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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비였다. 습하고 끈적끈적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장마라는 낱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기라는 낱말이 주는 이국적인 인상도 퍽 좋지만 오랜 세월 우리 곁에 머무른 시절들은 우기가 아니라 장마였다. 그래서 이 낱말은 마치 내 혀 아래 거주한 듯한 기분까지 든다. 더욱이 어떤 문학적 승화의 과정까지 거쳤다면 말해 무엇하랴. 나는 장마가 찾아오면 버릇처럼 윤흥길의 소설 <장마>를 떠올린다. 소설에는 두 명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빨치산을 아들로 둔 어머니와 국방군을 아들로 둔 어머니. 그리고 이 두 명의 어머니는 사돈 사이다. 그들은 여태 증오를 몰랐으나 한국전쟁이라는 기이하고 낯선 상황 속에서 그것과 조우한다. 그들은 서로를 차갑게 얽어맸던 증오라는 사슬을 전통적이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벗겨낸다. 그들은 전쟁이라는 괴물과 싸우면서도 용케 괴물이 되지 않은 본보기다.
하지만 장마가 해마다 되풀이되듯 새로운 증오가 해마다 우리를 찾아온다. 과거의 증오를 닮은 것도 있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증오도 있다. 그 가운데 블랙리스트는 낯익고 오래된 증오다. 나와 다른 사람은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강박관념이 만들어 낸 목록들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상대적인 면이 있어서 우리는 각자 한 걸음씩 물러났을 뿐이지만 실제 멀어진 거리는 두 걸음이게 마련이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괴물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아주 멀리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면 더는 그이가 사람인지 괴물인지 판단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블랙리스트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는 순간 그 뒷면에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다.
장맛비 그치고 구름 갠 하늘은 눈부시도록 맑다. 그 하늘을 부끄럽지 않게 올려다 볼 수 있으려면 우선은 장마를 견뎌야 한다. 두 어머니가 아무런 희생 없이 화해를 했던 게 아닌 것처럼.
<2010.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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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in 미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