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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겨울
김진희
겨울이 시작되자 나는 일본 작가의 소설에 깊이 빠져
현실을 읽지 못하고 휘청댔다 텔레비전을 켜면
허옇게 눈이 내리고 눈 속에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일 년을 냉동고에
들어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시신은 다시
냉동고 보다 더 꽁꽁 얼어붙은 세상으로 나왔다
겨울의 막다른 길목에서 나는 여러 명에게
구타당하는 한 아이를 발견하고 겁에 질려
모자를 눌러썼다 그건 비겁하고 나약한 현실의 내 모습이었다 그 날 이후,
때리는 자의 오만함과 맞는 자의 고통이 고스란히
내게 와 들러붙었다 나는 다시 휘청이며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활자 위로
허옇게 눈이 내렸다 겨울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오래 연락이 끊겼던 대학선배가 나타났다 문학은
유한계급의 헛된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래된
책처럼 그는 말했다 그 날은 겨울비가 내렸다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그는 별안간 책장을 덮고
젖은 책처럼 얼룩지며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그는 적어도 덤으로 무리하게 부록을 끼워 파는 책이 아니었다
뜨거운 전기장판 위 팔꿈치를 괴고 엎드려
책을 읽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글쓰는 데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힘없고 약한 이를 위해 소리 지르지도 글을 쓰지도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나날들이 띵동 띵동,
고장난 초인종처럼 매일 나를 방문했다
냉동고 밖에서도 사람들이 허옇게 얼어붙는 겨울이
끝이 없는 책처럼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 김진희 : 1969년 부산 출생. 2006년 경남작가 신인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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