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민의 덕목' 강요는 그만

은희경(소설가)

늘 불평을 입에 달고 다녀서 별명이 `투덜이 스머프'인 친구가 있다. 그와 함께 전철을 탔더니 역 건물 곳곳에 붙어 있는 표어니 현수막에 대해 한마디 한다. 어딜 가나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것이 옳은 길이다, 말이 많아 역정이 난다는 것이다. 특히 그런 글귀의 대부분이 미성년자를 훈육하는 학교, 혹은 `말씀'을 듣기 위해 제발로 찾아가는 교회 같은 데 걸려 있어야 할 내용이라는 사실이 법적 성인이자 사상의 자유가 있는 자유인으로서 그를 불쾌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 친구가 얼마 전 외국여행에서 돌아왔다. 밖으로 나가보니 강요된 시민의 덕목으로서가 아니라 자발적 의지로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더라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의 애국심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벌써 한국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난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세면기 위에는 `문화인은 손을 씻습니다'가 붙어 있고 문에는 `노크를 합시다'가, 벽에는 `휴지는 반드시 휴지통에'가 붙어 있더라는 것이다. 목욕탕에 가도 마찬가지여서 `물을 아껴 씁시다' `몸을 씻고 탕 안에 들어갑시다' `사용한 비누는 제자리에'라는 글자가 따라다니며 참견을 해댄다고, 글자 아는 게 무슨 큰 죄냐고 목청을 높인다. 그의 불평은 단 한가지이다. 잔소리, 즉 강요가 싫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잔소리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 내용도 `바르게 살자', `오가는 미소는 남의 마음을 열어줍니다'에서 `아내를 사랑하라'까지 철학과 사생활 등 분야도 다양하다. 상업간판까지 가세했다. 상호만을 표기하지 않고 앞에 이러저러한 수사를 붙여 거리를 어지럽힌다. 그 중에는 꼭 필요한 정보라거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은 참견과 잔소리에 가깝다.

사실 우리는 계도라는 형식에 비교적 잘 길들여져 있다. 다 좋은 말씀이고, 또 뭘 가르쳐준다는 데야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은 우리 문화 속에 자리잡은 계몽적 전통과도 관계가 있다. 그러나 내 경우를 돌이켜보면 더 직접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 같다. 가령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가슴에 붙이고 다니던 표어 같은 것 말이다. 가로 세로 몇 센티미터의 규격에다 불조심은 흰 바탕에 붉은 글씨, 산림녹화는 녹색 글씨, 또 어떤 것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

나중에는 아예 각종 표어를 인쇄해 부채식으로 겹겹이 접은 상품이 나와서 매주 앞뒤를 뒤집어가며 달기도 했다. 그걸 달지 않으면 당연히 복장불량으로 벌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게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문제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몰라도 인간은 자기 자신도 동의하는 당연한 말일수록 더욱 남의 입을 통해 듣기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잔소리란 듣는 사람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옳은 말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표어가 과연 담배를 끊게 만들 수 있을까. 또 부모로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들으면 아이들은 보던 책도 덮어버리기 일쑤이다. 역시 당위적인 명제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역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 때문에 잔소리가 반복되는 것인지 잔소리 때문에 잘못된 행동이 반복되는 것인지, 잔소리와 비행의 애증관계도 만만찮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잔소리에 저항하는 쪽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틀을 만드는 일은 동시에 이탈자를 양산하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꽤 오래 전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표어를 공모한 일이 있었다. 상금이 탐나 응모하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당선작은 `기권은 문화인의 수치다'였는데, 그 간명함에 얼마나 감탄했던지. 그러나 오늘 그 표어를 다시 지어본다. `잔소리를 듣는 것은 문화인의 수치다.' 그런데 또다시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문화인이 누구인가. 여러 가지로 계도를 당하며 살아온 사람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한겨레신문 2001.07.13(금) 시평 수록)

은희경(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동아일보」신춘문예 중편 부문에 「이중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면서 90년대 한국문학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1997년에는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제10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에는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최근 장편소설 <마이너리그>를 펴내 호평을 받았다.