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책 소개>

송문헌 시인의 신작시집 [그리운 것은 눈 속에 있다]가 지난 2010년 10월 20일 시문학사에서 발간되었다.
시인은 1992년 천평시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으며 다섯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70여곡의 가곡을 작사 음반으로 내어 방송되고 있다.
시집에 수록된 일련의 작품들 속에 투사된 송문헌은 겨울의 시인이며 야행성의 시인으로 드러난다. 또한 과거 지향적이며 식물적 감성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과거지향성은 설화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지나간 사랑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과거지향성을 설화적 상상력으로 묶어 생각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시집을 통해 엿보인 시인의 이러한 성향들, 곧 식물적 감성과 설화적 상상력이 앞으로 보다 더 인생을 관조하고 사물을 궁구하면서 깊이 있는 좋은 작품들을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임보 시인의 해석 중에서)

<추천의 말>

송문헌 시인의 시에서는 바람이 가는 소리가 보이고 솔향이 들린다. 아직도 날랜 다람쥐처럼 산에만 가면 펄펄 나는 젊은이 못지않은 힘과 열정이 그의 시에서 개암처럼 익고 있다. 꾀꼬리 노랗게 울 때 황홀하게 날리는 송홧가루! 그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의 아호 ‘阿星’처럼 시인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어린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꽃과 별까지도 시로 보여 주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 아성 阿城에서 별을 바라보던 그의 꿈이 지금은 시라는 별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그 별이 또 다른 시의 씨앗인 ‘詩앗’ 또는 ‘詩알’이 되어 그의 가슴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더욱 더 탱글탱글하고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될 것으로 믿는다. - 洪海里(시인)

<시집 해설>

식물적 감성과 설화적 상상력
임보(시인)

송문헌 시인과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우리시회>에 들어온 뒤부터이니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를 만나면 부담이 없다. 우선 나와 엇비슷한 키여서 주눅이 들지 않아도 되고 또한 성품이 소탈해서 대하기가 편하다. 그러나 체구가 작다고 해서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불의를 못 보는 불 같은 성깔이 있고, 일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대단하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젊지 않은 나이로 백두대간을 종주한 사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강한 의지의 사나이인가 짐작할 수 있다. 요즈음 시를 쓰는 일에도 열정적이다.

그 동안 송문헌 시인은 『눈이 내리면 외포리에 가고 싶다』(1996)를 위시해서 『아라리는 아직도 이 거리에 있다』(2003),『그물에 걸린 바다』(2005),『바람의 칸타타』(2008) 등 네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러니『그리운 것은 눈 속에 있다』는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 된다. 『바람의 칸타타』(2008) 이후 채 2년이 못된 기간에 쓴 작품들이니 그가 근래 시에 쏟는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가늠케 한다.
수록된 70여 편의 작품들을 소재별로 구분해 본다면 대체로 자연, 사회, 사물, 인물 등의 네 파트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자연에 관한 작품들은 산과 바다를 찾아 노래한 것들이고, 둘째, 사회에 관심을 보인 작품들은 시대적 아픔이나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것들이다. 셋째, 사물을 다룬 작품들은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특히 꽃들로 국한된다. 그리고 인물인 경우는 이미 떠나간 사랑에 대한 연민의 정을 노래한 것들이다.

1. 자연의 겨울 그리고 밤

송문헌 시인은 '산의 사나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의 매주 젊은이들과 함께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는 산꾼이다. 아마 머지않아 산에 관한 작품들만으로도 한 권의 시집이 묶여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어디가 꽃길이고 어디가 낙엽자리인가
바스락 우두둑 바람에 골절되는 가랑잎들
고요의 뼈를 들추는 경계를 지운 산
나를 불러들이고 허둥지둥 지나온 길
돌아가는 길 또한 오리무중

누가 누구의 길을 끝까지 동행하고
누가 누구의 삶을 대신할 수 있는가
네가 내게 마음이 없으면 오지 않을 터
내가 네게 길이 없으면 가지 못할

눈을 뜨면 어느새 산빛 풀빛 본연의 모습
전광석화 번쩍 오가는 시간의 화살도 잠시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네, 그렇게 낡아 사라지네

사람들아, 참선 중인 저 산 고요 깨우지 마라
――「동안거에 들다」전문

사람들은 왜 산을 찾는가? 건강을 위해 운동 삼아 오르는 사람도 있고, 수려한 자연의 품에 안겨 장쾌한 기분을 맛보기 위해 찾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예로부터 어진 이들이 산을 좋아한 것은 산이 지닌 큰 덕을 배우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산은 뭇 생명들을 품어 기르는 거대한 품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을 드러냄이 없다. 과묵한 자세로 천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의연하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삭풍에 떨고 있는 겨울산은 삭막하고 허전하다. 곱게 피어났던 봄꽃의 자취도 찾을 길이 없고 화려하게 물들었던 가을의 단풍잎들도 다 사라지고 산길은 칙칙한 낙엽에 묻혀 있다. 왔던 길도 가야 할 길도 낙엽의 더미에 묻혀 흔적을 잃고 말았다. 낙엽으로 지워진 산길에서 화자는 잠시 방황하며 자신의 인생길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한 깨달음에 이른다. '누가 누구의 길을 끝까지 동행하고/ 누가 누구의 삶을 대신할 수 있는가' 외로운 산행처럼 인생의 길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기 혼자서 가야만 하는 적막한 길임을 깨닫는다.
「겨울산2」「낯선 시간 속으로」「새벽 포구 사람들」「사량도 지리망산을 오르며」「페르세우스좌 가는 길」「빙벽」등 산행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특이한 것은 시간적 배경이 '겨울'이거나 '밤'이 선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송문헌 시인이 겨울과 밤을 지향하는 성향은 바다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누구의 한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가

만나고 헤어지는
일체의 관계들이 정지된 채
어둠 속 텅 빈 바다는 어느
시간의 변방에 앉아 웅얼웅얼

먼 먼 뱃길 항로를 밝혀 들고
유리(遊離)의 초승달이 저 홀로 쓸쓸히
마라도 밤바다에 빈 길을 내고 있네
――「초승달 바다에」전문

송문헌 시인은 연전에 마라도의 한 사찰에 들어 일개여개월 동안 독거하며 집필에 몰두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아마도 그때의 소작으로 보인다. 일체의 활동이 정지된 한밤중 어둠에 잠긴 공허한 바다를 보며 화자는 혼자 웅얼거리고 있다. 하늘에는 외로운 초승달이 광막한 바다를 항해하는 조각배처럼 떠가고 있다. 마치 자신의 외로운 인생 항로를 보는 것 같다고 노래한다.
「만재도 가마우지 선창」「적막한 포구」「검은 시간의 바다」「길은 언제나 바다에서 시작된다」등 바다를 읊은 다른 작품들의 시간적 배경도 밤이거나 일몰의 시간이다.
산과 바다를 노래한 작품들에서뿐만 아니라 '겨울'과 '밤'을 지향하는 경향은 여타의 작품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천」「겨울밤이면」「세모」「하현달」 그리고 눈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품들 「세한도」「세상의 모든 구분과 경계를 지우다」「어둠을 쌓는 눈발나비」「또다른 고향」「그리운 것은 눈 속에 있다」등이 그렇다.
송문헌 시인에게는 겨울이라는 계절과 밤이라는 시간이 생리적으로 잘 맞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봄의 계절에서 느끼는 화려함이나 눈부신 햇살이 빚어낸 현란함이 없이 구도자적인 근검 소박함을 지녔다. 이러한 성향은 격정의 젊은 날을 넘어 이제 이순(耳順)에 들어선 그의 연치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2. 역사적 비극의 식물적 재인식

송문헌 시인의 현실에 대한 감각은 거시적인 편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개인적이고 시사적인 문제에 즉흥적인 반응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보인 것들은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적 비극들에 대한 재인식이다. 일제 강점기의 치욕적인 수난, 동족상잔의 6·25전란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에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수난들이 식물적 이미지를 통해 시인에게 재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흑룡강성 목단강 물소리는 뼈아프게 흘렀으리라
칼바람이 쪽방 판자 틈으로 파고드는 그 겨울

남양군도로 대만으로 만주로, 남경 상해 심양 장춘으로
다시 흑룡강성 목단강에 이르기까지 열일고여덟 조센삐
내 누이들은, 희디 흰 찔레꽃 누이들은
상해사변에서 일본 태평양전쟁까지 처녀공출당했던

누이들은 일주일여를 나가사키에서 후쿠호카에서 수없이
짐승들에게 겁탈당하고 나서야
――「찔레꽃 누이」부분

우리의 국토를 유린하고 나아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겁탈하여 전쟁터에 보내 병사들의 성의 노리갯감으로 삼았던 일이다. 이 작품은 소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청춘을 유린당한 조선 소녀들의 비극성을 일깨우고 있다. 그 누이들의 이미지를 '찔레꽃'이라는 하얀 토속적인 야생화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개망초와 가마솥이 있는 풍경」에서는 한여름 들녘에 피어나는 개망초꽃을 보면서 '피어 망할 꽃, 왜풀떼기꽃'이라고 하며 일제를 회고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개망초가 일제를 환기하는 매체의 꽃으로 등장한다.

동족상잔의 혈투의 상흔이런가
한여름 뙤약볕에 피어난 패랭이꽃은

이고지고 그해 여름 온 동네 사람들 줄줄이
방천둑을 따라 피난길을 재촉하던 개울가
고무신 바닥 뜨겁게 달구던 자갈밭에도
패랭이꽃 하늘하늘 온몸을 흔들며 피어났었지
――「패랭이꽃 피면」부분

6·25 전란을 겪으면서 피난을 가던 때의 정황을 회고한 작품이다. 지금도 길가에 피어 있는 패랭이꽃을 보면 유년의 피난길에서 보았던 패랭이꽃과 더불어 전쟁의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6·25 전란과 패랭이꽃의 이미지 결합은 「한여름 패랭이꽃은 다시 피어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역사적 인식의 매개체가 된 것은 꽃이다. 송문헌 시인은 동물보다는 식물에 민감한 감성을 타고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이다.

3. 꽃과 설화적 상상력

동백꽃을 노래한 「여심화」를 위시해서 꽃을 소재로한 다수의 작품들이 설화를 근거로 하고 있다.

생각이 난 듯 다시 눈발이 흩날린다
이월 오동도 어깨 시린 언덕 너머
바닷길을 싣고 출렁이는 뱃머리에

날이날마다 뱃길만 바라보던
너는 푸르고 시린 이파리 뼈마디마디
더는 가다릴 수 없다 네 오래된 기다림
꽃잎으로 피워내느냐

낯선 지상에 온몸을 내 던지는 네
희디흰 죽창 절개 눈밭을 붉게
물들이는구나 너 동백꽃 여심화야
――「여심화―동백꽃」전문

이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주(註)가 달려 있다.

옛날 오동도에 고기집이 부부가 살았다. 남편이 바다로 나간 사이 도둑이 들어 예쁜 어부의 아내에게 달려들자 정신없이 바다를 향해 달렸으나 남편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중략)-- 묘지에서 해마다 동백나무가 자라나 꽃을 피웠다. 그 후 오동나무 대신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절개를 지키는 듯 눈 속에 피어났다. 통째로 떨어지는 이 꽃을 여심화(女心花)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바람꽃을 노래한「제피로스, 산정에 부는 바람이여」나 달맞이꽃을 노래한 「한여름 밤 소나타」는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찔레꽃의 「서러워, 새벽별처럼 서러워」, 능소화의 「능소화 넋꽃이여」, 상사화의 「홀로 피고 함께 지다」등은 동양적인 전설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그 밖의 승무화의 「달밤에 법문을 듣다」나 자귀나무의 「자귀나무 한 살이」나 자미화의 「자미화 절집에 든 까닭은」등은 민간 설화가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꽃을 노래한 일련의 작품들은 신화나 전설 등 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배경 설화들을 위 「여심화」의 경우처럼 작품의 말미에 주(註)의 형식으로 달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식물적 감성은 설화적 상상력과 어울려 꽃시 연작을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4. 식물로 환기되는 추억의 인물들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절실한 것이 식욕이요, 그 다음이 이성에 대한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연정은 그것이 비록 플라토닉한 것일지라도 이성에 대한 욕망에 근거한다. 그런데 송문헌 시인의 사랑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적인 것이다. 즉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문제가 된다. 그 그리움을 환기시키는 것 역시 식물성이다.

그녀는 늘
꽃내가 났다
한적한 곳 아무렇게나 피어나는 개망초
풀꽃 향내가 묻어났다

지천으로 피던 들꽃들
시들어 가던 그해 여름, 그녀는
시름시름 개망초꽃을 따라 떠나갔고

잡초 우거진 빈 마당
올해도 개망초꽃만 가득 피어났을까
그 꽃길 따라 순임이도 다시 돌아왔을까
서둘러 길을 떠나야겠다
――「개망초꽃 따라」전문

그녀에게서는 개망초 풀꽃 향내가 났다.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던 꽃길을 따라 떠나갔다. 그래서 개망초가 피어나는 계절이면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뿐만 아니라 유년의 순임이도 돌아올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눈을 감고 오감을 열어 놓는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결에 살가운 소리 살그락살그락 풀잎 나뭇잎들 힘이 넘쳐 힘에 겨워 어화둥둥, 딱새 산솔새 동박새 노랑때까치 직박구리, 솰솰솰솰 그녀를 만나면 물소리 그 숲으로 가리
――「그녀를 만나면 그 숲으로 가리라」부분

산의 계곡을 오르면서 바람결에 푸나무의 잎들이 살그락대는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가 또한 그녀를 환기시킨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면 신선한 이 숲으로 오겠다고 다짐한다.

5. 마무리

시집 『그리운 것은 눈 속에 있다』에 수록된 일련의 작품들 속에 투사된 송문헌은 겨울의 시인이며 야행성의 시인으로 드러난다. 또한 과거 지향적이며 식물적 감성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과거지향성은 설화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지나간 사랑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과거지향성을 설화적 상상력으로 묶어 생각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겨울이나 밤은 활동이 정지된 시간이다. 그러나 욕망을 가라앉히고 관조에 이르기 적절한 시간이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가까이 하게 되고 지나간 과거를 회고하게도 된다. 이러한 성향은 송문헌 시인의 나이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인생의 나이 이순이면 겨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활동은 줄지만 사색적인 삶을 살게 된다. 세상을 깊이 성찰하고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도 된다.
식물에 대한 그의 친근한 감성은 멀리는 농경문화적 혈통과 가까이는 전원에서 성장한 유년의 체험에 의해 그렇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이고, 격정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다. 역시 사색적인 성향과 잘 어울린다.
이 시집을 통해 엿보인 송문헌 시인의 이러한 성향들――곧 식물적 감성과 설화적 상상력이 앞으로 보다 더 인생을 관조하고 사물을 궁구하면서 깊이 있는 좋은 작품들을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