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 책소개

요즘은 거꾸로 나이를 먹는 파도가 반갑고/ 밀려왔다가 금방 다시 밀려가서 /모래 위의 흔적을 지우는 것들의 단호함이 부럽다/ 동쪽 해가 하늘을 비껴 아름다울 때 내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와/ 자주 겹쳐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분명 아침은 아침인데,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학교 갔다 돌아오는 고3 아들을 보니/ 내 아침은 참으로 고장 난 아침이다
‑「고장 난 아침」부분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소외된 공간과 작은 존재에 대해 탐색해 왔던 박남희 시인이 세 번째 시집 <고장 난 아침>(도서출판 애지)을 냈다. 이번 시집은 새로운 시간에 대한 통정을 보여주는 시적 정황이 강하다. 자연과 보편적인 정서를 구체적이고 새로운 감각으로 드러내거나 허공 속에서 온몸으로 말을 하려는 것, 즉 스스로가 경전인 시간과 공간을 그려보고 싶은 욕망이 이곳저곳에서 꿈틀거린다.

이재훈 시인은 해설에서 “시인의 시선이 가닿는 공간과 사물들은 조용히 수런거리다, 스스로의 존재를 되묻기도 하며, 때론 생(生)과 멸(滅)의 고단함에 슬쩍 눈을 감기도 한다. “고장 난 아침”은 이상한 고요함으로 더 웅숭깊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것들은 삶의 본질적인 ‘슬픔 한 그릇’을 버무려내면서 탄생하곤 한다. “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것은/무수한 터널을 뚫으며 어두워지는 것들”(｢터널들｣)이고, “부드러움을 잃는다는 것이 사실은 통증이”(｢통증은 허공으로부터 온다｣)며, “멀어지는 것을 끌어당기다 보면 어느새 둥근 사랑이 된다”(｢이별의 속도｣)고 교감하고 있다.

“나는 시 쓰기를 어떤 대상과의 교감과 불화의 끝없는 변주로 이해하고 있다. 시인이 된 것도 어쩌면 세상의 끝없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그러므로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내 시에게 화려한 관을 씌우는 것이 아니라 내 시를 혹독한 유목의 들판으로 내 모는 일이다.”
‑ 시인의 산문 ｢노마드, 혹은 교감과 불화를 위한 시｣에서

시인의 말과 같이 그는 여전히 존재의 본질을 해명해 줄 수 있는 우주적 근거를 찾아 유랑 중이다.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아픔과 상처는 소통을 여는 숙주이다. 따라서 그의 슬픔과 눈물은 고요하고 희망적이다. “제 몸의 무수한 화살 자국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 필경에는 지평선 위에 물을 세우는 사람, 그가 박남희 시인이다.”라고 헌사하고 있는 강인한 시인의 말이 쉽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와 시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 책 속에서

요즘에는
아파트 딱지 한 장 얻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한때는 내 호주머니 속에 딱지가 그득했다
그때는 딱지를 접으면
5.16 구테타도, 삼선 개헌도 쉽게 접혔다
딱지를 접어서 한방 내리치면
무소불위의 독재정권도 쉽게 뒤집혔다
내 손에 넘어간 딱지를 펴보면
딱지 속에는 비밀이 없었다
딱지는 종이의 두께와 크기가 관건이라는 것을
꼬맹이들은 누구나 잘 알았다
나는 내 손에 쉽게 넘어간 독재권력과
영화포스터의 누드를 겹쳐서
더욱 두꺼운 딱지를 만들었다
튼튼한 딱지 제국을 건설했다
나는 겁 없는 갑부였다
세상의 온갖 비리와 소문이 딱지로 접혀서
내 바지 속에서 두둑했다
‑ ｢딱지｣ 전문

￭추천글

허공은 아픔과 상처를 감추고 있는 숙주, 꽃은 바람의 언어로 말하며 허공을 피워낸다. 허공의 통증을 기억하며 시인은 어둠의 터널 속에서 동트는 고장 난 아침을 본다. 아침에 떨어진 꽃을 저녁에 줍는다 했던가. 이제 시인은 아침에 넘긴 책장 부근에서 서쪽 하늘을 본다.(중략)
시의 위의를 끝까지 지켜내며, 시인의 자긍심을 되짚어 본다는 것. 그러면서도 시인의 시계바늘은 기품 있고 의미 있는 눈금을 가리킨다. 마릴린먼로와 미키마우스와 수퍼맨을 한통속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그릇. 외곽을 생각하면 점점 중심이 가려운 사람, 제 몸의 무수한 화살 자국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 필경에는 지평선 위에 물을 세우는 사람, 그가 박남희 시인이다.
‑ 강인한 (시인)

￭ 시인소개

경기 고양에서 출생했으며, 숭실대 국문과 및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가 있으며, 평론집으로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 현재《시산맥》주간,《창작 21》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