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식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단절]
(실천문학사, 2005년 6월 25일)

고증식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단절》이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2000년 《환한 저녁》 출간 이후 5년만에 나온 이 시집에는 70여 편의 울림 깊은 시들이 담겨 있다. 첫 시집에서 그는 주변의 일상을 담백한 언어를 매개로 객관적으로 풍경화하고 있다는 평을 받은 바 있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이런 특유의 창작방법론이 더욱 섬세하고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시의 행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작고 여린 것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지닌 결 고운 시인의 면모를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먼저 따듯한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를 만날 수 있는데, 화자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서 있는 이웃들의 모습은 고달픈 삶을 살아가지만, 생의 활력을 잃지 않는 서민들의 얼굴 그대로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때 전 연장 가방을 부려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허름한 중년들(「참 따뜻한」), 철철 넘치는 술잔으로 사람살이의 인정을 권하는 일흔의 고향 누님(「약술 한 잔」), 이사 떠나는 이웃을 눈물 글썽이며 잘 살라고 축원해 주는 앞집 할머니(「이웃」). 이들 속에서 따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듬어내고 있다는 게 이 시집의 첫 번째 미덕이라 하겠다.

또한 이번 시집에서는 문명이나 자본의 급속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엿보인다. 매일 아침 비데에 앉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볼일을 보는 현대인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지금의 이 문명은 퇴로가 막혀버렸다고 비판한다(「늪」). 시인이란 자신의 의지로 불편함과 어려움을 선택하는 사람들일까? 화자의 발걸음은 열무, 쑥갓, 무, 배추가 자라고 있는 밭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남새들과 술잔 돌리며 지르박을 추고(「불어라 늦바람」), 여리고 하찮은메뚜기, 방아깨비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꿈꾼다(「벌레가 먹고 내가 먹고」). 화자는 이렇듯 자연 혹은 우주와의 온전한 합일을 지향하는 삶이 자신이 진정으로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시집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훨씬 깊고 그윽해져 때론 서늘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풍장된 새를 응시하며 죽음과 입 맞추고 싶어하고(「소멸」), 양지바른 곳의 무덤을 지켜보며 해묵은 영혼들과 교감하는 화자의 모습은 욕심을 비우고 한없이 투명해지려는 시인의 얼굴과 겹쳐진다. 시인은 나무의 마음이 되어 베어낸 가지에 더 단단한 새잎이 돋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독자들로 하여금 시집의 표제가 『단절』인 이유를 짐작케도 하며, ꡐ단절ꡑ 이후 고증식 시인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고증식 1959년 강원도 횡성 출생. 1994년 <한민족문학>4집에 '너희들의 교과서'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환한 저녁]이 있다. 경남작가회의 부회장, 밀양문학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밀양 밀성여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책 속에서


단절

갯바위에 앉아
하염없는 햇살 받는다
집 떠나온 지 며칠
전화라도 할까 했으나
저만치 던져버린다
전화기의 파장이
이 맑은 햇살들을
토막내 버리면 어쩌나


::시인의 말

십 년 넘도록 문학판을 기웃거렸으나 곳간에 남은 건 쭉정이들뿐. 여전히 시는 멀고, 가야 할 길엔 안개 자욱하다. 그동안 날려보낸, 미처 날개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새끼들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쯤에서 또 오래 묵혀둔 삶의 한 토막을 아프게 내려놓아야겠다. 베어낸 가지에 새잎 돋아 좀더 단단해진 무릎 꿇어 그 노래를 받아 적을 수 있을 때까지.

버리고 잘라내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우랴만, 단절의 아픔으로 더 실한 열매를 매다는 나무의 마음을 믿는다. - 고증식


::추천글

고증식은 성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도 않고 거친 소리로 달려들지도 않는다. 자기만의 삶의 진실을 보고 있다는 허풍스러운 몸짓도 없다. 따듯한 눈으로 차분하게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곰곰이 그것을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의 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은 작지가 않다. 공허하게 머릿속에서 만들어 짜 맞춘 시가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체득된 시이기 때문이리라. 말이나 표현이 쉽고 평이하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다 아는 내용 같으면서도 문득 신선하게 다가오는 대목도 주목할 일이다. - 신경림(시인)

시집을 더할수록 깊어지는 시인이 있다. 그렇고 그런 옛것이 아니라 새롭고 그윽해지는 맛. 병든 아버지를 겨울 언 땅에 묻고서야 비로소 나는 밀양에 가보았다. 밀양 박가, 당신이 살아서 한 번은 꼭 뿌리를 더듬어보고 싶으셨던 곳. 거기 고증식이 산다. 인연이었는가. 증식이 태어난 곳은 내 아버지가 뼈를 묻은 강원도 횡성이다. 세월이 흐르듯 시인들의 시도 강물을 따라 잦아들고 넓어지며 굽이굽이 깊어지기도 한다. 경계와 경계를 배회하며 안주해버리기도 하고 지나온 길을 내리쳐 단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단절이 옛길의 걸음 없이 이뤄질 수 있을까. 고증식의 시가 그렇다. 울림이 깊어 도저해지는 강물처럼 그는 분명 단절을 건너온 것이다. 시집 [단절]이 내 베갯머리맡에 오래 누워 있으리라. - 박남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