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정제윤｜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더 이상 엄마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우리 미용실에도 오지 마시구요. 나는 새 아빠 따위 필요...이까짓 거 써서 뭐해, 말하지도 못하는걸. 쓰던 연습장을 덮고 방을 나가 미용실로 통하는 문을 슬쩍 열어본다. 나는 또 아저씨에게 가라는 소리 한번 못했다. 바보같이.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 남자친구라고 하기보다 정식 부부로 보는 것이 더 나을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아저씨와 있을 때면 나랑 있을 때 보다 더 행복한 듯 하다. 내 앞에서는 힘들다, 어쩐다 온갖 투정과 짜증은 다 부리면서 그 아저씨 앞에서는 잘도 웃어댄다. 나는 사막이고 어저씨는 파라다이스다. 그 아저씨 앞에서는 모자를 푹 눌러쓴다. 눈썹까지 닿을 정도로 눌러쓰고 아저씨를 만난다. 엄마는 얼굴의 온 미간을 찌푸리며 모자를 벗으라고 경고하지만 나는 벗지 않는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헛기침을 해댄다. 나는 헛기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심 통쾌해진다. 엄마는 아빠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 약속은 엄마가 죽을 때까지 지켜내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일학년 . 친구들과 다 친해지기도 전인 오월 달에 아빠는 죽었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응급차에 실려서 병원으로 가던 중 아빠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이라도 하듯 전날 술에 취해 들어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쓰러질듯이 소파에 누운 아빠는 쓴 술 냄새를 풍기며 소리를 질러댔다 .
“우리 사모님 김명자 ! 당신은 갑부 만나 잘 살고 우리 재롱이 재윤이는 소설과 되야 재? ”
낄낄낄 웃어대던 아빠는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잠이 들었다 .
“이 양반 또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내가 왜 당신 두고 시집을 가 . 누구한테 욕 얻어먹으려고......”
아주 다소곳한 목소리로 자신은 시집안가겠다고 했던 잃어버린 엄마의 약속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내가 아저씨 앞에서 모자를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저씨를 보지 않기 위해서가 큰 이유이지만 이 모자는 아빠가 엄마와 나에게 선물해 준 유일한 물건이기 때문이다.이 모자를 보면 엄마가 아빠를 생각해 뜨금하지 않을까, 일찍 돌려보내지 않을까 해서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미 엄마는 그 모자마저 어딘가에 버려두었나보다. 새 아빠가 생긴다는 것이 나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엄마는 아빠의 선물마저 잊고 억지로 나에게 아빠의 자리를 비워내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안다. 그 아저씨가 오십삼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부자이기 때문에 더 아저씨에게 끌린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는 돈이 없는 가난뱅이니까.
엄마가 다른 누군가와 몸을 섞는다는 것은 나에게불륜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며 새아빠라고 앉아있는 사람과 밥을 같이 먹으면 그 사람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닿는 곳은 차마 숟가락이 가지 않아 밥과 국만 먹게 될 것이다 . 아 그리고 호적상에 <동거인>이 되어 버리고 성도 틀린 아빠를 갖게 되기에 새 아빠라는 존재가 싫다.
나에게 정찬영이란 사람. 십 육년밖에 같이 살지 못하고 선물로 모자 하나 밖에 해주지 못한 매정한 우리 아빠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아빠는 정찬영이란 한 사람으로 하려 한다. 돈도 쥐꼬리만큼 벌고, 술, 담배하면 딴 사람 저리 가라할 정도였지만 누구보다 식구를 위해 일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알았었다. 돈 많다고 의시대고 슬그머니 엄마 몸을 이리저리 훑는 저 아저씨와는 다르기 때문에. 엄마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고 싶지만 계속 말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의 어두워질 표정이, 나에게 돌아올 차가운 그 눈빛이 나를 계속 망설이게 한다 속으로는 몇 천 번이나 더 외쳤건만.
더 이상 엄마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우리 미용실에도 오지 마시구요. 나는 새아빠 따위 필요 없어요. 엄마는 뭐가 좋다고 히히 웃어? 나가요! 당장! 일단 여기까지 써둔다 나머지는 그때 감정,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엄마는 아저씨에 대해 말을 꺼내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엄마는 은근히 내가 받아주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럴수록 엄마와 내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아저씨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엄마를 사랑하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보지만 이내 고개를 흔든다.
“아저씨 왔다 . 나와 바 .”
대답은 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거울 앞에서 모자를 쓴다. 아빠 오늘은 꼭 말해야 해요. 아빠도 그것을 원하죠? 눈썹 밑까지 챙을 내려 눌러 쓴다. 더 이상 ......아빠 이러면 안되요.
아빠 모자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어요 .엄마는 정말 기억력 너무 안 좋아요 뛰쳐나갈 용기라도 주세요. 아빠 끝내 나는 오늘도 말을 하지 못하고 모자만 쓴 채 아저씨 앞에 앉아 버린다. 바보같이.





할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


이지현｜광영여자고등학교 2학년



"아이 할아버지 저 학원가야 된단 말이에요“
"학원이 뭐시여 여기 이렇게흰 구석이 많구마이 저기 거시기 더 뽑아 보란게 .“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다 뽑아요 머리에 구멍 나겠네.”
할아버지는 자꾸만 정수리 부근을 가리키며 더 뽑아 보라고만 하셨다. 흰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머리 가득 빼곡히 자라 어떻게 뽑아 낼 수도 없는 상황 이었다. 가을에 잘 익은 벼들이 논에 가지런히 들어선 것처럼 새하얗게 잘 익은 머리카락들이 내 손길을 따라 결 데로 춤추고 있었다.
“다 늙어빠진 양반이 뭘그리 젊은 사람 흉내 내려고만 하는가 .”
노인정에서 가장 입 걸기로 소문난 욕쟁이 할아버지가 우리 집 대문을 삐걱 열며 코를 후비적거리더니 저만치 떨여저선 하는 소리였다.
“이 노인네가 주책 맞은 소리 말어. 나라고 뭐 평생 검버섯핀 할아범이었는 줄 알어?”
“흥 쪽발이들 이래저래 설치던 개 쪽만한 시대에 나이만 젊어가지고는 제 대로 젊은것들 거시기 달린 행세나 하고 다녔간디? 총알받이 하나 끝내 주게 하다 뒤져버리거나 저어어기 탄관에 가서............”
“아 이런 썩을 양반이 애 듣는데 입방정 자꾸 떨치어?”
할아버지는 결국 단상 옆에 세워둔 장기판을 마당에다 GPD가레 치셨다 . 콧구멍 사이로 삐져나온 코털 한 가닥이 분에 차올라 가늘게 떨렸다 .
“진월이 어서 아스께끼 하나 사 묵고 오라 ”
서랍장에서 오십 원짜리 동전 두 개 를 꺼내시더니 내 주머니 안에 급하게 찔러 넣어 버리곤 엉덩이를 밀치며 자꾸 나가라는 손짓만 하셨다. 학원가방을 들고 떠넘겨 지듯 대문 밖으로 나와 버린 나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동전세계를 가만히 쥐었다.
땀찬 동전의 촉감이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이걸로 뭘 사먹으란 얘기야 피..”
늦게 만치 학원에서 돌아온 나는 칠이 벗겨진 녹색 대문 사이로 무언가 껴있는 것을 보았다. 까치발을 들어 뭔가 하고 보니 붉은 글씨로 ,<염색 삼천 원 파마 오천원 김디스코 헤어샾> 이라고 적힌 빳빳한 광고지 한 장이 대문틈 사이에 접혀있는 것이었다 삐걱 문을 열자 툭하고 전단지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다녀왔습니다 ”
“오야 진월이 아스께끼 맛나게 묵었냐”
“예”
웃으며 대답한 내 모습과는 달리 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동전세계가 작은 소리로 짤랑 거렸다.
“근데 손에 쥔 것은 편지다냐 .”
“아니요 그냥 광고지에요. ”
“그게 뭔데 함보자 .”
할아버지의 단상위에 전단지를 올려놓고 뭐에 쓰려나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김 디스코 ?”
“미용실 이름이에요 .”
“미용실 ? 느그 애미 머리 볶으러 가는데가 ?”
“염색도 삼천원에 해주나봐요 .”
할아버지는 쓸모없다 하시더니 콧방귀를 픽 뀌셨다. 그리고 그 쓸모없는 광고지를 주머니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었다. 고개를 갸우뚱 하는 날더러는 빨리 방으로 들어가라고만 하셨다 .
다음날 학교를 나서려고 보니 항상 마루위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노인정가셨나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저만치 골목 어귀에서 욕쟁이 할아버지가 어슬렁 어슬렁 뒷짐을 지고 걸어오셨다. 저번에 한번 저 할아버지의 안경을 발로 밟아 깨드렸다가 썩을 년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 터라 선뜻 고개를 숙이기가 여간 무섭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
“참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영감이지 머.......”
“네 ?”
“뭐 별 수 있는 감 .이제 젊은 것들 한다는 성형수술도 하겠구먼 주책 맞은 영감탱이 .”
중얼거리기에는 너무 선명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것이 꼭 나들어 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가끔 항구다사이 항구다사이 소리도 한다는 영감이 이제 와서 뭔지랄이래 ”
긴가 민가 했던 내 마음은 욕쟁이 할아버지의 항구다사이로 인해 확실해졌다. 뒤를 졸졸 따라오며 연신 우리 할아버지의 험담을 중얼중얼 내뱉는 것이 미워서 책가방 끈을 불끈 쥐고 알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수업시간 내내 할아버지얼굴이 아른거려 받아쓰기고 만들기고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일 이었다 새로 받은 쓰기 교과서를 살펴보며 마루바닥에 누웠는데 노인정에서 오신 할아버지가 술 냄새를 풍기면서 옆에 앉으셨다. 막걸리를 한 잔 하 신 것 같았다. “철수야 안녕이 다 뭐시여 . 무조건 항구다사이여 항구다사이.”
할아버지는 거친 나무 껍데기 같은 손바닥을 연신 비벼대며 항구다사이라고 중얼거리셨다.
초점 잃은 탁한 눈동자와 알 수 없는 말이 머릿속에 깊이 들어박혀 무서움에 아랫입술이 달달 떨렸다 나중에 엄마가 밥 좀 달라는 소리라고 뜻을 알려줘서 겨우 알았지만 왜 밥 달란 소리를 저런 말로 대신 하는지 알 수 가 없었다 눈동자는 계속 쓰기 책 첫 페이지의 철수야 안녕으로만 가있었다 .
수업이 다 끝나고 스피커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빨리 할아버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교문 쪽으로 뛰었다. 자꾸 주책 맞은 영감이라는 욕쟁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에서 앵앵거리는 듯 했다 .“ 할아버지 !”
헉헉 숨이 혀끝까지 차올랐다 목에서는 쓴 내가 올라왔다. 아마 4학년 때 운동회에서 청군 머리띠를 하고 달렸던 것보다 배는 더 빨리 뛰어 왔을 것이다.
“진월아 . 거 목 빠지겄다 뒤에서 군인이라도 쫒아온다 그러냐 .”
평상시처럼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태연히 나를 맞으시는 할아버지는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머리가 .......”
“거 머리카락이 말이여 원래는 쇠똥구리 똥보다도 더 진혔어 . 근데 말이여 나이는 못 속이더란게. 거 디스코 집에 가서 부탁이나 조금 해봤더니 아지메 인덕에 그냥 나올 수가 있어야제 허허허 ...”
쑥스러우신지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걸하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씀 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나이도 갑절이나 젊어 보이지 진월아 참 살기 좋은 세상이여 .”
말씀은 이리로 하시는데 눈동자는 엄마의 손거울에게만 가계셨다. 이제야 비로소 욕쟁이 할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자꾸 거울을 보시며 어린아이처럼 히죽히죽 웃으시는 모습에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오십원짜리 두개가 짤랑거렸고 할아버지의 바지 주머니 속안에는 아직도 <염색 삼천원 파마 오천원 김디스코 헤어샾>이 적힌 광고지 끝자락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할아버지 ”
“응 ?”
“아빠보다 젊어 보여요 !”
“허허허허 내 손녀 이리 와바 할애비 비위도 잘 맞추고 우리 강아지 우리 복덩이"
아마 김디스코 헤어샾의 아줌마는 할아버지의 머리색 보다 마음 색을 더 진하게 물들이셨나보다.
“근데 할아버지 항구다사이 있잖아요 진짜 밥 주라는 소리에요? ”
“그 시대 어려웠던 사람들은 다 그런 쓸모없는 소리를 잘했단다. 라이스 라이스 기브미 소리도 했었구만 .”
“네 ? 기부미 라이스요 ?”
“내가 뭔 놈의 주책 맞은 소리를 내질렀산가 또 .”
갑자기 할아버지는 나를 떼어 놓으려고 하셨다. 품안에서 떨어져나간 나는 계속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때였다 대문이 삐걱하고 열리더니 욕쟁이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욕쟁이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만큼 이나 젊은 아저씨가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
“거 양반도 별수 없구만 허허허 .”
“흥 썩을 머리카락이 자꾸 허연 것이 내가 영감보다 늙어 보일까봐 했소.”
“같은 늙은이지 뭐 ........허허허허”
할아버지와 욕쟁이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잘 알 수 없지만 두 분의 모습이 아빠보다도 젊어 보이는 것만큼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