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고수진｜보성여자고등학교 2학년



“하나, 둘, 세엣- 네엣…”
언덕을 빼곡히 채우고 앉은 계단을 하나하나 세며 오른다. 하나씩 번호를 매길 때마다 피아노 건반처럼 띵-하고 대답해 올 것만 같아 힘주어 꾹꾹 밟아보기도 하지만,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부스러지는 소리만 발에 밟힌다.
“백칠, 백팔… 어라? 백구?”
언덕 위 넓은 길과 닿아있는 마지막 계단에 백구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건 분명 잘못된 이름이다. ‘백팔계단’이라고 불리는 이곳엔 백여덟 개의 계단만 있을 뿐 백아홉 개째가 있을 리 없다. 없는 계단이 솟아날 리 없으니 중간에 숫자를 넘겨 센 것이 분명하다. 항상 이렇지 뭐… 이 계단 수를 ‘백여덟 개’로 확실히 센 적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계단들은 이름을 하나 잃거나 얻는다. 내 잘못된 숫자 세기로 생긴 백아홉 번째 계단. 그 좁은 몸 위에 엉덩이 끝만 간신히 밀어 넣으며 앉았다.
이제 막 해가 마지막 온기를 뿜어내며 사라지던 참이었다. 건너편 하늘이 무지개 색으로 타오르고 그 아래에선 자동차들이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쏘며 다니고 있었다. 수십 개의 태양들이 내 눈 속을 헤집고 다녀, 열사병으로 고생하던 날의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터져 오르는 듯 하였다. 뜨겁게 달궈진 눈을 닫고 어지러움이 맴도는 머리를 잔뜩 쭈그린 몸 안에 집어넣었다.
‘집으로는 가야 않아.’
아니 갈 수가 없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집에는 졸린 눈만 껌뻑이는 개 한 마리만 있고 열쇠는 가지고 나오질 않았다. 일부러 서랍 깊숙이 던져 넣고 나왔다. 더 이상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집에 들어가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온 집안에 불을 켜놓고 있어도 구석 곳곳에 숨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그 어둠의 향내… 지겨워 잠만 자면서도 늦게까지 학교 보충수업을 남는 것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가끔 이렇게 앉아 혼자 청승 떨고 있는 것도 차갑게 식어 있는 집안의 공기를 조금이라고 덜 맡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꼭 따질 참이다. 지방일 때문에 한달에 한번 만나기도 힘든 아버지와 내가 잠든 사이에 와서 내가 나갈 때까지 자는 엄마. 거실 한쪽에 붙어 있는 화이트보드가 우리 모녀의 유일한 대화수단이었다. 사람 목소리를 잊어 먹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엄마가 일을 나가시기 저에는 그냥 웃어넘기던 일이 지금 현실이 되어 부쩍 차가워진 바람처럼 마을을 때렸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더 벌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틀어질 대로 틀어진 가슴에선 따가운 말이 터져 나와 목구멍을 찔러댔다. 조금이라도 엄마에게 상처를 줘야할 것 같았다. 나는 견디지 못할 만큼 굶주린 가슴으로 엄마의 마음을 모두 뜯어먹어야 살 것만 같았다. 고등학생이나 된 주제에 라고 해봐야 소용없어, 다 우리 집 잘되자고 하는 일인 줄은 알지만 정에 굶주린 가슴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족. 가족이란 게 내가 정말 있는 건지도 이젠 잘 모르겠다.
온통 껌껌해진 세상이 너무 추워 몸이 떨렸다. 서울엔 하늘에 별이 뜨지 않는다. 대신 태양만큼이나 환하고 얼음덩어리보다는 더 차가운 인공 별들이 땅 위에 화려히 피어오른다. 그래서 계단 끝 번화한 시내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더 시리게 반짝이는 것이리라…. 교복치마 밖으로 삐죽 나온 다리가 차갑다 못해 따끔따끔 아파와 손으로 연신 비벼댔다. 아마 열쇠를 들고 나왔다면 지금쯤 툭툭 털고 일어났을 것이다. 안 가져나오길 잘 했지. 오늘만큼은 꼭 담판을 짓고야 말겠어.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과 계속 부딪혀 차갑게 타올랐다.
그렇게 몇 시간째 사나운 이빨을 모두 드러내고 있을 무렵, 계단 끝에서 엄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그만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는 천천히,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열 개 쯤 올라올 때마다 한번씩 쉬면서.
“엄마!”
엄마가 중간쯤 올라 왔을 때 답답한 마음에 빽- 소리를 쳤다. 엄마는 공기를 가르며 나간 내 목소리를 듣고는 조금씩 속도를 내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쉬엄쉬엄 오시던 아까와는 다르게 한번 숨 돌리지도 않고 한번에 반이나 남은 계단을 올라오셨다. 조금은 놀란 듯,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 왜 여기 있냐며 물으시던 목소리를 좀 일찍 오면 안돼? 라며 퉁명스럽게 무시해버리고는 차갑게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잔뜩 화가 나 있었지만 혼자가 아니 여서 일까? 조금은 따뜻해진 집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따지고자 안방 문을 벌컥- 열자, 앉아 연신 다리를 주무르고 계신 엄마와 아까 들고 올라 온 검은 봉지 속에 흩어져 있는 약상자들, 그리고 엄마 무릎 위에 노랗게 붙어있는 작은 패드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계단을 그리 천천히 오르던 게 아픈 무릎 때문 이었나…. 그런 무릎으로 그 계단을 반이나 쉬지 않고…. 잔뜩 날이 서 있던 마음이 따끔따끔해져왔다. 목구멍을 찌르던 독한 말들이 몸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엄마, 일 계속 해야 돼? 나 혼자 있어야 하는 거 싫어.”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뱉자 엄마가 살짝 쩔뚝이며 일어나 나를 감싸 안았다.
“우리 딸,혼자 집에 있도록 해서 미안해. 혼자서 집 치우고 밥해먹고…. 힘들 텐데 말이야. 하지만 엄마는 우리 딸이 있어서 정말 좋아. 힘들게 일하고 어두워져서 들어와도 우리 딸이 예쁘게 치워놓고 따뜻하게 데워 놓아서 춥지도, 외롭지도 않다? 엄마가 필요할 때도 옆에 못 있어 줘서 많이 걱정했는데 벌써 이렇게 잘 크고 잘 지내서 많이 고마워. 우리 조금만 더 참자. 엄마도 우리 딸 안 외롭고 안 힘들게 노력할게.”
바보같이,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곳곳에 숨어있던 차가움도, 어둠도 모두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져왔다. 외롭다고만 느꼈던 집안에, 가슴에 따뜻한 햇살이 비춰오는 것 같아 눈에 가슴에 맑은 비가 내렸다.
요즘도 나는 가끔 백여덟 번째 또는 백일곱, 백아홉 번째 계단 위에 앉아있다. 하지만 이젠 차가운 어둠이 싫어 도망친 게 아니라 계단 끝에서 천천히 올라올 우리 가족을 마중 나가 따스하게 꾸며놓은 우리 집까지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일 뿐이다. 기다리며 마주치는 바람이 태양의 온기처럼 따스하다.





익숙함


전용주｜용신공업고등학교 3학년


“ 아 진짜 짜증나 ! 자기가 뭐라고 학생들 머리를 잡는 거야 ?”
“어 너도 잡혔어 ? 나도 그런데 진짜 짜증나지 않냐 ?”
양 팔을 모아 책상에 붙이고 그 안에 고갤 푹 수그린 채 자고 있었던 나는 누군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추스르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녀석들 중 하나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녀석은 잔뜩 불만 섞인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 새로 수위가 바뀐 거 알지? 근데 그 수위가 우리 머리 잡더라니까 지가 뭐라고 학생들 머리를 잡냐고 이거 봐 내 머리가 그렇게 기냐? 선생님들도 안 잡는데 ..”
확실히 그녀석의 머리는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그녀석이 이토록 흥분하는 것은 짧은데도 잘려서 억울한 것보다는 머리카락을 잘린 것 자체에 더욱 큰 의미를 둘 수 있겠다. 그녀석의 한 쪽 옆머리가 다른 한쪽에 비해 굉장히 짧게 잘려 있었다. 수위가 무슨 머리 자른 데에 기술이 있겠는가. 원래 머리카락이 있었을 귀 바로 옆쪽 은 휑하고 그나마 남은 옆머리는 그 수위의 투박한 인상만큼이나 뭉툭하게 남아 있었다.그 녀석만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잘린 녀석들은 많았다. 지금이야 굉장히 생소하고 또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마치 제 목숨처럼 여겼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들 함부로 여길 수는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뿌리 깊은 유교의식도 한 몫 했다. 지금 우리 반 머리카락을 잘린 녀석들의 불만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기세를 꺾으며 상투를 잘랐던 때의 우리나라 국민들의 감정과 같아 보였다.
어 그럼 그 수위가 친일파나 일본인 순사쯤 될까 ? 저 녀석들은 애국지사고 ? 괜히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웃는 미친놈 이 될까 싶어 나는 되도록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낄낄 웃었다. 애국지사 하나가 외쳤다 “담임이다 ! ”
나는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뭐에 대해서 ? 머리카락에 대해서 어차피 담임 수업은 재미도 없고 영어나 수학처럼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시간 때울 겸 잠도 쫒을 겸 겸사겸사 말이다. 비록 수업에 집중해주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잘 수는 없잖은가. 이건 기본예절일 텐데 다른 애들에게 그렇지 않은가 보다 주위를 들러보니 다들 엎드려 자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자 통신과 전공 교과목인 통신 시스템의 선생님이신 우리 담임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고 있음에도 그는 화난 표정도 울분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무표정했다. 이런 일은 이미 익숙한 것처럼 수업 중에 아주 소수의 학생들만이 듣고 호응해 주고 있음에도 이런 일에는 익숙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의 혼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담임선생님을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그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 가장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머리카락도 결국 뭐냐 학생들이 대는 가장 흔하고도 커다란 이유를 대라면 역시 개성이 아닌가.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학생들도 대립하는 입장인 학생회 측의 주장처럼 단정한 스포츠로 학교의 학생들이 머리를 자른다고 치자. 그랬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머리카락 개수가 차이날 것이고 흰머리 개수도 차이가 있을 것이며 그 사람의 됨됨이를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머리카락으로 그 머리스타일을 길고 멋지게 한다고 해서 사람의 인격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외모의 차이를 가를 수 있을지 언정 그 사람의 본질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쉬는 시간 때가 되었다는 듯 일어나 소란을 피우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머리카락의 일은 이미 잊은 듯한 녀석들을 본다. 몇몇을 빼면 친하지 않아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녀석들이지만 지금은 더욱 더 얘길 못할 것 같다. 저 머리가 다 자라 익숙해질 때 까진 .
2교시는 영어시간이었다. 우리학교 영어 선생님의 별명은 “ 뒷모습만 미인 ” 이었다. 키도 큰데다가 투피스를 입은 윤곽으로 짐작되는 몸매도 좋은 편이고 어깨를 넘고 허리에는 미치지 않는 손질이 잘 되어있는지 결이 좋은 머리카락 뒷모습은 정말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뒷모습의 애기였다. 이상하게 도 앞모습은 그러니까 그녀의 얼굴은 예쁘지 않았다. 안경이 걸쳐진 코는 낮고 언젠가 티비에서 본 달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피부, 턱은 이중으로 겹쳐져 살찐 사람 같았다. 애들은 그녀를 보고 다른 머리빨...이라고 한다 .
뒷모습이 예쁜 것이 순전 머리카락 덕분이라고 ..그래서 그녀가 수업을 들어오면 그때부터 수면시간인 것이다. 처음에는 화를 내더니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익숙해진 걸까 ?
나는 나의 익숙해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다. “버스안의 그녀는 어때 잘 되가냐 ? ” 영어 교과서를 집어넣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 “ 그 녀석은 한숨을 푹 쉬고 몇 가지를 더 물어본다.
그럼 어떻게 할 거냐 잊기로 한거냐 채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 녀석은 교실 뒤쪽에서 말뚝박기를 하는 무리 속에 섞여 사라졌다. 애써 요새는 생각고 있지 않았는데 이미 생각의 물꼬는 툭 터져서 현실에서 나를 밀어낸다.
버스안의 그녀 , 그녀는 내가 중학교 때 옆집에서 살던 여자애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이사 간 그녀는 나보다 한살 어린데 고등학교에 올라와 다시 만난 그녀는 내개 먼저 아는 척을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녀와 많으면 일주일에 두 번 적으면 아주 못 만났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사전에 이미 약속한 것도 아닌데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늘 원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단 버스에서 몇 분 만나는 것임에도 그녀가 네게 먼저 말 걸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만큼은 내 자신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느낌이 좋았다.
앞머리가 열려진 창문에서 부는 바람이 날린다. 머리 많이 자랐구나 머리 자를까 ? 이상하겠지 그녀를 볼 수 있을까 벌써 3주째다.





머리카락


허재은｜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밖에 나가 ? 생리대 좀.......”
엄마는 외출금지 중이다. 사흘을 집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다. 앙상하게 마른 손이 오천원 한 장을 바닥에 내어 내 쪽으로 민다. 나는 괜찮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참는다.
시퍼런 멍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안방 문을 닫고 나온다. 현관에서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있는데 안방 문이 천천히 열린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힘겹다. 조금 열린 틈으로 굽은 엄마 등이 보인다. 머리카락이 브래지어 끈까지 내려온다. 한 가닥으로 묶어도 잔머리가 너저분하다. 이번에는 화장실 문이 열린다. 아빠 때문에 제대로 닫히거나 잠기는 문이 없다. 나는 그나마 정상인 현관문을 다고 나간다.
“ 일반 소형으로 주세요. 안대랑 마스크도 하나씩 주세요 .”
약국에서 원래 사려던 것과 함께 생리대를 산다. 아저씨에게 특별히 검은 비닐에 넣어달라고 한다. 아직까지 생리대를 드는 것이 부끄럽고 어색하다 검은 비닐에 위스퍼가 어렴풋이 보이긴 하지만 그것을 들고 집 근처를 한참이나 배회한다.
“여기”
나는 엄마 앞에 검은 비닐을 털썩 내려놓는다. 엄마는 웅크린 채 맨 바닥에 누워 있다. 내가 내려놓은 비닐을 보고는 천천히 일어난다 .
“안대랑 마스크도 엄마 써 이렇게 아빠 없을 때라도 좀 나가 .....”
엄마 손이 비닐 속을 뒤적인다. 엄마는 뭉툭한 생리대만 잡아 화장실로 간다. 해가 진다. 어둑어둑 한데 불도 안 켰다. 티비 불빛만 환하다. 나는 자꾸만 채널을 돌린다. 오늘따라 타이밍이 안 맞다. 끌리는 프로그램들이 하나씩 끝난다. 다음 이 시간에 ...란 문구를 몇 번이나 봤는지 알 수 없다 끼기긱......
엄마가 배를 잔뜩 웅크린 채 화장실에서 나온다. 쉰셋을 바라보고 몸 추스르기도 힘든데 생리라니.. “ 어디 아파”
엄마가 이불을 깔고 눕더니 일어나지 않는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배만 움켜잡고 있다.
“ 생리통이야 ...”
괜찮은 듯 말하려는 엄마의 이가 물려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줄곧 생리통도 없었으면서..
“아빠 올 때 됐으니까 일어나 있어라 ..”
엄마는 내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아빠가 올 시간 침대에 눕는다. 노래를 크게 튼 이어폰을 귀에 꽃는다 자야지..
잠깐 잠이 들다 만다. 노래 전주가 조용히 흘러나오자 아빠 목소리가 들린다.
“ 이 여편네...” 나는 노래 소리를 더 크게 높인다. 아빠는 커트에 파마머리를 좋아한다. 엄마가 긴 머리카락으로 외간 남자를 꼬셔내지 못하도록 .
꿈을 꾸어야 겠다. 엄마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시 행복해지는 꿈 ..
다시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방문이 비스듬히 열려있다. 조용하다.
조심조심 방을 나선다. 현관을 일단 살핀다. 아빠 구두가 없다. 거실 불을 켜고 안방으로 간다. 내가 문을 열려는 찰나에 문이 저 혼자 열린다. 나는 손가락으로 문을 조금 더 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엄마가 벽을 보고 누워 있다.
안방 문을 닫으려다 만다. 바닥에 뭔가 눈에 걸린다. 머리카락 뭉치다. 엄마의 긴 머리카락이 뒤엉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계단


김주실｜한강전자공예고등학교 2학년



언젠가 오래된 앨범에서 아빠를 봤다. 내가 10살 때 까지 있는 그 앨범 속에서 우리 가족은 4명이었다. 그 사진 속에선 아빠도 엄마도 나도 동생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진 속에 우리는 웃지 않고 있었다. 사람 수도 줄어들었고 사진 찍는 것조차 달갑지 않은 표정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빠가 없는 우리 세 가족은 사진 찍기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아마도 아빠와 엄마가 헤어진 후부터 그런 것같았다. 그렇다고 이제까지 아빠 걱정이나 아빠 생각을 한 사람은 우리 셋 중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밤마다 술 취해 괴롭히던 아빠가 없어서 좋았고 엄마를 보는 게 좋았다.
불쌍한 걸로 치자면 아파트를 팔아 몽땅 가져간 아빠보다 엄마와 우리 쪽이었기 때문에 아빠 따위는 한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
엄마와 우리 모두는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편했기 때문이다. 가끔 주위에서 깡마른 모습의 커다란 가방을 들고 가는 아빠를 봤다던가. 심지어는 역에서 구걸하는 아빠를 봤다는 말들을 들었지만 우린 그냥 스쳐버렸던 것 같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삼촌에게서 아빠의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도 .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서울랜드로 소풍을 갔다. 오는 지하철 안이었다. 친구들과 기분이 들떠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던 내 눈에 낯익은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자린 노약 석이었고 남루한 행색에 할아버지 그건 분명 우리 아빠였다. 바로 옆에 있었는데 불구하고 알지 못했던 건 너무나 변해버린 아빠의 모습 때문이었다. 난 혹시나 나에게 아는 척을 할까봐 조마조마 했지만 아빤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딴 사람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뿐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소 ......그 눈과 미소가 무슨 뜻인지 그땐 잘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날 찔리게 만들었다.
신림역 .....드디어 내가 내릴 곳에 왔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낡은 모자와 커다란 가방이 마치 노숙자를 연상케 하는 아빠가 나왔다.
그 많은 돈은 뭐하고 ..........잠시 화가 났던 난 또 다시 혹시 날 따라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계단을 오르던 내 걸음은 느려졌다.
나도 모르게 3계단정도 앞서서 걷던 아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힐끔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는 정말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한 계단을 오르고 멈춰서 한번 뒤를 돌아보고 또 한 계단을 오르고 멈춰서 한번 뒤를 돌아보고 어느새 내 발걸음은 아빠의 발걸음과 같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계단을 다 오른 후 난 뒤도 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왔다. 집에 와 보니 엄마와 동생은 과일을 잔뜩 깎아 놓고 티비앞에 있었다.
우린 셋이었고 아빤 혼자였다.
그 뒤 이상하게 자꾸 아빠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내가 정말 이상하고 어색해 난 왜 그런 생각이 들게 됐는지 이유라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 아빠 생각을 하고 결국 쉽게 그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가 쪽으로 열어둔 창문으로 담배냄새가 들어왔다. 아빠랑 헤어진 후 집에선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담배냄새 이었는데 난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현관문을 열었다. 후다닥 계단을 뛰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순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내 머릿속에 무언가의 기억들이 스치기 시작했다. 아빠는 우리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





모자


박하나｜주엽고등학교 3학년



난 두개의 모자 중에 고민하고 있었지. 그때 가게의 문이 열리며 방울 소리가 들리더구나. 난 너와 네 엄마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어. 너는 진열대의 수많은 모자를 내버려두고 내가 엄마 쉬고 있던 빨간색 털모자를 집더구나. 난 네 손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어. 그래서 네가 고른 모자에서 살기로 했어. 매일 너의 얼굴과 귀여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니 너무 기쁘더구나.
네가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는 동안 네 엄마는 주머니에서 꼬깃한 돈을 꺼냈어. 가게 주인 아저씨는 이 만원이라고 한 것 같아. 하지만 네 엄마는 돈이 모자라다고 했어. 사람들은 모자를 살 때 돈을 내더구나. 돈은 무엇 하고도 바꿀 수 있는 건가 보지 ? 넌 빨간색 털모자 쓰고 라면을 사러 가곤 했잖아. 그럴 땐 네 손에 동그란 돈이 들러져 있었지. 그리고 조금 후엔 네 손에 노란색의 라면이 들러져 있었지.
난 네가 학교에 갈 때마다 널 따라갈 수 있었어. 하긴 네가 가는 곳이 어디든지 난 따라 갈 수 있 있었지. 넌 아주 잠깐 밖에 나가더라도 모자를 쓰고 같잖아.
그런데 너는 왜 항상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니 ? 그리고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더구나. 넌 참 얌전한 아이인가 봐. 나 역시 한번도 너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말이야.
난 네게 너무 좋지만 너에게 화가난적이 있어. 너도 기억할거야. 그날은 비가 몹시도 내렸어.
너는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 라디오에서는 오후부터 비가 많이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지. 하지만 넌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더구나. 난 네가 집에 금방 돌아온 줄 알았어. 넌 라디오 옆에서 가방을 꾸렸잖니. 분명히 일기예보를 들었을 텐데 ..
결국 그날 넌 비를 흠뻑 맞고 돌아왔지. 나 역시 그랬어. 모자는 스펀지처럼 빗물을 머금고 네 얼굴로 흘렀지.넌 몹시 몸을 떨었어. 난 그런 네가 너무 애처로웠어.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더구나. 난 열심히 모자의 빗물을 짜냈지만 나의 작은 손으로 역부족이었어.
집으로 돌아온 너는 맞은 비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흘렸지. 나도 눈물이 흘렀어. 내가 태어나서 처음 흘려본 눈물일거야. 난 너에게 몹시 화도 났어. 너는 왜 바보같이 우산을 안가져간거니 ?참 너희 반 친구들은 너를 바보라고 부르더라 ? 네가 툭하면 실수를 해서 그런 거니? 친구들이 아무리 너에게 바보라고 해도 넌 꿈쩍도 안하더라 하긴 . 일기예보를 틀어놓고도 우산을 안가지고 가는 걸 보면 너도 네가 실수투성이 라는 걸 아는가 보구나 .
어? 지금 넌 갑자기 모자를 집어 들었어 난 그만 모자에서 떨어질 뻔 했단 말이야 앞으로는 살살좀 다러줘...
너 왜 또 우는 거지 ? 울면서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거야 ? 난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잖아 난 밤하늘의 별을 보는 걸 즐기지만 네게 온 이후엔 별을 본적이 없어. 네 방에는 조그만 창문조차 없잖아. 내가 군인의 모자에 살았을 땐 매일 별을 볼 수 있었어. 난 참 낭만적인 요정이거든 .
앗 잠깐만 기다려 아직 신호등은 빨간불이야.왜 그렇게 서두르니 트럭이 오는데 어서 피해 왜 넌 멈추지 않는 거야 ?
그것 봐 조심하라고 했잖아 많이 아프지. 너 지금 잠이 든 거야 ? 이런데서 잠이 들면 안돼 앗! 너의 머리에서 피가 나는 구나. 빨간 모자를 물들였어. 너 설마 죽은 거니 ? 그런 거니 ?
그럴 리가 없어 어서 일어나봐 너도 나처럼 요정이 된 거구나 .......





머리카락


정은지｜충주여자고등학교 2학년



“은지야 너 얼른 안 일어날래 ? 수련회 늦겠다 !”
“ 수련회는 무슨 수련회야 ! 꽃동네도 수련회야 지옥체험이지 .......”
이건 내가 아니다. 수련회라 그러면 하루 전 날부터 설레어 새벽까지 잠을 뒤척이던 내가 지금 이불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를 내뱉고 있다 .
“고등학교 2학년이 꽃동네가 뭐야 꽃동네가.........”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꽃동네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내가 뱉은 불평을 쌓을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63빌딩도 날 존경할 것이다 “ 1번부터 10번까지는 아픈 할머니를 보살피는 여자병동입니다 ”
꽃동네 체험을 갔다.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을 얼핏 들어보니까 여자병동이 가장 힘들다고 하던데 또 한번 지옥에 갇힌 느낌이었다.
내가 돌봐드려야 할 할머니는 유난히 외로움을 잘 타시는 분 이었는데 처음에 수녀님께서도 어두워진 분이니까 많이 웃을 수 있게 재밌게 해드리라는 부탁을 하셨다.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인 수련회를 꽃동네로 온 나이기에 네게서도 웃음을 잃어 버린 지 오래였다.
들어선 순간부터 코를 자극한 할머니들만의 특유의 냄새 , 얼굴에서부터도 말을 걸기조차 무서운 어둠이 우울한 내 마음을 더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환경에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내 손짓은 세 살 배기 어색한 아기 손짓에 불과했다 “ 얘야 나 머리 좀 감겨다오 ...”
태어나서 단 한번도 남의 머리를 감겨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할머니 , 머리 숙이세요 .”
그러데 한 올 한 올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이 내 손 사이를 지날 때 마다 위로 올라오는 쾨쾨한 냄새가 자꾸만 날 숨 막히게 했다. 머리를 자주 감지 않아 머릿결이 뻑뻑해진 할머니의 머리카락 사이로 내 손을 들리지 않는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 몇 년 전 만 해도 우리 아들이 이렇게 이 어미 머리를 감겨주고 씻겨 주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 어느덧 비눗물 사이로 섞여버린 할머니의 눈물은 외로움을 표현 할 여유도 없이 흔적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
“ 할머니 , 이제 또 뭐할까요 ?”
“ 다른 것 말고 이리 와서 내 머리에 허연 거나 좀 뽑아줘 . 이 할머니가 돈은 많지 않아서 많이는 못 주겠고 한 개에 십 원 씩은 쳐 줄 테니 한번 뽑아볼텨 ?“
생각하고 고민 할 겨를도 없이 이미 할머니의 흰 머리는 내 손을 따라오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외로움 혼자 남겨져 살아야 하는 아픔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작은 행복의 혼합색이 되어 할머니의 흰 머리는 모든 기억을 내 손에서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다.
“ 하나 둘 셋 .......스물 셋 ! 할머니 230원이요 ”
짓궂은 나의 장난 한 마디에 지갑이라고도 할 수 없는 헝겊조각에서 수십 개의 십 원짜리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고맙다. 그리고 50원은 이 할머니가 주는 보너스여 잠시나마 이 할미를 돌봐주어서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 졌는지 모르겠다 .........”
할머니의 흰 머리를 뽑으면서 허물어 진 벽 사이로 보이지 않는 작은 사랑이 50원이 되어 네게 되돌아 왔다. 지금 내 앞에는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한 노인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
자식들로부터 꽃동네라는 이 곳에 버림을 받았을 때에도 몸이 불구란 이유로 당신조차도 자신을 저 발밑의 하찮은 동물로 밖에 여길 수 없었던 분노의 눈물이 지금 내 앞에 떨어지고 있다. 가족의 손길을 기다리며 한 없이 변해가고 있는 할머니의 머리카락.
그래도 그 언젠가 누군가에게 세상 가장 소중했을 고귀한 은빛 실을 조심스레 손에 쥐어본다. 지금 내 손등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이토록 따가운 이유는 너무 세월이 많이 지나 하얗게 변해버린 할머니의 외로움이 태우고 있는 아픔 때문은 아닐까 ...





계단


김미진｜개포고등학교 2학년



내 주민등록번호 첫 줄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이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몇 개의 주소들이 내 발자국처럼 계단 모양으로 남아있다. 지금 살고 있는 다섯 번째 계단까지 나는 그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본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어떤 소설가는 내가 살던 동네를 이렇게 말했다. 오후 내내 친구들과 놀다 땅거미가 질 때쯤에 집으로 향할 때면 발을 들 때마다 물씬 물씬 풍기는 아카시아 향에 집에 가는 것도 잊고 동네를 바라보았다. 겨울이면 포대자루를 묶어 썰매를 타던 내리막길에 우리 집이 있었다.
엄마는 늘 내게 우리 집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난 우리 집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초록색 지붕에 붉은 색 벽돌집 고만 고만한 키에 머리를 맞댄 주택들이 빼곡하게 차있는 동네에서 우리 집이 단연 빛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았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해갔다. 일년만 살자던 지하방에 그대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윗집 언니는 교복을 입고 계단을 올라갔고 난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비만 좀 내려도 금세 퀘퀘한 냄새가 나는 반지하방에서 난 늘 이층집 계단을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아니 사실 여러 번 주인아줌마 모르게 이층 계단을 오르곤 했다. 하지만 매번 끝끝내 마지막 계단은 올라가지 못했다. 깐깐한 아주머니한테 혼나는 것이 무서운 마음보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기 싫을 것 같아서였다.
동네 어귀에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높은 지대에 있으면서도 장마 때면 늘 집이 잠겼다. 물이 빠지지 않는 날에는 반 지하 계단을 세 칸 쯤 올라와 발만 동동 굴렸다 발목까지 차오른 물을 열심히 퍼내던 엄마는 대야를 걷어치우고는 계단에 걸터앉아 허탈한 한숨만 내쉬었다. 아랫동네는 거의 다 잠겼다고 그나마 윗동네라 다행이라고 비가 그치고 가재도구를 내다 말리던 엄마는 이내 다 던지고 엉엉 우셨다.
고작 냄비 몇 개 이불 몇 채를 못 쓰게 되서 우시는 것이 아니었다. 이걸 다 말려도 다시 계단을 내려가야만 하는 처지가 속상한 것이었다. 이층에 대한 동경은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엄마와 나란히 앉아서 이층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어린 나의 마음에도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여름 한 계절이 자리를 비켜서면 가을이 왔다. 가을이면 놀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었다. 석광사 뒷길을 따라 친구들과 풀피리를 만들어 놀다보면 금방 등산로까지 가 닿았다.
등산로까지는 씩씩하게 왔는데 입구에 선 계단은 내 발걸음을 망설이게 했다 안산에 단밤을 주우러 가자고 친구들이 재촉하는데도 왠지 계단을 오르기가 싫었다. 끝없이 높은 계단을 오른 다음 다시 내려온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꾹 감고 두 걸음씩 풀쩍 뛰다가 결국 넘어져 무릎이 깨졌다. 손에 덜 여문 밤을 두개씩 쥐고 돌아온 나를 보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조심해서 올라갔어야지 계단은 한 걸음씩 오르는 거야. 한 계단도 빼 놓지 말고 그래야 정말 계단을 올라간다고 하는 거다 .”
언제까지나 반 지하 계단을 내려갈 줄만 알았던 우리였지만 그 다음 해에 이층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현관문을 여는 마지막 계단에 올라섰는데 더 이상 불만하지 않았다. 계단을 다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라갈 계단을 하나 더 쌓은 것뿐이었다. 나의 주민등록 등본에도 그리고 내 마음 속에도 하지만 아직도 어떤 계단 앞에서만 서면 나는 두렵다. 아직 마음 속 한구석에 내려옴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계단은 오를 수도 , 내려갈 수도 있음을 이제 알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 또 하나의 층을 쌓는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동안


김류경｜양재고등학교 1학년



“저 머리카락들은 모두 누구들의 것일까? ” 미용실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경진언니가 불쑥 내게 던진 말 이었다. 고모부의 단아한 모습이 떠올랐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들 ... 저들도 언젠가 주인의 귀 밑에서 찰랑거렸겠지 . 우아한 파마를 했었거나 예쁜 염색머리였을 지도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람 이미 그것들은 생명의 역동성을 잃어버렸는데 ..
나에겐 다정한 친구 같은 사촌언니가 있다. 언니와 오랜만에 미용실에 함께 갔었다. 미용실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 쌓여있던 머리카락들은 그녀의 울음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그녀에겐 급성백혈병으로 4년간 성모병원의 13층 무균 실에서 암과 투병하시던 아버지가 계셨다 “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 사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 것은 뭘까 ...” 경진언니는 고모부를 그리는 듯 생각에 잠겼다 1년 전에 돌아가신 고모부......18살 아직 어린 경진언니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죽음이란 참 허무하다. 봄에 파릇 파릇 생기 넘쳐흘러 싱싱하게 피어나던 꽃잎들은 가을이 되면 그의 생에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다. 그렇게 세상에 색을 입혀 준 후 할일을 다한 꽃잎들은 서서히 말라간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이 나무들을 흔들어 깨울 때, 그때쯤 아름답던 꽃잎들은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지고 만다. 아무리 아름답고 예쁘게 피어나던 꽃잎들도 바닥에 떨어지고 나면 결국 사람들의 발에 밟혀 찢겨지는 쓰레기에 불구한 것이 된다.
그렇듯 사람의 머리카락 역시 예쁘게 다듬고 꾸미고 해봤자 가위에 잘리고 나면 결국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고모부께서는 4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몇 차례 반복하셨다. 그런 고모부를 처음 뵌 것은 초록가운과 분홍마스크 비닐장갑을 껴야만 출입할 수 있는 무균 실에서였다 독한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 군고구마 장수의 머리에서 볼 수 있었던 모자를 쓰고 계셨던 고모부......권위 있고 엄하시며 때론 너무 무서워 보이기만 했던 고모부가 다른 길을 걷고 계신 듯 했다.
사람의 삶도 순간이다. 뜨겁고 열정적이며 희망에 북받쳐 올라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멋진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으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한번에 잘라버리는 죽음이라는 가위를 그냥 받아 들여야 하는 걸까 ? 경진언니는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나의 머리카락은 지금 자라나고 있다. 살아있으므로 조금씩 자라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 .
생명이 있고 머리카락이 자라나며 살아가는 것을 느낀다면 우리는 해야 할 일이 것이다.
우리에겐 열어젖히고 나아가야만 하늘미래가 있다. 자라는 머리카락이 생동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 내야만 할 것이다 내 삶의 피가 끓는 동안 ...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기억할 것이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동안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





모자


윤지원｜상명고등학교 3학년



아버지는 오늘도 그 모자를 들고 나갈 채비를 하셨다. 오래 되 낡고 다 헤진 모자였지만 처음부터 머리에 얹어 햇빛을 가릴 용도로 산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모자를 빌어 구걸해 먹고 살았다. 아니 좀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나도 그렇다.
아버지가 빌려 온 돈으로 매 끼니를 때우니 누군가가 거지의 자식이라고 한다면 부정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눈이 보이지 않아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나 이지만 지하철역 바닥에 엎드려 하루 종일 고개한번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나의 이해심을 증오로 바꾸어 놓기 충분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적어도 나만은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 지난 며칠간은 아버지가 벌어온 돈으로 차려진 밥도 굶으며 벗어나려 애써봤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기다리지 말고 자라 ..”
“괜히 쓸데없는 마음에 밥 안 먹고 그러지 말고 .......”
한손엔 지팡이를 다른 한손엔 생전 머리에 써 보지도 않은 모자를 꼭 쥐고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아버지 손에 들린 낡아빠진 모자처럼 아버지 인생도 엉망진창이었다 .
자정이 넘어서야 인기척이 들렸다. 빌어먹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라고 피곤에 절어 녹초가 다되었다. 나는 분명 조금 전까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지만 문소리에 얼른 감아버렸다 .
“ 성우야성우 자냐?”
나는 막 코를 고는 시늉을 하려던 참 이었다. 투박하고 거친 손길이 이불속을 파고들어 닥치는 대로 더듬기 시작했다.
“ 아이 씨 왜 또.,..?”
늘 먼저 일찍 자라고 주문해 놓고 잠을 깨우기가 일쑤인 아버지였다.
“ 아니 안자면 애 좀 주무르라꼬...”
더 이상 말을 해봤자 다시 잠자리에 누울 시간만 더 늦어질 뿐이었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있었던 턱에 아버지의 다리는 늘 퉁퉁 부어 있었다. 작은 내 손으로 다 감싸지지 않을 만큼 붓고 어디한군데 성한 곳 없이 멍든 다리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사소한 동정심마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내가 안마를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 손에 꼭 쥐어지진 모자 안에는 백 원짜리 동전에서 만 원권 지폐까지 가득 담겨있었다. 모든 것은 저 애지 중지하며 안고 있는 모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그랴도 수입이 짭짤혀 어디 보자 이거 이거 니 가지라 .....”
눈만 병신이지 다른 부분은 남들보다 더 발달해 손맛으로만 지폐를 귀신같이 구별해냈다.
“ 여깄다 낼 학교 가서 친구들이랑 맛난 거 사묵으라 .”
아버진 모자 안에서 만원짜리 하나를 지어 내 손에 쥐어줬다. 예전 같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집어 던졌을 나지만 난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날 아침 그날따라 일찍 눈이 떠졌다. 아버지 머리맡에 놓인 모자가 눈에 띄었다. 나는 얼른 모자를 집어 대문 밖으로 나갔다. 골목 몇 개를 돌아 우리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어느 집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가슴속 까지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부터 아무 짓도 못하겠지.”
묘한 웃음까지 입가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니 채비 중이던 아버지가 그 모자를 찾고 있었다.
“ 어디 갔다오노 ? 새벽부텀”
“운동요 ”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 니 내 모자 못 봤나 ? 분명히 내가 머리맡에 놨는데 ...”
대꾸도 않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버지는 벌써 나가고 난 후였다.
“젠장 도대체 뭘 가지고 나간거야 ?.....”
그날도 아버지의 귀가 시간은 같았고 난 늘 그랬듯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렀다.
아버지는 두툼해 보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조심스럽게 돈을 꺼냈다. 모자가 없었음에도 액수는 비슷했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줄곧 굳어져 있었고 긴 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 난 지난밤 받은 돈으로 친구들에게 단단히 한턱을 냈다.
“ 야 우리 지하보도 쪽으로 돌아가지 않을래 ?”
“ 거긴 왜 ? 그쪽으로 가면 멀잖어 ...”
“ 그래도 바람불고 추우니까 그길로 가자 ”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몰라도 모자 없이 구걸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궁금했다. 컴컴한 지하보도를 얼마쯤 들어가니 예상대로 한 남자가 웅크린 채로 엎드려 있었다. 터벅 터벅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자국 소리가 울려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마치 쿵쾅거리는 심장의 소리와도 같이 . 그 앞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왜 ? 안가 ?”
“ 어 ...잠깐만 ”
나는 찬찬히 살폈다. 모자가 놓여져 있던 자리엔 덩그러니 아버지의 두 손이 놓여져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아저씨 건강하세요 .....”
벌어진 손 위로 살며시 지폐를 놓았다 .
“ 감사합니다 ........”
친구는 나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장난스럽게 키득거렸고 얼굴이 한껏 달아오른 나는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
그날 밤도 난 잠들지 않은 채로 누워있었고 아버지의 손길에 습관적으로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 아니 다리는 됐고 . 이거 ..”
아버지가 내놓은 것은 운동화였다.
“오늘 웬 학생들이 왔는디 내가 보이진 않아도 목소리만 들으면 대충 나이를 알거든 ...니 생각나서사 왔다.
목소리도 나랑 비슷 한 것이 요즘 아들 아무리 뭐라고 해 싸지만 그랴도 인정 많은 건 어쩔 수가 없잖아 ...“
아버지는 꽤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 인정이 많다 칭찬한 아이가 자신의 아들인지도 모른 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
다음날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모습어딘가가 쓸쓸해 보였다. 늘 그래왔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도 낡은 모자가 들려 있어야 할 한쪽손이 외로워 보였다.
“오늘부터는 새벽에다리 주무르게 안 시킬 테니 맘 놓고 자그라 .....”
기분이 이상했다. 빈털터리인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 모자는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요 망나니 아들 외에 유일한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없었다.
모아둔 돈으로 모자를 하나 샀다 제일 비싸고 크고 제일 멋있는 놈으로 자지 않고 아버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크고 검은 그림자가 내 얼굴 위에 겹쳐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도 알아보지 못한 채 아버지는 이불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이 들기까지 내내 기침소리 신음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물끄러미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살며시 이불속에 숨겨두었던 모자를 꺼내어 아버지의 머리맡에 놓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삶이라는 계단


이해영｜단국대학교 사범대하교 부속고등학교 2학년



나는 빌라에 살기 때문에 집에 올라가기 위해선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그전에는 계속해서 아파트에 살면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익숙해지면서 계단을 오르는 것도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우선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매번 계단을 오를 때마다 뭔가를 했다는 작은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도 계단을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계속해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간다. 덧셈, 뺄셈을 익히는 것에서부터 미적분과 같은 심화과정을 배우는 과정이 그렇고 점차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 또한 그렇다. 1층을 오르지 않고서는 2층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사칙연산을 배우지 않고서는 방정식을 풀 수 없고, 한 살이 지나지 않고서는 두 살이 될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일은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계단을 오르는 과정과 비슷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수가 있듯이 모든 일이 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잘 만나 신입 사원부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장에서부터 회사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남들만큼 노력하지 않고서도 기부입학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 그에 합당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남들이 힘겹게 올라간 높이를 부모나 권력, 지위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두 다리로 직접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얼마나 높은 곳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합당치 못한 행위를 하게 되고 결국은 자멸하게 된다.
너무 높은 곳에서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낮은 곳에만 머물러있는 사람도 있다. 학생의 신분이면서도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놀기만 급급한 사람들이나 자기 계발에 소홀한 사람들이 이들이다. 이들도 더 높은 곳에는 더 살기 좋고 보람찬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 곳에 가기 위해 올라야 할 수많은 계단들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해 버린다. 아예 시도도 하지 않거나 조금만 노력해 보고는 금세 포기하고 아예 위쪽을 보기를 거부해 버린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영원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한다고 말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노력해 남이 한 계단을 올라갈 때 두 계단씩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다리가 긴 사람들은 쉽게 두 세 계단씩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머리가 좋거나 신체 기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남들보다 쉽게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은 남들이 한 계단 올라갈 때 두 계단씩 올라가는 사람이며 남들이 쉴 때 한 계단이라도 더 올라가는 사람이다. 인생이라는 무한히 긴 계단을 볼 때 계단 한 두 개쯤은 아주 작은 차이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한 계단 한 계단이 모여 성공을 이루는 것이다. 남들보다 10분 늦게 자는 사람은 한달이면 300분을 아낄 수 있고, 1년이면 3600분, 10년이면 36000분을 더 쓸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진 다양한 경험과 지식들이 성공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잘 깨닫지 못한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믿거나 자신도 실행하려 하지 않는다. 이 ‘대다수’의 사람이 우리가 말하는 보통사람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한 두 계단이 차이가 나는 것을 보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언제든지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점점 멀어져 보일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지면 ‘그 녀석은 다리가 길어서 먼저 간 거야. 나도 다리만 길었으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갔을 거야.’라고 스스로 위로해 버린다. 이미 바라보고 따라잡기엔 그들은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자신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앞서가는 사람을 보고 ‘나는 다리가 기니까 저 정도는 금세 따라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더 쉬다 가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일생을 자칭 ‘긴 다리’를 써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치게 된다.
나는 나름대로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는 편이다. 나는 나보다 더 높은 곳의 친구를 보면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유형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모든 친구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잡지 못한 경우도 있고 오히려 그 차이가 더 벌어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내 자신을 더욱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친구를 따라가진 못하더라도 스스로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조건 높이 올라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남들은 다 할 수 있는 이릉ㄹ 하고도 큰 보람을 느낀다. 다리가 없는 사람이 팔만으로 한 층을 기어 올라갔다면 비록 백층을 올라간 사람에 비해 그 높이를 낮을지 몰라도 더욱 더 가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높이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거치는 힘겨운 과정을 통해 자신을 더욱 발전시키고 더 가치 있는 사람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를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 계단에 묻어 번들거리는 땀방울들을 보며 즐거워해야 한다. 이 땀방울들이야 말로 진정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