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현실과 삶의 실감을 곡진하게 기록한, 박해석 시인의 [하늘은 저쪽]
(실천문학, 2005년 5월 10일)
1995년 시집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로 당시 시문학상 최고액인 2천만 원 고료 ‘국민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늦깎이(45세) 데뷔를 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박해석 시인의 신작 시집이 출간되었다. 등단 이듬해 『견딜 수 없는 날들』을 출간한 이후 9년 만에 펴내는 세번째 시집이다.
이전 시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적 음역을 넓혀가면서 자신의 시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이번 시집 역시 리얼리즘에 충실한 생활 시편으로서,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뇌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세상을 바라보는 녹록치 않은 시선에 더하여 감정을 적절히 절제하는 힘과 언어를 다루는 능숙한 솜씨가 돋보이는 그의 시는 신산한 삶의 기록이자, 구체적이고 생생한 생활 경험에서 길어올린 삶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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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석
1950년 전북 전주 출생. 1995년 제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받으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견딜 수 없는 날들], [하늘은 저쪽]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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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모란행
종점 수서역에서 서울지하철 버리고
국철로 갈아타려고 걸어가는 데 십수년이 걸렸다
성남 모란에서 만나자는 친구의 전화 그 전화
받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솥밥 먹으로 구두 한 켤레로 꿈을 꾸던 곳
뒤축이 다 닳도록 뿔뿔거리며 서울로 몸 팔러 다니던 길
그 길 아래 길 뚫려 그 길 머리에 이고
전동차 맨 꽁무니 칸 올라타니 오후 두 점 반인데도
꾸역꾸역한 인총, 벌써부터 숨이 가빠온다
출입문짝에 등을 기대고 두리번거리니
입성들은 밝아지고 머리털 입술꼬리도 부드러워졌지만
누구도 안중에 없다는 저 무심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구나
정해진 시간표에 목이 매여 쉽게 떠나지 않는 철머구리차
열 몇 정거장 가까운 길인데도 나는 얼마나 멀리 바라보았는가
가닥가닥 누더기 길 마음의 고뿔 안고 콜록거리며
새벽으로 나갔다가 밤늦게 넘던 수진고개
그 고개 그 자리에 말없이 누워 있으련만
제 속살 헐어 평평한 노루목 놓아 나를 끌고 가겠다고 오라고 어서 오라고 부르는 소리
구르는 바퀴자락에 깔리며 시난고난 묻혀갈 때
모란시장 어느 어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
우리 막걸리 마시던 난전 이 겨울에도 터를 잡고 있을까
모가지마다 줄줄이 사슬에 엮여 발버둥치던 개 떼들
그 사이로 으르렁거리며 하루해 날품들을 팔며 짖어대던 곳
귀 멍멍 이빨 아드득 허파꽈리에 독한 담뱃진 뽀글거릴 때
두 집 건너 한 집마다 연탄가스 마시고 팔다리 뻣뻣해올 때
거푸집 수세미 머리통들 김칫국믈 들고 달려오던 그 골목
아직 거기 있을까 거기 있어 인면수심 얼굴에 철망 덧쓰고
헐떡거리며 산 나그네 오랜만에 발 내딛는 것 받아들여줄까
술 한잔 건네며 곱창 심줄 한번 펴보게 그냥 놔줄까
마음 마냥 바쁘게 더워와도 느릿느릿 속이 타는 모란행
::추천글
박해석의 시는 너무 비극적이어서 역설로밖에 말할 수 없는 시간으로부터 시작한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진퇴유곡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고단한 목숨들에 대한 눈물겨운 긍정이 있고, 삶의 비루함, 실직의 막막함 속에서 더는 작아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정신의 긴장이 있으며, 사막 같은 세상을 건너가게 하는 물 한 모금 같은 위로가 있다. - 도종환 (시인)
경험에 충실한 시인인 박해석에게 시의 일차적인 과제는 당대의 현실과 삶의 실감(實感)을 곡진하게 기록하는 데 있다. 생업의 고통과 비감(悲感)에서 우러난 진솔한 울림으로 가득한 그의 시는 항의와 비탄의 화법, 쓰디쓴 유머와 희화화의 방식으로 현실의 부정적인 세태를 비판한다. 경험의 진정성과 그것을 끝까지 자기 것으로 살아내려는 치열성은 박해석 시의 뼈대이자 귀중한 자신을 이룬다. - 김수이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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