않으며 성격의 발전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물론 유일하게 하위 계층을 대변하는 5장의 임정아와 그의 가족들에 대해선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돈’과 ‘생존’의 논리가 인물들을 추동하는 유일한 요인일 수도 없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각 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무늬로서 음각되어 있다. 인생의 사연 속에 숨겨진 그 무늬들이 제대로 음미될 순간을 허용하지 않은 채 서사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강남’이란 역사적 지류들의 연합과 착종에 의해 불거진 문제이기에 앞서, 그 흐름을 만들어낸 개인의 문제이다. 그것은 역사의 체계 안에 수렴되는 ‘우연’이 아니라 의지의 관철이고 욕망의 교착이다. 때문에 소설의 욕망은 역사적 흐름과의 마찰과 이탈에 의해 생겨나는 개성적인 무늬가 되어야 한다. ‘대성 백화점’의 붕괴는 개발 신화의 비극적 파국을 환기함으로써 ‘강남몽’을 떠받치고 있던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하지만, 소설 속에서 정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지점으로 내달려 온 동일한 함량의 욕망들이다. 결국 󰡔강남몽󰡕은 거대한 역사의 지류를 조형화하기 위해 다층적인 욕망, 차이의 욕망이 발산하는 역동적 서사의 세계를 방기한 매우 순응적인 텍스트가 되고 만다.

3. 거대한 밑그림으로서의 소설

소설의 플롯 속에서, 역사적 사실(fact)과 허구(fiction)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독자에게 사전에 인지된 것인지 아닌지의 차이는 있지만, 그 둘은 모두 서사의 격자를 완성해 갈 화소(話素)로서 존재하며 소설 안에 들어 온 순간 역사적 사실도 거대한 허구로서의 소설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 바깥에서도, 역사적 사실은 근본적으론 누군가의 기술을 거쳐 완성된 허구의 체계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역사에서 가져온 사실적 허구와 새롭게 창출된 허구적 사실이 존재할 뿐, 둘 사이의 서사적 ‘위계’는 없다. 그것들이 서로 엮이고 삼투하고 용해되어 구분의 시침선이 지워진 자리에서 비로소 소설적 진경은 발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역사적 기록 자체가 주요한 서사적 근간을 형성하거나 역사적 자의식이 소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작품들도 존재해 왔다. 크게 두 종류로 대별하자면, 역사의 ‘변용’이 목적인 소설과 역사의 ‘빈틈’을 채우려는 소설이다. 전자가 공적 사실로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비틀고 전복함으로써 역사가 하나의 거대한 허구에 다름 아님을 알려준다면, 후자는 역사의 허술한 공백과 비정합적 틈을 허구적으로 메움으로써 역사가 누락한 개인적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나 김영하의 󰡔아랑은 왜󰡕와 같은 대안역사소설이 전자에 속한다면, 김훈의 󰡔칼의 노래󰡕 김별아의 󰡔미실󰡕을 비롯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와 같은 김연수의 최근작들이 후자의 경향에 놓일 것이다. 양상은 다소 상이하지만 이들 경향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 소재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하려는 ‘대결의식’과 역사로써 설명할 수 없는 개별적 삶에 대한 옹호이다. 요컨대 역사 바깥의 삶, 역사 이후의 사건을 상상하는 소설적 ‘이탈’과 ‘재고’를 통해서 소설은 역사적 인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신의 독특한 결을 드러낸다. 이것이 역사와 소설이 관계 맺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강남몽󰡕의 소설적 야망이 지극히 약화된 이유는, 이와는 달리 역사가 소설의 발화점이자 준거점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의 ‘차이’로서 성립하는 허구 혹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역사의 편에서 역사의 골격에 살을 붙이는 해석학적 재구성을 통해 󰡔강남몽󰡕은 완성된다. 이러한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소설의 시점과 화자의 위치를 통해서이다.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이 1995년의 ‘대성 백화점’-명백히 삼풍 백화점을 떠올리는-의 붕괴로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소설은 서두부터 백화점의 붕괴가 일어날 것을 환기하면서 시작한다. “마흔두살의 박선녀는 그날 아침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8면)라는 최초의 문장에서의 ‘그날’이 가리키는 것은 물론 1995년 6월의 어느 날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문장을 진술하는 화자의 위치이다.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요동을 치면서 바”뀔 것임을 예시하는 화자는, 일제 시대로부터 시작해 강남 개발의 드라마틱한 현장과 그것의 파국까지를 모두 지켜본 화자, 즉 삼풍 붕괴 이후의 화자이다. 화자는 인물들의 일상이나 사건의 복판에 내재되어 있지 않고 그들의 삶과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이미 꿰뚫고 있는 ‘미래’에 위치해 있다. 그럼으로써 화자는 󰡔강남몽󰡕 전체에서 초월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인물의 삶과 사건의 갈피갈피를 조망하며 매 순간 해석과 참조를 덧붙인다. 이때 화자는 어떤 존재인가.

박선녀는 공마담과 함께 미용실에 들렀다가 영감네 둘째며느리 생일선물 생각이 나서 명품숍을 들러보기로 했다. 외제 사치품의 수입허가가 나지 않은 때라 거의가 보따리 물건이거나 일본 홍콩을 거쳐온 밀수품이었다. 얼마 전에 정장 한 벌을 산 숍에 가서 공마담은 백만원이 넘는 란제리를 샀고 박선녀는 역시 옷보다는 다른 물건이 좋겠다며 두리번거리는데 주인여자가 다가와서 속삭였다. - 󰡔강남몽󰡕, 19면.

뒷날 그(오일균 소령-인용자)의 선후배들은 그가 양민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품고 있었을지언정 진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그는 처형당하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해방 직후의 이념이란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주의 색깔이 우선이었고 사상적 차이가 뚜렷하지 않다가 분단이 확정되고 전쟁을 치르면서 반공이라는 절대적 가치관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 󰡔강남몽󰡕, 138면.

첫 번째 지문에서 화자는 박선녀의 삶의 행적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녀의 삶이 놓인 상황을 역사적 배치 속에서 재기술한다. 박선녀가 “명품숍을 들러보기로 했다”고 진술한 화자는 바로 이어서 그 당시가 “외제 사치품의 수입허가가 나지 않은 때”라고 참조의 각주를 단다. 첫 번째 문장이 소설적 화자의 진술에 가깝다면 두 번째 문장은 역사적 편집자의 진술에 가깝다. 두 가지 목소리는 섞이어 있지만, 종국적으로 진술의 우위를 점하는 것은 인물들의 삶을 역사적 견지에서 재해석해내는 역사적 편집자로서의 화자이다. 두 번째 지문에서 그것은 한층 선명하게 드러난다. 제주 4.3 항쟁에 동조했던 인물(오일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단지 민족주의자였을 뿐이라 말하는 대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소설적 인물의 내면이 아니라 해석학적 개입으로서의 강열한 역사적 자의식이다. 󰡔강남몽󰡕에는 이러한 ‘역사적 각주’들이 매우 빈번하게 드러나는데, 때론 그 자체로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에 대한 기술이나 김구 · 여운형의 암살과 관련된 미군의 개입설과 같이, 보편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비사’(秘史)를 공식화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에 대한 ‘차이의 역사’이지, 역사에 대한 ‘차이로서의 소설’과는 무관하다.

그리하여 󰡔강남몽󰡕은 소설적 화소와 역사적 화소의 위계적 간극을 통해 추동되는 역사의 소설적 편집에 가깝다. 소설의 서사는 끊임없이 역사적 언술의 체계 속으로 수렴되며, 소설의 시간은 백화점 붕괴 이후의 결정화된 ‘미래’를 고정점으로 하여 역-인과적으로 작동된다. 소설의 앞과 뒤에 배치되어 있는 대성 백화점의 붕괴는 비극적 환몽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닫힌 현실’의 구조를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붕괴’라는 결정화된 역사의 바깥 혹은 그것의 여백에 대한 사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이 소설의 ‘닫힌 서사’를 야기하기도 한다.

역사의 파고를 가로지르는 서사의 모험 속에서 새로운 사유가 움튼다면, 󰡔강남몽󰡕의 이러한 ‘닫힌 서사’가 가져 온 가장 뼈아픈 실패는 바로 새로운 사유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강남’에 대해 이미 제출된 보편적 정언들, 온갖 사회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통찰들을 뛰어넘는 사유의 모험을 과연 󰡔강남몽󰡕 속에서 찾을 수 있는가. 정서적 파장과 성찰의 계기만으로도 단편은 인상적으로 완성될 수 있지만 장편은 그렇지 못하다. 강남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블랙홀을 ‘새롭게’ 환기하는 힘을 통해서만 󰡔강남몽󰡕은 자신의 서사적 모험을 성실히 완수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황석영의 󰡔강남몽󰡕은 하나의 거대한 ‘밑그림’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강남을 형성한 다양한 역사의 지류들의 종횡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권력과 자본의 공모와 결탁, 탐욕과 부패의 카르텔을 입체적으로 조감한 것이 󰡔강남몽󰡕이 위치한 소설적 문턱이라면, 진짜 소설적 모험은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4. ‘얼룩’과 ‘흔적’의 역능을 위하여

소설 전체를 통해 󰡔강남몽󰡕은 몇 군데서 닫힌 서사를 뚫고 나올 수 있는 소설적 역능, 혹은 거대한 밑그림으로부터 진전한 서사적 ‘얼룩’을 희미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모두 대성 백화점의 ‘붕괴’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흥미롭다.

가장 선명히 잡히는 것은 먼저, 임정아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에서이다. 무수한 인물 군상 중 유일하게 삶의 결을 달리하는 인물은 임정아와 그녀의 가족이다. 그들은 강남 신화의 연대기 안에 존재하지만 그 연대기가 망각한 소외된 하층부이다. 백화점 붕괴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조우하지 못했을 임정아와 박선녀는, 붕괴의 ‘수평적’ 현장에서 약간의 소통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금세 단절된다. “그래 그거 내가 다 해줄 수 있어”라는 박선녀의 ‘거짓 환대’에 대해 임정아는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씀 다신 하지 마세요.”(338면)라고 일갈한다. 이는 자본의 욕망에 수동적으로 귀속되길 거부하는 결연한 저항이자 자본의 음험한 실체를 타자화하는 성찰적 시선으로서, 󰡔강남몽󰡕의 비극적 묵시록이 숨겨 둔 윤리적 전언의 소설적 발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붕괴 이후 강남이 더욱 강력하게 자신의 꿈을 현실화시키는 지금의 시점에서, 임정아의 발언은 더 이상의 비판적 파장을 선사하지 못한 채 변화없는 세상 속에서 또 다시 각자의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하층민의 삶을 재확인시킨다.

임정아의 경우가 직접적인 소설적 발언의 형식으로 현재적 지층에의 미미한 파열을 던져준다면, 김진과 심남수의 경우는 ‘과거’와의 무의지적 대면 속에서 견고한 일상에 도사린 균열과 불안을 환기시킨다.

그맘때에 어쩐지 김진은 알지 못할 외로움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어느 날은 김창수가 나타나서 누군가를 체포하러 가자고 성화였고 느닷없이 눈보라치는 만주 벌판을 헤매고 다니는 꿈도 꾸었다. 중국어로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소스라쳐 깨어나기도 하였다. - 󰡔강남몽󰡕, 190면

십수일이 지나서 마지막 생존자인 점원 소녀가 구조되는 장면을 보면서 그(심남수-인용자)는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얼핏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국에서 혼자 살 때 어쩌다 꿈속에서 보던 영상이었다. 느릿느릿 슬로우모션으로 베란다에서 잠옷 바람의 여자가 떨어진다. 하도 느려서 흰 옷자락은 펄럭이지도 않고 천천히 물결치다 정지된 빨래처럼 보인다. 순간적으로 돌린 그녀의 얼굴 정면이 멈춰 있다. 그녀는 웃는 것인지 입을 조금 벌리고 있다. - 󰡔강남몽󰡕, 242면.

역사적 격자 속에서 간결하게 묘사되던 인물들은 단 한번, 비로소 자신들의 ‘내면’의 결을 실감나게 드러낸다. 백화점 붕괴의 현장에서 그들은 옛 기억-만주에서의 밀정 생활이나 과거 동거한 애인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것은 강남 개발의 속도전 속에서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채 묻혀버린 ‘과거’의 잔영들-자신의 비루한 과거, 그리고 과거의 타자들이다. 김진의 ‘꿈’이나 심남수의 ‘영상’은 그들의 화려한 성공이 지나온 세월을 맹목적인 이전투구에 헌납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을,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을 담보로 이루어졌음을,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이 반역사적 혹은 비윤리적으로 탕진되었음을 누설한다. 이는 김진과 심남수로 대표되는 한국의 모든 신흥 부르주아들이 지니고 있는 모종의 은폐된 무의식이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 자본의 형성사가 애도해야 하는 하나의 수직적 지층을 보여준다.

이렇듯 견고한 세계의 파열 지점에서 억압되었던 것은 귀환하고, 망각되었던 타자들은 도래한다. 󰡔강남몽󰡕이 보여준 이 장면들은 공통적으로 역사 재현의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서사적 얼룩과 흔적을 내포한다. 그것은 비의미적 공백이요 잉여이지만, 뚜렷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것만이 의미의 질서를 교란하고 파괴할 수 있다는 역설적 진리를 증명한다. 󰡔강남몽󰡕이 거대한 밑그림 혹은 역사의 알리바이로서 머물지 않으려면, 이러한 얼룩들의 경련과 외침으로부터 서사의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강남의 개발성장의 논리는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강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 귀착되지 않는 무수한 이탈의 선들을 실험하고 또 웅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비로소 질문은 가능할 것이다. 강남은 꿈 꿀 수 있는가. 그리고 소설은 꿈 꿀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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