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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힘을 키우려면
고종석
일본에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가 크게 늘어났다는 보도는 이 가녀린 언어를 모국어로 삼은 사람들 모두에게 긍지를 줄 만하다. 아사히(朝日)신문을 인용한 이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들어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본 학교의 수가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학교 수를 앞질렀다고 한다. 일본의 학교 교육 공간에서 한국어가 중국어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제2외국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교육 현장의 통계는 최근 일본에서 불고 있는 이른바 한류(韓流) 열풍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이어서, 그 바탕이 더 단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의 경우엔 한류 덕분에 한국어 학습 열기가 외려 중국어를 앞지르고 있다는 보도도 여러 차례 나왔다. 공동체 전체의 힘을 반영하게 마련인 언어의 위세에서 일본어와 한국어가 지닌 차이를 고려해도, 그간 두 나라 시민들이 상대 언어를 배우려는 열의는 서로 너무 달랐다. 일본에서 일기 시작했다는 한국어 학습 열기가 이런 역조를 시정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과 일본이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이 행성 위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균형 잡기는 늦은 대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균형잡기에 대한 우리 정부나 민간의 노력이 충분히 적극적인 것 같지는 않다. 기자는 일본학을 공부하다가 한국학으로 방향을 돌린 유럽인 두 사람과 교분이 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 일본어를 배울 때보다 힘이 훨씬 더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혹시 한국어가 내재적으로 일본어보다 더 익히기 어려운 언어라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들이 내세운 이유는 외국어로 된 한국어 학습교재가 너무 드물고 거칠다는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잠시 가르쳐본 기자의 경험으로도, 외국어로 된 한국어 학습서는 그 가짓수도 많지 않고 내용도 빈약하다.
온갖 최신 교육법을 적용한 다양한 수준의 교재가 갖추어진 영어를 배우는 일도 그리 쉽지 않았다는 우리들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그 첫걸음으로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맞닥뜨릴 당혹감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외국어로 쓰인 한국어 학습교재를 만드는 것은 해당 외국의 일거리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어 공동체의 총체적 힘이 점점 더 커진다면, 자연스럽게 외국에서 한국어 학습교재를 개발하려는 노력도 뒤따를 것이다. 우리가 한국어 사용자들을 위한 영어 학습교재들을 제 나름대로 개발해 왔듯 말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핵심인 우리 언어를 선양하는 일에 당사자인 우리 자신이 팔짱 끼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전 세계에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세워 프랑스어를 보급하는 데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치는 프랑스의 예를 흉내낼 것까지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단계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을 위해 다양한 수준과 형태의 교재를 마련하는 것 정도는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와 민간 문화재단들이 이 일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구체적으로 정부와 민간재단이 외국어대학들을 지원하는 것도 생각해 봄 직하다. 한국어로 된 외국어 학습교재 개발에 경험이 많은 외국어대학들은, 한국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거꾸로 해당 외국어로 된 한국어 학습교재를 마련하는 데 적격자다. 예컨대 아랍어과에서는 한국어 전문가들과 힘을 모아 아랍어로 된 한국어 학습교재를 마련하고, 이탈리아어과에서는 이탈리아어로 된 한국어 학습교재를 마련하는 식으로 말이다.
외국어로 된 한국어 학습교재를 마련하는 것은 예컨대 우리 문학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견주어 문화적으로 하찮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하찮아 보이는 일이 한국 문학과 한국 문화의 생명력을 위해선 백 배, 천 배 더 중요한 일이다.
[한국일보 2005년 1월 12일]
고종석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과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언어학 석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코리아타임스, 한겨레신문, 시사저널기자로 일했고, [고종석의 유럽통신],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감염된 언어], [코드 훔치기] 등의 에세이집과 [기자들], [제망매] 등의 소설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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