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향연(香煙)

작가는 모름지기 평생을 두고 꼭 쓰고 싶은 작품이 있다. 나에게 『약속』은 그런 작품이다. 나는 고향 구미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집안이 기울어져 큰고모 댁에서 1년 남짓 지냈다. 어느 겨울 깊은 밤 고종형한테 앞집 가축병원 조수 김준기 아저씨의 인생역정을 가슴 조이며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나는 그때 그 이야기를 나중에 소설로 써야겠다고 마음속에 새겨 뒀다. 그때가 1950년대 말이었으니까 그새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 뒤 대학 재학시절 조동탁(趙東卓, 조지훈) 교수님은‘ 작문’ 시간에 이따금 자작시를 낭독해 주셨다. 나는 그 가운데 당신이 한국전쟁 종군문인으로 포화(砲火) 속에서 쓴 시집『역사 앞에서』의 「절망의 일기」 「다부원에서」 「너는 지금 38선을 넘고 있다」 등의 작품을 낭독해 주셨던 게 아직도 감명 깊게 남아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작품들을 대하면 당시 지훈 선생의 그 굵직한 옥음과 처절했던 전투 현장의 생동감이 물씬 그려진다. 그리하여 그 시들은 이 소설 『약속』의 창작배경과 영감이 되었음은 무론이다. 또 소설가 정한숙 교수님은‘ 창작연습’ 시간에 틈틈이 제자들을 담금질하셨다.

“한국인은 지난 6·25전쟁으로 엄청난 수난을 겪었지만, 한국 작가에게는 큰 축복이다. 분단에다 골육상쟁의 전쟁, 이보다 더 좋은 작품 제재가 어디 있느냐? 너희들 가운데 한국전쟁을 깊이 공부하고 대작을 쓰라.”

나는 1969년 7월부터 1971년 6월까지 학군단(ROTC) 장교로 전방 보병 소대장 근무를 했다. 나와 소대원 총구가 휴전선 너머 동족을 겨눌 때는 단장의 아픔이었다. 군복무 중 대남·대북방송을 들으며, 매주 한 번씩 수색작전 때 대남 및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대북 삐라를 포대에 수거하면서 왜 동족끼리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하는가에 대해서도 몹시 분개했다. 그때가 40여 년 전인데도 여태 남북관계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채 통일의 길은 더욱 아득히 멀기만 하다.

1997년 9월, 나는 정한숙 교수님의 이승에서 마지막 유택 가는 길을 운구(運柩)하면서 관 속의 고인에게 약속했다.

“선생님, 제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겠습니다.”

“그래, 박도! 내 말을 기억해 줘 고맙다. 바둑판(원고지)을 메우는 게 고역이지만 재미도 쏠쏠하지. 작가는 작품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한 거야.”

나는 그날 관 속의 스승님이 벌떡 일어나 내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나는 2005년 남북작가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때 방북하여 북녘동포들의 손을 잡고 서로 이야기를 해보니까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분단의 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한반도를 에워싼 강대국들과 남과 북의 지도층, 일부 기득권자만이 자기들 지위나 부(富)를 잃지 않으려고 분단의 벽을 더욱 공고히 쌓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이 소설 『약속』을 쓰고자 국내외에서 수년간 자료를 모으고, 농익은 작품을 쓰고자 오랜 인고(忍苦)의 숙성기간을 가졌다. 그런 뒤 2010년 10월에 기필하여 2014년 11월에 마무리했다. 꼬박 4년 남짓 집필한 셈이다. 이 작품을 쓰거나 다시 가다듬는 동안 숱한 기쁨과 그 몇 배의 아픔을 맛보았다. 나는 여러분의 도움으로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작품을 썼다.

사람이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이 작품에서 준기와 순희, 그리고 준기와 어머니의 약속은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전장(戰場)에서도 지켜졌다. 일찍이 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는 그런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소설로 그려 보고 싶었다. 그 소망도 이 작품에 오롯이 담

았다. 무엇보다 10대 소년이 나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약속을 늘 빚으로 남겨 두다가 일흔의 나이에 이르러 실천했기에 더욱 기쁘다.

삼가 이 작품을 조국통일 제단에 바친다. 이 작품이 한 올 향연(香煙)으로 한국전쟁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을 조상(弔喪)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아직도 분단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엽고 불쌍한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의 눈물을 닦는 동시에 그분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작품 『약속』이 한 줄기 시냇물로 부디 통일의 큰 강으로 흘러가기를 ….

2015년 1월 5일

원주 치악산 아래‘ 박도 글방’에서

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