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작가회의 사무국장을 지낸 배재경입니다.
아래글은 요산 김정한 선생님 문학제 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우리 작가회의가 서울은 물론 지회로 갈수록 정체성이 망각된 채 골수 보수마저 회원으로 가입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있습니다.
이는 본회차원의 정체성 확립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보니다.
그저 글께나 쓰는 작가들이 모여있으니 가입하려는(본회, 지회 포함) 환경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작가회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부산의 사회운동가인 배다지 선생의 글이 적합하여 올려봅니다.

  


                민족, 과연 진부한 개념인가?
                  = <요산 김정한 문학제>에 띄우는 민족론의 항변 =
                                              
                                         배 다지(산수 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장)
                                                                        
      
1. 민족문학작가회의, 함부로 붙여진 이름 아니다.

  이 글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단체명(團體名)에서 ‘민족’이란 용어를 삭제한 데에 대한 항변이다. 내가 문학은 물론이요, 정치학이나 사학(史學)의 영역에서 나름의 조예가 있는 학자는 아니다. 단지 민주민족운동의 실천 종사자로 살아왔고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가려는 사람으로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족이란 말을 단체명에서 삭제한 것이 마치 민족사(民族史)의 창건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려는 사람에게, 크게는 민족을 향해 총질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항변하는 것이다.    

  문병란 시인은 5.18민주민족항쟁 19주년 기념 헌시(獻詩), “찔레꽃 만가(輓歌)”에서 “식민지 100년의 설음을 모아”란 시구(詩句)를 쓴 적이 있다. 또 성공회대학교 김민웅 교수는 그의 저서 『보이지 않는 식민지』의 머리말에서, 이 땅의 지식인들이 “강대한 자들에게 비굴할지라도 머리를 굽혀야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진 노예들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로써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민족적 존엄성을 짓밟혀도 제대로 항거조차 못하는 초라한 위인들이 되어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요산 김정한은 달랐다. 죽는 날까지 문학으로서, 혹은  실천적 민족문학인으로 꺾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민족문학이란 반드시 민주적이고 민족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우며 그것의 발전을 위하여 항쟁하는 문학을 일컬어 말하는 것이라고 요산의 동료교수이자 민족혁명 동지인 산수 이종률 교수는 설파했다.(이종률, 민족혁명론 147쪽-과학과 역사의 전진을 막으려는 잘 못된 민족의 해석-)이런 면에서 볼 때, 요산 김정한 선생은 한사람의 민족문학 자가가로서는 열렬한(熱烈漢)이었다.
  엄혹한 자유당 치하에서도 민족혁명 소 단체였던 “민족문화협회”가 위촉하는 강연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민족통일 지향 청년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이 모시는 자리였던 “민족통일 대강연회”와 “민족문화인의 밤” 행사 등에서 빠짐없이 민족통일과 민족문화를 강론하셨다. 요산 선생은 작가로서 문학작품 활동 외에도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싸움의 현장에는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민족문학 작가라고 명명된 것은 그의 작품의 내용이 규정하는 것이지만, 요산은 민족문학 작가라는 범주에 머물지 않았다. 문학에서의 항쟁성을 실천적으로 민족문제 해결의 장에서도 불태웠다. 바로 혁명아(革命兒)이기도 했다. 이렇게 요산 선생과 같이 민족적 역사 과제를 외면하지 않는 작가들이 결속해 있던 단체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아니었던가?  민족문학작가회의, 그 이름, 또한 함부로 붙여진 것이겠는가?

2. 작가의 모랄과 책임 방기, 민족사에 오점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민족문학이란, ‘민족이라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형성된 사회족((社會族)이듯이’, 민족문학이라고 할 때 그 민족 개념 또한 역사적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사 체재(民族史 體裁)의 통일 국가가 형성되지 못한 우리의 처지에서는, 우리말 우리글로 쓴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민족문학인 것은 아니다. 또한 민족사 체재 국가 (근대 통일 민족국가)가 완성된 민족의 문학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외세의 제국주의적 압제를 이겨내고 민족사 체재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거나 또는 그것과 유관한 우리의 문학을 민족문학이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문학작가회의 성원들이 자기 정체성, 자기모랄 그리고 그 사회적 책임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규정한 것은 위대한 결정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겨레의 사정은 끝없이 민족문학이 요구되는 역사적 사회적 여건 속에 있으며, 우리겨레가 안고 있는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민족문학의 책무 또한 막중하다고 스스로 선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리가 이러한데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단체명에서 민족이란 용어를 삭제한 것이 과연 바람직 한 일이었던가?
*속되게 표현해서 모든 문학인으로 하여금 이광수의 후예가 되라는 말인가?
*제국의 노예로서 예속적 안정과 망국적 안일을 구가하란 말인가?
*민주와 자주, 평화와 통일을 향한 고난이 그렇게도 두렵단 말인가?
*저항하지않는 지성인은 고여 있는 물처럼 썩어 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범람하는 퇴폐적 식민지 매스미디어에 묻혀 조국과 민족을 외면해도 괜찮단 말인가?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결국, 일부 분석과 비판을 외면하며 저항을 두려워하는 이광수 최남선 유진오 백철 정비석 등등 그 후예들의 괴변에 마취되어 우리문학사와 민족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민족이란 것이 영속하는 존재도 아니다. 언젠가 민족사 체제가 완성되어 새로운 고차원적 역사단계에서 지구족(地球族)이란 용어가 보편화 되면, 민족은 거추장스러운 개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요원한 미래의 일이고, 민족이 존재하고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지역 국가에 있어서의 민족개념이란 각개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역사문제의 전반에 걸친 상위개념, 전략개념인 것이다. 더구나 민족이란 사회족(社會族)인 것이기 때문에 그 용어의 삭제여부는 사회과학적 토구의 과정도 한번쯤은 거쳐야 할 일이거늘, 그런 절차도  거치지 않고 1년 유예 끝에 냉큼 삭제하고 말았다. 마치 21세기 세계문학의 조류에 발을 맞춘다는 선구자적 큰 뜻이라도 있는 듯이... .
 나는 문학도가 아니지만 정치학도로서의 좁은 소견으로는 “오늘 날 현대 세계문학이라고 해서 민족문학을 배재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더욱 현대와 민족은 상용할 수 없는 개념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문학도들이야 말로 이 민족론을 반드시 익히고 가야 할 개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학인들은 모두 민족문학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를 자임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족문제가 당면한 역사적 문제로 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이 민족론(民族論)은 학문의 세계에서  가장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 할 분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소외되고 있는 우리의 학문적 풍토가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민족적 과제가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 번도 민족이론의 과학적 정립을 위한 토구(討究)의 장(場 )이 열린 사실이 없다. 그야말로 민족론 부재(不在)의 학문풍토 즉 식민지 학문풍토가 우리의 학문풍토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서의 민족 개념이 가장 천덕꾸러기로 버려진 채 외면되고 있는 풍토에서 그래도 민족이란 용어를 앞에 단 민족문학 작가회의 성원이라는데 자부를 가져 왔던 문인들이, 민족문학인들이 왜? 식민지 엘리트로 길들여져 진 사회과학 첨병들의 민족망각, 민족외면, 민족비하 내지 민족말살 놀음에 놀아나고 있는가?

3. 민족론 부재의 학문 풍토 때문, 결코 진부한 개념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보아왔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이 민족이란 용어를 가장 두려워한다. 사회주의론 보다 이 민족론을 더 두려워한다. 식민지에 있어서의 사회주의란 제국주의를 물리친 다음 단계의 건설론 이지만, 민족론이란 건설에 앞선 당면 투쟁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론 토구의 장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금단의 열매와 같은 것이다. 민족문학인들은 지난 시기 각각의 사회운동 영역에서 이 민족이란 용어를 스스로 구사하지 않은 것이 탄압 때문이지 시대착오적 진부한 개념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 줄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의  민족론 탄압 내지 말살을 위한 작용은 참으로 막심한 것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론이 아닌 다른 이념을  표방하고 나섰다면 죽임을 당했겠는가?
  문학인들 스스로가 어처구니없는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민족문학 작가회의가 민족이란 말을 삭제하기로 결정하던 날, 누가 쾌재를 부르고 축배를 들었을 것 같은가? 노예적 안정과 안일을 추구하던 자들과 그 상전들은 저항하는 문인들의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이며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지하에 계시는 요산 김정한 선생은 피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그래도 많은 양심 문인들이 땅을 치며 통탄하고 있을 터이다.

  문병란 시인이 ‘식민지 100년의 설음을 모아’라고  읊었듯이, 식민지 100년의 역사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우리의 뇌리에는 알게 모르게 식민지 근성이 배어있다.  지난날  국방장관을 지냈다는 자들, 군 장성으로서 별을 달았다는 자들이 2012년에 군작전통제권 이양을 연기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안달한 일들이 모두 식민지 노예근성의 표출이듯이 작전통제권 이양을 연기해야 한다고 안달한 것이나 단체명에서 민족이란 용어를 삭제해야 한다고 괴변을 토해내고 그것을 받아들인 작가들의 행동거지도 식미지 근성의 발로라는 점에는 동일한 것이 아닌가?
  
   민족이란 사회족(社會族)의 표현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개념도 사회과학적 해명을 통해서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한 번도 이 민족의 개념을 놓고 공적인 토구의 장을 열어본 역사사실이 없다. 따라서 제한된 지면에서 민족의 개념을 놓고 장황한 토론을 벌일 수는 없다.  그러나 민족해방, 민족독립, 민족통일, 민족문화, 민족자주, 민족경제, 민족언론 등 우리가 이루어야 할 역사적 과제 앞에 민족이란 용어를 붙여 써온 것이 우리사회 역사의 관행이다. 민족문학 작가회의도 같은 맥락이다.

   민족문학 작가들이 작가회의를 구성할 때 작가회의 앞에 민족이란 용어를 부친 것은 소속작가들이 민족문제를 자기문제로 규정한다는  모랄의 표현이며 동시에 스스로 이 사회에 대한 민족문학 작가로서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라고 규정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어째서 민족문학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저버리고 작가로서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모랄을 망각한단 말인가? 책임을 저버리고  모랄을 망각한다는 것은 바로 민족문제 해결의 의지 그 자체가 진부한 잠꼬대로 규정한다는 뜻이다,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니면 우리민족은 자주적 통일국가건설 따위는 아예 없었던 일로 생각하며. 자자손손 강대국에 빌붙어 길들여진 노예적 삶 속에서 안일을 도모함이 옳은 문학도의 처세란  말인가?        민족론 실천의 노병 배다지가 어찌 항변하지 않겠는가?

민족문학 작가 요산 김정한 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2011년 14회 요산문학제에 띄우는 항변을 마치며 김민웅교수의 보이지 않는 식민지 머리말에 있는 글귀를 적어 헌사에 대신 한다

“어찌 우리민족이 이토록 심약하고 용기가 없으며 함께 마음과 힘을 모아 나서기를 꺼려하게 되었는가? 어찌 우리 민족이 이토록 약자에 대한 인정(人情)을 잃고 서로에게 그악해졌으며, 당찬 꿈이 소멸된 백성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다시 꿈을 품고 새롭게 일어서야 한다. 다시 마음의 힘을 강하게 길러 너와 내가 함께 제대로 사는 사회를 건설하는 의욕을 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